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2화
19. 서화 앞장 떼기(2)
‘앞장 떼기’ 혹은 ‘뒷장 떼기’라고 부르는 수법은 종이의 앞뒤를 갈라내어 그림 한 점을 두 점으로 만드는 수법이다.
고대 회화, 한국화, 서화 등에 주로 사용된 방법인데,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두께가 있는 화선지에 그려져 있다. 보통 얇은 한지 두어 장을 겹쳐 붙인 종이인데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 먹물이 뒷면까지 배어든다.
이처럼 화선지에 그리거나 쓴 작품을 물에 담그거나 물에 적신 천 등에 올려놓아 작품의 뒷면을 적신다. 전통 안료는 물에 젖어도 잘 번지지 않아서 이 방법을 쓸 수 있지만, 기술자마다 이때 글이나 그림이 번지지 않게 하는 각자의 비법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충분히 물에 불린 종이의 앞장과 뒷장을 조심스럽게 분리해 내면 같은 서화가 두 장 나오는 것이다.
이 경우 앞면은 원작 그대로지만 뒷장은 보통 앞장보다 색이 조금 흐리다.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색이 희미한 뒷장에 살짝 가필을 해서 두 장의 진작을 만들어 내면 ‘앞장 떼기’가 완성된다.
요즘은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가짜 그림 제작 방법이 발전해서 이처럼 고전적이고 손이 많이 가는 방법은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표구를 잘한다는 집에 서화 표구를 맡겼을 때 소장자도 모르게 표구사에서 작품이 한 장 더 늘어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늘어난 뒷장은 진품으로 둔갑해 지하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이고.
1999년 7월에 한국에서 15~6명으로 구성된 미술품 위조단이 검거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시대 고서화부터 근대 동양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위조해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겼는데 이 위조단에는 화랑 운영자, 미술품 중개상, 화가 등은 물론 고미술협회 간부 출신의 저명한 감정가도 속해 있었다.
이들의 작품 위조 수법은 다양했는데 그중 앞장 떼기가 사용된 작품도 있었다고 한다.
제이든이 지금 보고 있는 시타의 옛 서화 역시 앞장 떼기 수법을 사용해 만든 것으로 보였다.
앞장 떼기로 만든 서화의 경우 다른 위작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다. 앞장과 뒷장 모두 진작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장과 뒷장의 가격 차이는 크다.
만약 이 서화가 앞장이라면 제이든에게 보이는 푸른 아우라가 다른 진품 유물과 마찬가지로 짙을 것이다.
푸른 아우라가 보이긴 하지만 매우 옅은 걸로 보면 이 서화는 진작에서 떼어낸 뒷장이고 앞장에 비해 흐린 부분을 위작자가 덧칠해 수정한 작품인 듯했다.
버나드가 구입 가능한 작품이었다는 걸 생각해도 뒷장이 맞을 것이다. 앞장이었다면 훨씬 더 가격이 높았을 테니까.
“호, 신기하네. 그런 수법이 있었군. 수묵화는 물에 담그면 글이나 그림이 다 번지는 줄만 알았는데.”
제이든의 설명을 듣던 피니어스가 감탄했다.
“그럼 이 서화는 메이린 부인이 소장한 진품 서화의 뒷장이란 말이지? 동방 대륙의 누군가가 뒷장을 떼어낸 후 앞장을 메이린 부인에게 팔았거나 메이린 부인의 소장품에서 뒷장을 떼어내 빼돌렸거나 한 거겠네?”
“예. 아마 메이린 부인에게 판매하기 전에 떼어냈을 거예요. 앞장 떼기를 한 다음 뒤처리도 했어야 할 테니까요.”
앞장 떼기를 하고 난 서화는 당연히 원래 상태보다 얇아진다.
떼어낸 두 장의 그림 뒷면에는 다시 한지를 한두 겹 대서 보강해야 하는데 최대한 원작과 비슷한 종이를 고르고, 오래된 것처럼 조작해 앞판의 종이와 같은 종이처럼 만드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거 같은 종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 종이에 황산을 쓴 것 같아요. 감정 마법을 썼을 때 미세하게 황산 흔적이 느껴지거든요.”
“흠, 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마법을 쓸 순 없지만 연기에 그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두 가지 방법을 다 쓴 것 같네요. 누군지 솜씨가 정말 좋은데요.”
새 종이를 옛날 종이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종이를 실내에 걸어 놓고 서서히 연기에 그을리게 해서 갈변을 유도하는 방법을 많이 쓴다.
또한 농도를 아주 묽게 한 황산을 종이 위에 살짝 뿌려 주는 방법도 있다. 황산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 위에 탄화 현상이 나타나서 두어 달쯤 지나면 수백 년 지난 종이처럼 변하는 것이다.
지구에서는 자외선으로 종이를 손상시키는 방법도 쓴다고 하지만 카이엔에서는 아직 보고된 사례가 없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원작의 종이와 똑같은 상태로 맞추기 위해서는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하다.
“참 재주도 좋다!”
“그러게요.”
감쪽같이 하나의 화선지로 보이는 서화의 앞뒷면을 살펴보며 그들은 또 감탄했다.
제이든 자신도 이런 서화를 이렇게 감쪽같이 두 장으로 만들어낼 자신은 없었다.
“동방 유물이라면 나도 꽤 보는 눈이 있다고 자신했는데, 역시 2급 감정사는 대단하네. 내년에 2급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자신이 좀 없어지는걸?”
“아니에요. 피니어스 씨. 내년에 시험 보시면 꼭 합격하실 것 같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이미 다린토스에서 피니어스가 3급 실력은 넘어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하르의 황금닭과 병정 시계에 걸린 방어 마법을 감지하고 해제할 수 있다는 건 3급 감정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 서화는 위작이라고 보긴 어렵고, 진작이라고 감정하기도 애매하네?”
원작에서 떼어낸 뒷면이니, 원작자의 진품이 맞긴 한데…….
“진작이긴 한데 아무래도 앞면보다는 가치가 떨어지죠. 만약 다른 사람이 가필했다면 가치가 더 낮고요. 감정서를 작성한다면 그런 내용을 명시해야 할 거예요.”
“작가가 누군지 알아야 보다 정확한 감정이 될 텐데, 아버지가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계셔서 자료도 찾아보시고 여러모로 알아보시는 중이야.”
“동방 대륙의 위작이 카이엔으로 흘러들어오는 경로가 있을 텐데요. 이 작품은 언제 어떻게 왔는지 궁금하네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침 버나드가 돌아왔다.
“버나드 씨,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이 서화의 구입 경로를 알 수 있을까요?”
“음, 평소 알고 지내는 고미술품 중개상이 소개해 준 수집가에게서 구매했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그게 실은…….”
제이든의 설명을 들은 버나드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요. 동방 유물의 위작이나 모작을 들여오는 조직과의 연결을 의심하시는군요.”
“중개상을 알려주시면 제가 아버지께 연락드려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쪽으로는 우리 아버지가 발이 좀 넓으시거든요.”
피니어스가 씩 웃으면서 말했고 버나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렌 박사님이 동방 유물 쪽으로 정통하신 거야 다들 알죠. 중개상은 여깁니다.”
버나드는 종이에 주소와 상호명, 중개상의 이름을 적어서 피니어스에게 건네주었다.
* * *
“삐이이익!”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어딘가 멀리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던 포이와 아래쪽에 있던 아실리가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위를 바라봤다.
“핀이다!”
피니어스가 외치며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제이든이 버나드에게 서화를 맡긴 후 따라 나가 보니 피니어스는 박물관의 뜰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져서 옅은 보랏빛을 띠기 시작한 하늘에 커다란 매 한 마리가 천천히 선회하는 중이었다.
“핀!”
피니어스가 외치며 팔을 올리자 매는 삐이익 응답하듯 부르짖고는 서서히 그의 팔로 내려왔다.
“와!”
피니어스의 팔에 내려앉은 매를 보고 제이든이 감탄했다.
크고 멋진 매였다. 머리와 등은 검푸른 색이고 몸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색이 옅어져서 날개깃 끝은 밝은 파란색이었다. 배는 밝은 크림색에 검정 가로무늬가 있다.
부리는 얼굴에 닿는 부분은 금빛이고 뾰족하게 굽어진 부분은 검정색이었다. 금빛 눈자위에 눈동자는 피니어스와 똑같은 남색이었다.
옅은 노란색을 띤 굵은 다리에는 파란 우편통을 달고 있었다. 전에 본 비둘기의 우편통보다 훨씬 컸다.
“멋진 매네요. 피니어스 씨와 많이 닮았어요.”
둘 다 검푸른 머리에 남색 눈, 골격이 크고 근사한 외모.
매는 마치 피니어스를 동물로 만들어 놓으면 저렇겠다 싶은 모습이었다.
피니어스의 팔에 앉은 매는 남색 눈을 반짝이며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피이이.”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던 포이가 그의 귀를 붙잡고 머리카락 뒤로 얼굴을 숨겼다.
“괜찮아, 포이. 핀은 다른 동물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아. 핀, 저 토끼는 내 친구 제이든의 토끼야. 절대 놀라게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삐익.”
새 특유의 동작으로 머리를 기웃기웃하면서 제이든과 어깨 위의 포이를 뜯어보던 매는 납득한 듯 짧게 울고 이번엔 제이든의 발치에 있는 아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실리는 몸을 숨기기는커녕 몇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눈과 남색 눈이 잠시 똑바로 마주 보다가 서로 인정한 듯 동시에 가볍게 머리를 돌렸다.
피니어스가 웃었다.
“아실리는 역시 대단하네. 핀과 눈싸움을 하면서 밀리지 않는 동물은 별로 없는데.”
“여자친구분의 매인가요?”
“응, 새끼였을 때 내가 선물했어. 이 애 이름도 피니어스야. 우리는 핀이라고 부르지.”
피니어스는 자신을 닮은 아기 매를 여자친구에게 선물했고, 여자친구는 강아지 레오를 피니어스에게 선물했다.
“혹시 여자친구분은 금발이에요?”
“맞아, 어떻게 알았어?”
제이든은 피니어스의 다리에 매달려 왕왕 짖으며 핀을 반기고 있는 레오의 금빛 털을 바라보았다.
혹시 여자친구분은 레오를 닮았으려나?
“왕?”
신나게 꼬리를 흔들고 있던 레오가 제이든의 눈길을 느꼈는지 돌아보면서 순진한 얼굴로 짖었다.
음, 아닐 거야. 잘생긴 강아지긴 하지만 레오를 닮은 여자분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가네. 괜한 생각을 했어.
제이든이 속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니어스의 여자친구에게 사과를 하는 동안 피니어스는 매의 다리에 묶인 우편통에서 편지를 꺼냈다.
피니어스가 정원의 벤치에서 편지를 읽기 시작하자 매는 훌쩍 뛰어서 레오의 등에 내려앉았다.
핀이 반가운 듯이 부리로 레오의 귀를 쪼자 레오가 귀를 펄럭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레오가 펄쩍펄쩍 뛰자 매도 땅에 내려앉아 겅중겅중 뛰었다. 둘이 쫓고 쫓기며 노는 게 사이가 좋아 보였다.
-피니어스와 매라니, 잘 어울리네.
아실리가 중얼거렸다.
“응?”
제이든이 내려다보자 아실리가 대답했다.
-카이엔의 옛이야기 중에 ‘피니어스의 날개’라는 이야기가 있어. 피니어스라는 이름은 그 옛이야기에서 따왔을 거야. 그 이야기에 나오는 매 이름이 피니어스거든.
“아하.”
편지를 다 읽은 피니어스가 벤치에서 일어나자 핀이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고생했어, 핀. 안 그래도 오늘쯤 올 줄 알고 간식을 준비했지.”
피니어스가 허리에 찬 전대에서 육포를 꺼내더니 매에게 주었다.
“왕!”
레오가 뒷발로 일어서서 피니어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넌 점심 많이 먹었잖아. 핀처럼 먼 길 온 것도 아니고.”
“왕, 왕!”
“그래, 인심 썼다. 핀 덕에 먹는 줄 알아.”
피니어스의 전대에서 레오의 간식도 한 움큼 나오는 걸 본 포이가 제이든의 귀에 얼굴을 비벼댔다.
“포이이!”
“앗, 간지러워!”
“피야아!”
레오와 핀을 보며 웃고 있던 제이든은 포이가 귀를 당기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자기 배낭에 손을 넣었다.
포이 줄 당근 과자와 아실리 줄 고양이용 비스킷이 줄줄이 따라나왔다.
“제이든 씨, 피니어스 씨, 저녁 식사하러 가실까요?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건물에서 나온 버나드가 박물관인지 동물원인지 모를 정원을 마주하고 잠시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