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1화
19. 서화 앞장 떼기(1)
베른 강은 제노비아 시 전체를 가로질러 남부를 향해 흐르는 강이며 수도원은 그 강을 뒤로하고 세워진 건물이었다.
“빨리 쾌속정을 준비시켜. 단속반도 하류에서 대기하게 하고. 눈에 안 띄게 해!”
마르틴 경감은 서둘러 팀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고 부엉이가 밤하늘로 연이어 날아올랐다.
그 이후의 일은 제이든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마르틴 경감이 여기서부터는 일반인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면서 제이든 일행의 참여를 단호히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새벽 흰 돛에 초록 줄무늬 세 개를 그린 배가 천천히 그 강을 지나갔다는 것, 치안국의 쾌속정이 그 배를 덮쳐서 새벽에 때아닌 선박 경주가 맹렬히 벌어졌고 덕분에 제노비아 시민 중 적어도 삼 분의 일이 새벽부터 잠을 깨어 강가로 나왔다는 것, 하류에서 그 배가 전복되었고 승선했던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는 것 등은 모두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다.
* * *
-앙리 루소는 무사히 구출되었다지?
아실리가 하품을 하면서 마룻바닥에서 뒹구르르 몸을 굴렸다.
평소엔 늘 침대에 눕는데 지금은 마루에 누운 걸 보니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따끈하게 데워 놓은 마루가 좋은 모양이다.
“그렇다나 봐. 구타를 심하게 당했는지 몸이 많이 상해서 반년은 잘 요양해야 한다지만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지.”
제이든은 침대 위에 앉은 채 포이를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대답했다.
포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딱 어른 주먹만 했는데 그새 한 달쯤 지났다고 제법 큰 것 같다.
크기는 별로 더 커지지 않았지만 무게가 확실히 더 나간다.
“이거, 이거, 배 좀 봐!”
제이든은 손가락으로 포이의 복슬복슬한 흰 털을 쓸어 분홍색 배를 드러냈다.
“피이이!”
포이가 당황한 듯한 소리로 울면서 앞발로 배를 가렸다.
아, 귀여워!
“가리면 뭐 해, 포이야. 배가 삐져나오는걸. 우리 포이 다이어트 좀 해야겠는데?”
배를 가린 앞발 옆으로 삐져나온 볼록한 뱃살을 살살 누르자 포이는 피이잇 소리를 지르더니 제이든의 손에서 뛰어내려 아실리에게 달려갔다.
“삐이이…….”
포이가 아실리의 옆구리에 엎어지자 아실리는 포이를 핥아 주면서 제이든을 나무라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왜 또 애기 놀리고 그래?
“미안, 미안, 우리 포이 뱃살 나와도 귀여워. 아니 배가 나와서 더 귀여워.”
“피잇!”
아실리는 토라진 포이를 다독거리면서 말했다.
-그 얘기나 마저 해 봐. 그래서 그 장물 조직은 다 못 잡았다는 거야?
“몰라. 마르틴 경감이 수사상 비밀이라고 자세히 말을 안 해 주고 우릴 브리오로 쫓아 버렸잖아.”
제이든은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들은 지금 다시 브리오로 돌아와 있었다.
마르틴이 그들을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수도원에 한나절 갇혀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설명도 안 해 주고 다음 날 일찌감치 브리오로 돌려보내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대충 듣긴 했잖아?
“그 배에 타고 있던 놈들은 다 잡았는데, 잡은 놈들을 디딤돌로 해서 본 조직을 덮치러 갔을 때 한번에 뿌리를 뽑진 못한 것 같아. 작전은 계속하는 중인가 본데 그렇게 쉽진 않을 것 같대.”
앙리가 소속돼 있던 장물 조직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고 오래된 곳이었다.
사회 곳곳에 조직원이 퍼져 있는데 점조직 형태로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어 중간에 선이 끊어지면 그 뒤를 캐기가 쉽지 않았다.
조직원 중에는 파비안 뒤포르처럼 협박을 받아 복제품 제작에 가담한 장인도 있지만 스스로 위작을 제작하는 작가도 있고, 시계는 일부일 뿐 다른 장물 암거래를 더 오래 해온 조직이었다.
“피니어스 씨가 그러는데, 그 조직 내에 감정사도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어.”
-감정사?
“응, 그래서 우리 접근을 더 차단하는 것 같대.”
-하긴, 위작이나 복제품을 다루는 조직이 감정사를 끼고 일하는 건 거의 필수니까.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피니어스 씨 말로는 그 조직과 관련된 감정사가 이름 없는 무명은 아닌 거 같다더라고.”
창문에서 스며들어와 바닥에 무늬를 그린 햇살이 조금 옆으로 옮겨가자 아실리가 햇살을 따라 몸을 뒤집었다.
아실리의 몸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포이가 복슬복슬한 몸을 굴려 아실리를 따라가서 다시 아실리의 옆구리를 베고 누웠다.
“아무튼,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대로 마르틴 경감이 우리에게도 경과를 알려 준다고 했어. 블랑셰 양의 거취도 알려 주고.”
제이든의 말에 누운 채로 머리를 끄덕거리던 아실리가 앞발을 길게 뻗으며 물었다.
-그런데, 피니어스랑 레오는? 같이 서화 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어?
아실리의 물음에 제이든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자친구에게 편지 쓰신단다. 편지 다 쓰시면 부르러 온대.”
피니어스는 제노비아에서 돌아오자마자 우편국부터 들렀고, 그 후 그간 있었던 일을 여자친구에게 알린다고 편지를 쓰러 방으로 들어갔다.
왜 우편국에서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우편국에는 사서함 확인을 위해 들른 거라고 했다. 여자친구와는 우편국 집배조를 이용하지 않고 따로 둘이서만 주고받는 개인 집배조가 있다나.
“아마 오늘내일 중에 올 겁니다. 제가 브리오 미술관에서 일 보는 거 아니까 미술관으로 날아올 거예요.”
집배조가 오면 보낼 편지 쓴다고 방에 들어박혔던 피니어스가 제이든의 방으로 찾아온 건 아실리와 포이가 배가 빵빵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 낮잠 한숨 자고 난 후였다.
“브리오 미술관에 가서 지난번에 보다 만 서화 좀 보죠.”
피니어스가 맡았던 세 점의 감정은 모두 끝났으나 버나드가 제이든에게 보여줬던 서화의 내력이 애매해서 한 번 더 자세히 보기로 했었다.
지난번엔 마르틴 경감이 찾아오는 바람에 충분히 보질 못했었다.
“그래요. 저도 자세히 좀 보고 싶었어요.”
제이든도 짐작 가는 게 있었기에 다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 * *
“어서 오세요. 제노비아에서 두 분이 큰 활약을 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활약은 무슨, 사람 하나 확인했을 뿐 마르틴 경감이 가둬놓는 바람에 방에만 있다가 왔는데요.”
“그 용의자 확인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 아무튼 피니어스 씨와 제이든 씨가 감정을 잘 해주신 덕분에 저희 전시회 준비도 순조롭습니다. 오늘 오신 건 그 서화를 다시 보시려는 거지요?”
“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그 서화는 제 개인 소장품이니 하루 종일이라도 보셔도 됩니다. 뭔가 알게 되면 제게도 꼭 알려주시고요.”
버나드는 빈방에 서화를 놓고 제이든 일행에게 마음껏 보라고 한 뒤 일을 보러 나갔다.
두 사람을 몹시 신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라 제이든은 버나드에게 고마워하면서 서화를 신중하게 들여다보았다.
이 세계의 동방 대륙에서 사용하는 글자는 세 가지가 있었다. 두 가지는 지구의 중국 한자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글자라서 제이든도 공부한다고 했지만 아직 다 터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타 왕조에서 사용했고 지금도 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글자는 한자와 거의 유사하다. 차원이 다른데 어째서 같은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서화는 아래쪽에 산과 계곡이 그려져 있고 위쪽은 글이 쓰인 작품이었다.
제이든이 한자가 짧아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자로 쓰인 것으로 보아 지구에서 넘어온 것이 아니라면 시타 왕조의 서화로 봐야 할 것이었다.
“제이든, 내가 제노비아 가기 전에 이 서화를 영상으로 기록해서 아버지께 보냈거든?”
“수하르 렌 박사님께요?”
피니어스의 부친인 수하르 렌은 동방 출신 문화인류학자였다.
동방 문화에 대해서는 카이엔에서 첫손에 꼽히는 학계의 권위자이며 또한 카이엔에서는 매우 드문 서예의 대가이기도 했다.
“응, 아버지는 감정사는 아니지만 서화라면 카이엔에서 우리 아버지만큼 많이 본 분은 없을 거라서 아시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지.”
피니어스의 얼굴을 보니 뭔가 소득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답변이 벌써 왔군요?”
“사서함을 언제 보실지 몰랐는데, 아까 우편국에 들러서 영상 사서함을 확인해 보니 답변이 와 있었어. 보신 적이 있는 서화라고 하시더군.”
수하르 렌 박사는 젊은 시절부터 서화에 심취하여 동방 대륙 곳곳을 다니며 서화를 연구했었다.
그때 옛 시타 왕국의 유적지인 서림에서 몇 장의 서화를 보았는데 그중 아무도 내력을 모르는 서화가 한 장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영상구가 없어서 영상 기록은 못 해 놓았지만 아버지가 기록해 놓으신 게 있었어.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서화는 당시 발견자인 서림의 노학자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나중에 수집가인 메이린 부인이 사들였다고 했어.”
피니어스는 영상 사서함으로 아버지가 기록해 둔 서첩을 확인했는데 버나드가 소장한 서화가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감정사는 아니지만 동양 문화의 권위자이자 서예가로서 그때 본 작품은 매우 귀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고 단언하셨어.”
제이든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생각에 빠졌다.
수하르 렌 박사가 그 정도로 단언했다면 이 서화는 분명히 귀한 진품일 것이다. 메이린 부인만 해도 동방 수집가를 잘 모르는 제이든이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하고, 일단 손에 들어온 작품은 안 내놓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수하르 렌 박사가 본 작품은 아직도 바다 건너 동방에 있을 확률이 높고, 그렇게 귀한 작품이라면 학예사 버나드가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아우라가 있을까? 위작이라면 아우라가 아예 없을 텐데 진품 특유의 푸른 아우라가 떠돌고 있으면서 그 빛이 이처럼 약한 경우는 처음 봤다.
“혹시?”
종이를 만져 본 제이든은 뭔가 알 것 같았다.
“피니어스 씨, 혹시 ‘앞장 떼기’라는 서화 위작 수법을 들어 보셨어요?”
“앞장 떼기?”
피니어스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내가 알고 있는 서화의 위작 방법이라면 기술 좋은 모작자가 원작을 모사한 다음에 종이나 비단을 그을리거나 부식시켜서 오래된 것처럼 만드는 방법이 있고, 작가의 서명과 인장만 위조해서 오래된 무명 작가의 그림에 낙관을 만들어 넣는 방법도 흔히 쓰이지. 원작 위에 종이를 놓고 등을 비추어서 베끼는 방법도 있고.”
“맞아요. 서화 위조에는 그런 방식이 일반적인데, 드물지만 ‘앞장 떼기’라고 서화 한 장으로 두 장을 만드는 방법이 있어요.”
동방 대륙에서는 서화 위작도 성행한다고 하지만 카이엔에는 서화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서화 위작 방법도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었다.
동방 대륙에 가 본 적도 없는 제이든이 이 수법을 아는 것은 이 ‘서화 앞장 떼기’가 한때 한국에서 많이 사용된 수법이기 때문이다.
제이든이 권재인이던 시절, 자주 드나들던 해송박물관에서 열린 고미술 관련 강의 중에서 이 수법에 대해 들은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