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0화
18. 시계 괴도(6)
“아……, 제이든 씨.”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다니엘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쉰 그녀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마르틴을 따라서 수도원의 빈방을 향했다.
마치 수사의 인도를 따르는 여신도처럼 보여서 기도하러 온 사람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동요가 없었다.
“어떻게 알아봤어요?”
의자에 앉은 그녀가 제이든에게 물었다.
“그림자 마법이 다 통하는 건 아니니까.”
“예. 그래서 마법사들 근처엔 가지도 않았는데, 감정사도 2급쯤 되면 환영 마법 정도는 쉽게 깨나 보네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제이든은 다니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 장식이 없는 길고 수수한 회색 드레스, 그 위에 걸쳐 입은 여성용 로브, 비스듬히 멘 가방.
여자치고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다소 중성적인 데다 머리가 짧은 숏커트여서 언뜻 보면 소년 같지만 이렇게 보니까 분명히 여자다. 나이도 제이든 또래는 되어 보였다.
지난번에 아무 의심 없이 계속 소년으로 본 것은 옷차림이나 말투, 행동거지 탓도 있지만 환영 마법의 힘도 덧씌워져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마르틴 경감이 그녀에게 액자에 든 그림을 내밀었다.
“아가씨, 다니엘 블랑은 본명이 아니지?”
그녀는 그림을 무릎에 놓고 그리운 듯이 바라보았다.
“역시 이 그림 때문이네요. 앙리 아저씨가 이 그림을 침실에 뒀을 줄은 몰랐어요.”
마르틴은 그림 중앙 부분에 노인이 안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혹시 이 아이가 아가씨인가?”
“맞아요. 이게 바로 저예요.”
그녀는 일어서서 마르틴과 제이든 일행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여러모로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블랑셰 뒤포르예요. 파비안 뒤포르의 손녀죠.”
* * *
블랑셰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시계 공방에서 놀았고 공방 직인들은 블랑셰를 공방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워했다.
인형 대신 시계 부속을 가지고 놀았고 장난감 조립보다 시계 조립을 먼저 배웠다.
열 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시계에 사용되는 마정석을 어른 직공들만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으며 열다섯 살 때는 장인 소리를 들을 만큼 실력 좋은 시계공이 되었다.
“모두 제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거라고 했죠. 할아버지의 제자들 중에서도 저만큼 시계를 잘 만드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파비안 뒤포르는 마정석의 시대에 태어난 장인이지만 그 이전 세대, 오로지 수공으로만 만들던 기계식 시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대륙전쟁 이전의 골동품 시계를 볼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갔고 버려진 옛 시계를 모아 분해하고 조립하며 연구하곤 했다.
실전된 옛 시계 제작법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도 쉬지 않아서 많은 시행착오 끝에 옛 기법대로 제작까지는 어려워도 웬만한 수리는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세월 속에 숨을 멈추었던 많은 옛 시계가 파비안 뒤포르의 손에서 다시 살아나 째깍째깍 숨을 쉬었다.
“마정석은 편리하고 기능적으로도 우수하지만 옛 시계 장인들이 손으로 만든 시계야말로 진정한 예술품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블랑셰는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장인으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주위에서도 모두 그녀를 할아버지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런 그녀가 시계 장인으로서의 길을 버리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고 평생 명예를 잃지 않고 살았지만 딱 한 번의 잘못으로 지옥에 빠지게 되고 말았어요.”
그녀는 말을 잇기 힘든지 한동안 침을 삼켰다.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까?”
마르틴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지금 다 말해 버리는 게 낫겠어요. 어차피 일 끝나면 자수하러 치안국에 갈 생각이었는걸요.”
파비안 뒤포르는 어느 날 데이몬 백작의 시계 수리 의뢰를 받았다. 당시 파비안의 거주지는 카이에른과 거리가 꽤 있었기에 시계는 인편을 통해 공방에 전달되었다.
아름다운 시계였다. 일곱 왕국 중 문화적으로 가장 뛰어난 로시난트 왕실의 유물이었던 만큼 그 고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마정석 한 톨 쓰지 않고 오로지 수작업으로만 이뤄낸 옛 시계였다.
파비안은 시계를 보자마자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시계를 열어 본 뒤 그 정묘함에 사로잡혔다.
그는 몇 날 며칠 시계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고, 연인을 어루만지듯 애정이 담긴 손길로 시계를 쓰다듬었다.
무사히 수리가 끝났지만 그는 차마 시계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가질 수 없다면 똑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한 그는 공방의 문을 닫고 안에 들어박힌 채 부속 하나하나를 똑같이 따라 만들어 보았다.
파비안은 그전에도 수십 번 옛 시계를 복원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마정석 이전의 시계 제작 기법이 사라졌기에 부분적인 성공은 있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로시난트의 시계를 완벽하게 복제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성공에 너무 가슴이 부풀었어요. 그리고 하면 안 될 일을 하셨죠.”
원래는 로시난트의 시계에 매혹된 나머지 똑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소장하고 싶어서 복제품을 만들었는데, 복제품이 누구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파비안은 데이몬 백작가에 복제품을 보내고 말았다.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분인데, 그때는 마치 뭔가에 씐 것 같았다고 하셨어요.”
그가 시계를 바꿔치기한 것을 아무도 몰랐다. 데이몬 백작가에서는 수리가 잘 되어 돌아온 시계를 보고 기뻐했고 파비안 뒤포르의 이름은 더 유명해졌다.
평생 단 한 번의 일탈이라고 생각했고,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눈에 아른거리던 시계도 손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공방에서 먹고 자며 관리를 맡았던 앙리 아저씨였어요.”
앙리 루소는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은 제자였지만 진득한 면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비슷하게 손재주가 좋고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사촌이 한 명 있었다.
그 사촌은 겉으로는 평범한 골동품상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장물 거래를 주로 하는 암시장 상인이었고 도둑 길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앙리는 파비안이 데이몬 백작가의 시계를 바꿔치기한 것까지는 몰랐지만 몰래 복제품을 만든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사촌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장물아비였고 도둑 길드의 조직원이기도 했던 사촌은 즉시 바꿔치기를 의심했다.
앙리의 사촌은 파비안을 다그쳐 바꿔치기의 진상을 알아냈고, 자수하겠다는 파비안을 협박해 자신들의 말을 따르게 했다.
파비안에게 수리 의뢰가 들어온 옛 시계 중 값나가는 것을 골라 복제품을 만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의뢰자에게 복제품을 돌려주고 원래의 시계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팔거나 뇌물로 상납했다.
처음에 시험 삼아 에테노리움의 리세토 자작가의 시계를 복제품으로 바꿔쳐 봤을 때 들키지 않자 그들은 점점 더 값비싼 시계에 손을 뻗쳤다. 사촌은 앙리도 조직에 끌어들여서 연락책으로 썼다.
신의 솜씨라 할 만한 복제 기술을 지닌 파비안 뒤포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지만 파비안은 극심한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잠적하고 말았다. 병석에 누운 그는 임종 전에 손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고 충격을 받은 블랑셰 역시 시계 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후회와 죄책감 때문에 말년에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해주시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조부의 고백으로 충격을 받은 블랑셰는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제가 만회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놈들이 원작을 복제품과 바꿔치기했다면 나는 복제품을 회수하고 원작을 돌려주자는 생각을 했지요.”
“…….”
“그래서 몇 년간 잠입과 은신 등의 기술을 배웠고 도둑들에게 유용한 마법도 배웠습니다. 앙리 아저씨가 많이 도와주셨지요.”
블랑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제가 시계 만드는 재주만 좋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 방면으로도 소질이 있더라고요.”
“…….”
“신고하고 법적 처벌을 받는 게 옳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복제품을 그냥 두고 싶지도 않았고요.”
게다가 신고를 해서 수사가 시작되면 자칫 장물 조직에서 지하로 숨어 버릴지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임종 전 고백만 했을 뿐 어떤 시계가 바꿔치기 된 건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복제품이 어디에 있는지, 원래의 시계는 어디로 팔려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블랑셰는 할아버지가 수리를 한 옛 시계의 목록을 뽑아서 앙리의 도움을 받아 그중 복제품으로 바꿔치기가 됐을 만한 것을 몇 개 뽑았다.
직접 잠입해서 확인해 볼 참이었다.
“앙리 아저씨는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제가 꾸준히 설득했어요. 결국 저를 도와줬죠. 망도 봐주고, 원래 시계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봐 주고.”
그녀는 제이든 일행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제가 여섯 건의 시계를 훔쳤지만, 들어가 본 집은 아홉 집이에요. 세 군데는 복제품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다린토스 영주관도 그런 경우인가요?”
“맞아요. 그 황금닭과 병정 시계도 할아버지가 수리한 목록에 들어 있었는데, 공방에 받아서 수리한 게 아니고 할아버지가 영주관에 묵으며 수리한 거라 복제품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 확인하러 갔었는데 진품이었어요.”
절도가 계속되면 보안이 철저해질 것은 예상했지만, 바꿔치기 된 복제품이 몇 점 되지 않으니 되는 데까지 해볼 각오였다.
어려운 것은 복제품과 바꿔치기 된 진품을 찾는 일이었다.
앙리와 블랑셰의 조사 끝에 파악된 복제품 시계는 6~7점 정도로 추정되었다.
그중 몇 개의 시계는 이미 어둠의 경로를 통해 판매되었고, 몇 개는 조직에서 보관 중이었다. 블랑셰와 앙리는 브리오와 제노비아에서 바꿔치기 된 진품 시계 2개를 장물 보관 창고에서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블랑셰의 짓임을 알아차린 장물 조직에서 그녀를 제거하려고 나섰다.
“그때 산에서 봤던 남자들, 그렇지?”
“예.”
앙리는 원래 그들과 같은 편이었지만 블랑셰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조직의 제거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조직이 드러날까 봐 저와 앙리 아저씨의 입을 막으려고 해요.”
블랑셰는 마르틴을 올려다보며 간절한 눈빛을 했다.
“저도 앙리 아저씨도 죄를 지은 건 알아요. 처벌은 달게 받을게요. 부탁이니 앙리 아저씨를 구해주세요.”
마르틴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앙리가 사라진 지 이미 꽤 시간이 지났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앙리 아저씨는 아직 살아 있어요. 저까지 잡을 미끼로 써야 하니까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가늘게 말린 종이를 꺼냈다. 종이의 모양으로 보니 비둘기나 부엉이가 전달한 것으로 보였다. 우편국용 점자나 속기가 아니라 수기로 쓴 글자였다.
-06시, 베른 강, 수도원 뒤, 흰 돛에 초록 줄 세 개.
“앙리 아저씨와 저와의 연락망을 통해 온 거예요.”
06시라면 이제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