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8화
18. 시계 괴도(4)
“피잇, 피야, 피이잉!”
마차에서 튀어나온 흰 토끼가 까만 귀를 흔들며 달려와서 아실리의 품에 뛰어들었다.
“포이, 위험하니까 가방 안에 숨어 있으랬는데 왜 나왔어?”
“피이잉!”
포이는 아실리의 목덜미를 놓더니 울먹거리며 제이든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그래, 괜찮아. 아실리도 나도 다 괜찮아. 피니어스 씨랑 레오도 무사하고.”
“포오이.”
겨우 진정된 포이가 조그맣게 숨을 내쉬자 제이든은 포이를 어깨에 올리고 쓰러져 있던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제이든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소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며 소년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말 한 마리가 푸르르 투레질을 하면서 그의 목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헤이즐, 나 괜찮아. 너도 안 다쳤지? 짐도 무사하고?”
소년은 말을 두들겨 주고 말의 안장에 묶인 가방도 확인한 후 제이든과 피니어스 쪽으로 향했다.
동글동글하게 말린 갈색 곱슬머리가 선이 가는 얼굴 주변을 감싸고 있고 파란 눈이 영리해 보였지만 큰일을 겪은 뒤라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도 앳된 것이 열일곱? 열여덟 정도일까?
“어떻게 된 일이지?”
제이든이 묻자 소년은 침을 삼켰다.
“레이니움의 친척집에 가는 중이었는데요. 산지기의 오두막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했는데 아까 그자들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공격해 왔어요.”
소년은 피니어스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용감한 개랑 기사님이 나타나지 않으셨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예요.”
“왕!”
레오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사는 아니야.”
피니어스가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 후 옷을 털면서 제이든에게 말했다.
“레오가 달려가기에 따라왔는데 마침 어떤 놈이 몽둥이인지 칼인지로 저 애를 후려 패려는 순간이더군. 레오가 먼저 덤벼들었고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그놈들이 바로 칼부터 휘두르더라고. 무슨 말을 해 볼 틈도 없었어.”
“그자들이 왜 널 공격했니?”
소년은 제이든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여기까지 내려왔을 때 그놈들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서 덤벼들었어요. 숲속에서 나온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저기, 오두막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해요.”
소년은 걱정스럽게 아래쪽에 보이는 산지기의 오두막을 가리켰다.
“산지기 아저씨가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이 난리 통에도 나타나지 않으시는 게 이상해요.”
“순찰을 도는 중인지도 모르지. 오두막에 가서 좀 기다릴까? 신고도 해야 할 테니.”
제이든은 소년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이름이 뭐지? 난 제이든 로스라고 해.”
“나는 피니어스 렌.”
소년은 파란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피니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신시아 렌 박사님의 아드님이세요?”
“우리 어머니를 아니?”
“예, 삼 년 전 레이니움에서 열린 ‘생활 속 마정석의 융화’ 강연을 들었어요. 정말 훌륭한 강연이었어요.”
그는 존경 어린 눈으로 피니어스를 바라보고 다시 제이든에게 고개를 돌린 후 두 사람의 중간쯤에다 대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니엘 블랑입니다. 명망 높은 감정사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잠깐 눈을 마주쳤다.
“아직 어린데 견식이 대단하네.”
피니어스 렌이라면 워낙 오래전부터 유명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제이든은 최근 2년 사이에 유명해진 감정사다.
관련 업종 종사자 사이에서는 명성이 높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소년은 두 사람을 다 알고 있었다.
“일단 산지기의 집으로 가보지. 이야기는 그 후에 하고.”
일행은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멀찌감치 보이는 산지기의 오두막을 향해 내려갔고 제이든은 오두막에 가까워질수록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두막 앞쪽으로 펼쳐진 공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행자들이 천막을 칠 수 있도록 반반하게 다져진 땅 옆에 벽돌로 쌓은 화덕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우물이 있었다.
공터 안쪽에 있는 산지기의 집은 오두막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꽤 탄탄하게 잘 지은 통나무집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데?”
피니어스의 말대로 비스듬히 열려 있는 오두막의 문 사이로 노란 불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발자국이 많은데요?”
집 앞의 공터에 말굽 자국과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제이든은 몸을 긴장시키며 아까 주워서 마부석에 기대 놓았던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혹시 몰라 버리지 않았던 게 다행이다.
피니어스가 말 뒤에 걸쳐 두었던 봉을 잡더니 길쭉하게 뽑았다. 지금 보니 피니어스가 휘두르던 봉은 주운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다니던 호신용 삼단봉인 모양이었다.
“전 뒷문 쪽으로 가볼게요.”
공터 초입에서 마차를 내린 제이든이 포이를 마차 안에 놔두고 발소리를 죽인 채 집의 뒤쪽으로 돌았다.
“아실리, 포이랑 같이 있어.”
-같이 갈래.
아실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제이든의 다리 옆에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닫혀 있는 뒷문을 슬쩍 당겨 보자 삐이꺽 소리가 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뒷문 안쪽은 바로 주방이었다.
“불이 켜져 있네?”
조그만 램프가 하나, 선반 위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제이든, 그쪽은 어때? 집이 빈 것 같은데?”
앞쪽에서 피니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을 통해 거실로 나가니 피니어스가 집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집을 뒤진 흔적이 있어.”
무질서하게 비뚤어진 가구나 열려 있는 서랍과 장, 마룻바닥에 찍힌 발자국 등을 보면 침입자가 있었던 건 분명한데 산지기는 어디로 갔을까?
등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 사람이 있었을 텐데.
“말이 없어요.”
다니엘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말?”
“예. 마구간을 봤는데 말이 없어요.”
“비둘기는?”
“비둘기장도 비어 있어요.”
산지기라면 당연히 말이 있을 것이고 전서구도 한두 마리는 데리고 있을 텐데.
비둘기는 연락할 곳이 있어 보냈다 치고 혹시 말을 타고 순찰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주간 순찰이라기엔 시간이 늦고 야간 순찰이라기엔 또 너무 이른 시간인데.
혹시 몰라 우물까지 들여다보았지만 다행히 우물은 깨끗했다.
“일단 좀 쉬면서 산지기를 기다려 보자.”
마차를 집 앞 공터에 들여놓고 말들을 마구간에 넣었다.
“혹시 모르니 문은 닫지 말자. 고삐도 느슨하게 걸쳐만 두고.”
말에게 물과 건초를 주고 아실리와 레오, 포이에게도 저녁거리를 챙겨준 다음 제이든은 배낭에서 커피병을 꺼내 커피를 끓였다. 진한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듯했다.
“자, 이제 이야기를 좀 할까? 다니엘, 아까 너를 공격한 사람들이 누군지, 왜 공격했는지 전혀 몰라?”
소년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산지기는 잘 아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세 번 묵었어요. 맨 처음엔 어렸을 때 어른들이랑 같이 와서 천막을 쳤는데 산지기 아저씨가 여자와 아이들은 집 안에서 자게 해줬거든요. 그담에 저 혼자 두 번 왔었고요.”
“피니어스 씨는 산지기 알아요?”
“나도 한 번 지나갔을 뿐이라 얼굴은 알지만 자세히는 모르지. 난 저기 화덕 옆에 천막 치고 하룻밤 자고 갔었어.”
“일단 산지기가 돌아오는 걸 기다려 봐야겠네요. 간단히 요기나 하죠.”
놀란 탓인지 입맛이 없었지만 다린토스를 떠날 때 준비한 건량과 빵으로 요기를 하고 산지기를 기다렸다.
제이든은 혼자 답답해서 손을 폈다 쥐었다 했다. 이럴 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비둘기도 없으니 치안대에 연락도 못 하고.
밤이 깊어도 산지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니엘은 재우고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차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두 개 있는 방 중에 작은 쪽이 손님용인 것 같아 다니엘을 거기서 재우고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거실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남의 집에 불 피우는 게 좀 꺼림칙하긴 했으나 날이 추워서 거실의 벽난로에 불을 피웠더니 레오가 그 앞에 배를 깔고 누워서 코를 골았고 아실리와 포이도 레오의 털에 파묻혀서 잠들었다.
“저거 보면 아까 그렇게 으르렁거리면서 이놈 저놈 물어뜯던 개랑은 다른 생물 같은데요. 세상 무해하게 보이는데.”
“남 말 하네. 나도 아실리가 그렇게 사나운 고양이인 줄 몰랐다. 밉보이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저 다니엘이라는 아이 말이에요. 뭔가 좀 숨기는 것 같지 않아요?”
“평범하진 않아. 악수할 때 손 보니까 굳은살이 많이 박혔던데.”
“그렇죠? 손으로 하는 일을 많이 한 손 같던데요. 세공이라든지 조각이라든지.”
“그나저나 여기 산지기는 어디로 간 걸까. 혹시 아까 그놈들이 정말 산지기를 노린 거라면…….”
피니어스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나무 탁자와 의자, 벽난로 위에 얹힌 여인의 초상화, 벽시계…….
“혹시 납치된 건 아닐까요?”
제이든은 불안한 마음에 일어나서 집을 다시 살펴보았다.
안방이나 주방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소박한 침대와 옷장, 주방도구, 탁상시계.
“시계가 좀 많은데요? 품질도 좋고.”
소박한 나무 가구들에 비해 방마다 비치된 시계는 상당히 좋은 제품들이었다.
“시계 괴도 때문에 괜히 시계 생각만 자꾸 하는 거 아니야? 남자들 중 다른 건 아무거나 써도 시계는 좋은 걸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아니, 괜한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제이든이 안방 서랍장 위에 있던 액자를 손에 든 채 피니어스를 불렀다.
“이 사람, 눈에 익지 않아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을 함께 그린 그림이었다.
사진기가 없고 기록용 영상구가 비싼 카이엔에선 초상화가 발달해서 현대의 기념 사진이나 가족 사진 같은 초상화도 성행했는데 이 그림도 그런 종류였다.
중앙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앉아 무릎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고 주변에 몇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이 노인, 아무래도 파비안 뒤포르 같지 않아요?”
그냥 봤으면 몰랐을 텐데, 마침 루스타운에서 파비안 뒤포르의 자료를 읽고 초상화도 보고 온 터라 노인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그러네.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우연이 있나.”
“이 그림 속에 혹시 산지기가 있나요?”
피니어스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산지기를 본 적이 한 번뿐이고, 이 그림은 오래전에 그린 것 같아서 잘 모르겠는데, 본인이 아니면 가족이라도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액자에 넣어 뒀겠지.”
“브리오 가서 치안대에 신고할 때 필요할지 모르니 가져갑시다.”
그림을 배낭에 넣으며 제이든이 물었다.
“시계 괴도 말인데요. 브리오에서도 시계 절도가 한 건 있지 않았어요?”
“맞아. 지난 8개월 동안 수도 카이에른에서 세 건, 에테노리움에서 한 건, 제노비아에서 한 건, 브리오에서 한 건, 모두 여섯 건이었지.”
“맨 처음의 에테노리움 빼고는 모두 중부 지역이네요.”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결국 한잠도 못 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고 날이 밝도록 산지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니엘에게 그림을 보여주자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중 한 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사람이 비슷하긴 해요. 하지만 산지기 아저씨는 나이가 많거든요? 쉰 살 정도 됐을 거예요. 그런데 이 그림 속 사람들은 다 젊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다니엘이 짚은 사람도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더 기다려 봐도 소용없을 것 같아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다니엘은 산지기가 많이 걱정되는지 계속 산을 뒤돌아봤다.
“이번 가을은 무슨 마가 끼었나, 가는 곳마다 계속 일이 생기네.”
제이든이 투덜거리자 아실리가 위로하듯 앞발로 그의 다리를 토닥이고 포이가 까만 눈을 커다랗게 뜨고 불안한 듯 제이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피이잇?”
“아냐, 아냐, 우리 포이를 만난 가을이니까 복 있는 가을이지, 그럼, 그럼!”
“포이이.”
그제야 안심한 듯 포이가 뒷발로 일어서더니 제이든의 어깨에 깡충 올라왔다. 그새 좀 컸는지 제법 묵직하다.
브리오에 도착해서 치안대에 신고를 하고 나오자 이미 오후가 되어 있었다.
“우린 어제 밤샘을 했더니 너무 피곤해서 여관에 가서 하루 쉬고 내일 미술관으로 갈 건데 다니엘은 어떻게 할래?”
“아, 저는 레이니움에 빨리 가봐야 해서 여기서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두 분 너무 감사했습니다.”
딱히 붙잡을 만한 명분도 없었던지라 다니엘을 보내고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뻗었다가 다음 날 늦은 아침에야 브리오 미술관으로 향했다.
“피니어스 씨, 제이든 씨, 어떻게 두 분 감정사님이 같이 오십니까?”
브리오 미술관의 학예사 버나드가 두 사람을 호들갑스럽게 반겼다.
“예,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동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미술관이 어수선하네요?”
“실은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학예사는 그들에게 몸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그, 시계 괴도의 절도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석 달 전 브리오에서도 라이너스 남작님 댁 시계를 도둑맞았거든요.”
“예, 들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미술관의 큰 후원자이신데, 아침에 관장님을 방문하셔서 하신 말씀인데요.”
학예사는 재미있는 비밀이라도 말하듯 그들에게 속삭였다.
“그 시계가 어젯밤에 돌아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