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7화
18. 시계 괴도(3)
제이든이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제도 같은 자료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고요?”
“예.”
피에르는 서가에서 책 두어 권과 두루마리 문서 몇 묶음을 뽑아 건네주면서 말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이런 자료를 찾아보는 게 신기해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시계 제작이나 감정을 공부하는 학생인가 했어요.”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나요?”
“음…….”
피에르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도서관 입구의 안내 데스크 쪽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자료 문의는 제가 받았지만 서가 안내는 제가 하지 않아서 생김새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안내했던 사서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피에르에게 받은 책과 문서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포이는 여전히 제이든의 어깨 위에 있었고 아실리가 자기도 책을 보고 싶다는 듯이 제이든의 옆으로 올라와 앉았다.
레오는 아무래도 덩치가 있는 개라 도서관 안을 돌아다니기는 어려워서 피에르의 사무실에서 간식을 얻어먹으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절 찾으셨나요?”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여자가 그들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제 시계에 대한 자료를 찾으러 왔던 분이라면 기억하고 있어요. 커다란 후드가 달린 갈색 로브를 입으셨고 먼 길 가는 사람처럼 튼튼한 여행복 바지에 승마 부츠를 신고 있었어요. 어깨에서 옆구리로 비스듬히 걸쳐서 가방을 메고 있었고, 나이가 어려 보였는데 얼굴은…….”
사서는 갑자기 아까 피에르와 비슷한 얼굴이 되면서 말을 더듬었다.
“으음,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을 봤는데, 아까 질문하시기 전까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머리 색이나 눈 색이 떠오르지 않네요. 그냥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는 것밖에는…….”
그녀는 눈을 좁히면서 기억하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지 결국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더 생각나는 게 없어요. 로브는 기억나는데 얼굴이나 그 안의 옷은 모르겠어요.”
“예, 말씀 감사합니다.”
“아, 한 가지 더!”
그녀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 소년, 도서관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승마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도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걸었거든요.”
사서는 자리로 돌아갔고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서로 마주 보았다.
“십 대 후반의 소년이라……. 감정사나 시계 제작 쪽 공부를 하고 있다면 이런 자료를 찾아보는 것도 어색하지 않지만.”
“하필 딱 어제 찾아보러 왔다는 게 좀 공교롭네요.”
“뭔가 좀 의심스럽긴 한데 일단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 기억만 해 놓자고.”
두 사람은 책으로 눈을 옮겼다. 뭔가를 특정하고 찾는 게 아니고 막연하게 참고될 만한 게 있을지 보는 거라 둘이 번갈아 가며 자료를 훑어보았다.
“아, 백 년 전에 황금닭과 병정 시계를 수리했다는 장인의 이름도 나와 있네요. 원래 동북부 지방에서 가장 유명했던 장인이라는데 말년은 중부에서 보냈군요. 앙투안 베르나르. 대대로 시계 제작에 종사한 장인 집안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을 떨친 명인이네요.”
“베르나르가 제작한 시계는 명품으로 유명하지. 당시에는 마정석을 사용하는 현대 기법이 도입되어서 옛 기법으로 시계를 제작하는 장인이 많지 않았는데 베르나르는 하나하나 손으로 제작하는 옛 기법을 고수했대. 그런데도 마정석을 쓴 시계보다 전혀 기능이 부족하지 않았다니까.”
“파비안 뒤포르도 베르나르와 고향이 같네요. 그 지방이 워낙 시계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죠?”
“뒤포르는 베르나르 다음 세대의 시계 장인이지. 베르나르와는 달리 마정석 사용에 능했고 예술품보다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시계를 만들었는데, 베르나르만큼 거장은 아니어도 전성기 때는 대륙 전체의 시계 장인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었을걸.”
“마정석 사용 세대의 장인이면서 옛날 시계를 수리할 수 있었던 거 보면 옛 기법에도 능통했다고 봐야겠지요?”
“나도 몰랐는데 황금닭과 병정 시계를 수리한 걸 보면 그렇다고 봐야지.”
“제자가 몇 명 있었다는데 이름이 기록된 건 세 명뿐이고, 대를 이을 거라고 기대되던 손녀는 가업을 버리고 다른 길로…….”
“포이이…….”
제이든의 어깨 위에 있던 포이가 지루한지 하품을 했다.
“우리 포이 지루해? 자, 요거 먹으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제이든이 당근 과자를 꺼내 주자 포이는 책상 위로 깡충 뛰어내려 과자를 오독오독 먹기 시작했다.
“고양이도 지루한지 장난을 치네?”
아실리가 앞발을 내밀고 문서 한 장을 살짝 잡아당기는 걸 보고 피니어스가 소리를 죽여 웃었다.
기다란 두루마리 문서 하나를 잡아당겨서 깔고 앉은 아실리는 신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는 종이 한 장만 있어도 맨땅에 앉지 않고 종이 위에 앉는다고 하더니 정말이네. 꼭 읽고 있는 것 같은 자세야.”
예, 읽고 있는 게 맞거든요.
아실리는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읽고 난 자료를 장난치듯 잡아당겨서 살금살금 살펴보더니 제이든을 쳐다보며 야옹거렸다.
-환영 마법 책 하나만 찾아와 봐. 가브리엘 아르카니오라는 사람이 쓴 ‘환영 마법의 안과 밖’이라는 책이야.
환영 마법이라면 아실리가 능숙하게 사용하는 마법인데, 제이든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책을 찾아왔다.
“제이든, 그 책은 왜 가져온 건가?”
“아,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제이든이 책을 펼치고 앉자 아실리가 옆에 다가왔고 그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제이든이 책의 중간 정도까지 페이지를 넘겼을 때 마침내 원하던 부분을 찾아냈는지 말랑말랑한 고양이 발이 책의 어느 한 부분을 살짝 짚었다.
-환영 마법을 사용하려면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독수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독수리를 그릴 수 없는 것처럼 독수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 독수리를 환영 마법으로 나타낼 수 없다.
흔히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나타나게 하거나 다른 형태로 보이게 하는 것을 환영 마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환영 마법에는 그 반대의 효과도 있다. 자주 사용되는 마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잊고 있지만……
제이든은 정확히 그 아랫부분을 짚고 있는 아실리의 앞발을 치우고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 있던 것을 지우는 효과도 있다. 환영 마법의 일종인 그림자 마법은 사람들이 본 것을 흐릿하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제이든이 그 부분을 읽고 나자 아실리가 다시 야옹거렸다.
-본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는 마법은 어려워. 환영 마법은 그렇게 어려운 마법이 아니야. 하지만 활용도가 다양해. 잘 쓰면 특정 부분의 기억을 흐리게 할 수 있어.
제이든은 잠깐 생각 후에 아실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리가 말하려고 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제이든, 뭘 그렇게 골똘히 보고 있어?”
“아, 수석 사서님이나 아까 그 여성 사서께서 둘 다 어제 왔던 사람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게 좀 이상해서요. 두 분 다 자신 있게 기억한다고 했었는데 정작 생각해 내려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이 안 난다고 했잖아요.”
제이든은 보고 있던 책을 피니어스에게 밀었다. 그가 짚어 준 부분을 읽고 난 피니어스가 다시 봤다는 얼굴로 제이든을 보았다.
“역시 2급 감정사, 마법에도 상당한 소양이 있네.”
사실 아실리가 가르쳐 준 거라 제이든은 낯이 좀 붉어졌다.
“환영 마법은 비교적 단순한 마법에 속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럼 제이든은 어제 왔다는 사람이 일부러 얼굴을 숨겼다고 생각하는군?”
“예, 아무래도 다린토스 영주관에 들렀던 사람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어요.”
“날짜도 맞고, 도둑이 쓰기 딱 좋은 마법이긴 하네.”
“정말 도둑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도서관에서 시계에 대한 자료를 보고 나온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브리오로 가는 일정을 잠시 의논했다.
“여기서 브리오가 마차로 하룻길이라던데,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게 좋을까요? 만약 지금 떠나면 밤에 묵을 적당한 장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시회 일정이 그리 넉넉하게 남질 않아서 바로 가고 싶긴 한데, 밤에 묵을 만한 곳이라면 마을은 아니지만 쉴 만한 곳이 있으니 노숙이 어렵진 않을 거야.”
베로데인과 다린토스에서 생각보다 일정을 지체하기도 했고, 브리오의 동방 유물도 빨리 보고 싶었기에 제이든도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루스타운을 떠나 작은 마을을 두어 개 지나고 나니 산길이 나왔다.
“이 산만 넘어가면 산지기의 오두막이 나와. 그 앞에 여행자들이 천막을 치고 밤을 지내곤 하지. 예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던 포이가 포르르 몸을 떨었다.
“춥니? 포이? 안에 들어가 있어.”
가을도 이미 끝자락에 접어들어서 저물녘이 되자 산바람이 찼다.
포이도 아실리도 꼬물꼬물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안쪽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레오가 좌석을 다 차지하고 누워 있고 아실리와 포이는 그 배에 파묻혀 레오의 꼬리를 이불처럼 덮고 색색 자고 있었다.
“이거 좀 봐요. 셋이 뭉쳐서 자는 게 너무 귀엽네.”
“우리 레오가 이불이네, 따뜻하겠다. 나도 좀 덮고 싶은데?”
한동안 산을 오르자 마침내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다 싶어 마차를 조금 빨리 모는데 갑자기 마차 안쪽에서 아실리가 마부석으로 튀어나왔다.
“아실리, 깼어?”
아실리는 대답 없이 귀를 뾰족하게 세운 채 길 앞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 아실리? 어? 레오?”
네 발을 다 뻗고 세상 편하게 퍼질러져 자고 있던 레오가 아실리의 뒤를 따라 마부석 쪽으로 나오더니 땅으로 뛰어내렸다.
제피로스의 앞쪽으로 달려나가는 레오의 목에서 으르르르 낯선 소리가 울려나왔다.
“왜 그러니? 앞쪽에 뭐가 있어?”
아실리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귀가 뾰족하게 곤두선 것이 집중해서 뭔가를 들으려는 것 같았다.
“레오!”
피니어스가 외쳤다. 레오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피니어스는 제피로스를 몰아 레오의 뒤를 쫓았고 순식간에 모퉁이를 돌아 나무들 뒤로 사라졌다.
“포이는?”
마차 안을 돌아보자 방금 잠에서 깼는지 혼자 앉아 눈을 비비고 있던 포이가 제이든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었다.
“포이, 위험하니까 거기 가방 안에 좀 들어가 있어. 무슨 일인지 우리도 가보자, 베로, 달려!”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졌다.
말이 우는 소리, 사람의 고함 소리, 개가 짖는 소리.
모퉁이를 서너 번 돌자 시야가 갑자기 확 넓어지면서 정신없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레오가 누군가에게 덤벼들어 팔을 물고 늘어졌다. 짙은 색 옷에 복면을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팔을 뒤흔들었다. 손에서 날붙이가 번쩍 빛났다.
피니어스가 제피로스를 탄 채 서너 명의 남자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디서 난 건지 기다란 봉을 휘두르면서 누군가를 보호하듯 막아섰는데 그의 뒤에 몸집이 작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자루가 긴 망치를 든 남자가 피니어스의 뒤쪽을 향해 돌아들어가는 것을 보고 제이든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를 향해 달려갔다.
누군가 떨어뜨린 지팡이인지 막대기인지를 집어들고 피니어스의 뒤를 막았다.
레오가 사납게 짖는 소리에 이어 고양이의 날카로운 포효 소리가 들렸다. 아실리가 참전해 복면인들의 얼굴과 머리로 날아다녔다.
“아실리, 조심해!”
혼전 중에 어디선가 삐이익 휘파람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자 복면을 한 남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제이든은 들고 있던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숨을 헐떡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꿈을 꾼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레오! 돌아와!”
피니어스가 외치자 무시무시하게 짖으며 숲속으로 복면인들을 쫓아갔던 레오가 쏜살같이 돌아왔다.
제이든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리트리버는……, 도둑 들면 반갑다고 핥아 죽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레오 왜 이렇게 잘 싸워요?”
피니어스가 역시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고양이는……, 양지바른 데서……, 낮잠만 자는 거 아니었어? 덩치만 작지 표범인데?”
피니어스 뒤에 쓰러져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킨 곱슬머리 소년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얼굴로 제이든과 피니어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