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6화
18. 시계 괴도(2)
“감정 마법이라고?”
루시우스가 의아한 듯 피니어스를 쳐다보았다.
“예, 감정사들이 감정 관련 마법을 익힌다는 건 알고 계시죠? 일반 마법사처럼 광범위한 마법을 공부하지는 않지만 물건에 둘러진 방어 마법이나 보호 마법 등을 검사하기 위한 감지 마법은 감정사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마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저는 아직 3급 감정사라서 다양한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 시계에 감지 마법이 사용된 흔적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기능적으로 보면 3급 정도의 감지 마법인데 흔적이 아직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사용된 시간도 24시간 이내고요. 감정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법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합니다만.”
피니어스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제이든을 보았다.
“제이든 씨가 더 많은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2급 감정사라 관련 마법에 통달하셨을 테니.”
“피니어스 씨의 말이 맞습니다. 이 시계에는 3급 감정사가 주로 쓰는 감지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제이든은 대답하면서 피니어스를 다시 보았다.
3급 이상의 감정사는 모두 감지 마법을 쓸 수 있지만 다른 감정사가 마법을 사용한 흔적과 시간까지 알아낼 수 있는 3급 감정사는 거의 없다.
명불허전이라고 피니어스는 일반적인 3급 감정사의 수준은 훨씬 뛰어넘은 것 같았다.
“피니어스 씨 말대로 다소 이질적인 감지 마법이고요. 보통 3급 감정사라면 감지 마법을 돌려 봤을 때 유물에 이 정도의 보호 마법이 걸려 있으면 손을 대지 않습니다. 3급이 해제하기엔 이 시계에 걸려 있는 보호 마법은 꽤 수준이 높거든요. 그런데 해제했다가 다시 건 흔적이 있는 게 이상하네요.”
피니어스가 헛기침을 했다. 제이든이 그를 바라보자 피니어스가 말했다.
“어, 음, 대부분의 3급 감정사는 손대지 않겠지만 모두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저도 해제가 가능할 것 같아요.”
역시 3급 감정사의 수준이 아니었어.
제이든은 생각을 굳히면서 말을 이었다.
“피니어스 씨 정도의 3급 감정사가 많을 것 같지는 않고요. 더 이상한 건 이 시계를 살펴보기만 하고 갔다는 거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가 가볍게 진동했다.
사람 키만 한 탑 윗부분에 설치된 시계 바늘이 여덟 시를 가리켰고 탑 꼭대기 부분의 황금닭이 홰를 치면서 꼬끼오 소리를 내고 울었다.
황금닭 밑의 타원형 문이 달칵 열리면서 손가락만 한 병정들이 줄지어 나왔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꼬마 병정들은 옛 다하르 근위병 제복을 입고 있었고 저마다 창, 검, 활 등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북을 멘 고수가 북을 치고 나팔수가 나팔을 불자 병정들은 각기 창과 검, 활을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양쪽에서 북과 나팔을 연주하고 기수가 깃발을 흔드는 동안 무기를 든 병정들은 일사불란하게 전투 장면을 보여 주었다. 움직임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격렬한지 마치 진짜 살아 있는 병정들이 싸우는 것 같았다.
5분 정도의 전투가 끝나자 병정들은 질서정연하게 문 안으로 사라지고 고수와 나팔수가 문을 닫고 양쪽에 차렷 자세로 섰다.
마지막으로 황금닭이 깃을 접고 자리를 잡자 모든 움직임이 끝나고 살아 있는 것 같던 시계는 다시 나지막한 초침 소리만 내는 기계로 돌아갔다.
“이게 그 유명한 황금닭과 병정들이군요. 과연 멋진데요.”
피니어스가 감탄했고 제이든도 박수를 칠 뻔했다.
“토끼가 정말 감동했나 본데요?”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던 포이가 작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황금닭과 병정들을 보고 있었다. 앞발을 내민 채 눈을 반짝이는 게 몹시 감탄한 모양이다.
하루에 여섯 번, 4시간에 한 번씩 공연을 보여 주는 이 황금닭과 병정 시계는 대륙전쟁 때 카이엔이 승리하면서 다하르로부터 얻은 전리품 중 하나였다.
당시 다린토스의 영주가 큰 전공을 세운 보상으로 하사받은 이후 계속 영주관의 보물로 전해져 내려왔다.
닭의 표면에 금을 입힌 것 외에 재료 자체는 그다지 값진 것이 없었지만 만든 솜씨가 워낙 정교하고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오백 년을 이어온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았다.
간밤의 침입자가 도둑이라면 굳이 덩치가 크고 운반이나 판매도 어려운 기둥시계보다는 작은 유물도 있고 보석류가 훨씬 가격도 나가고 절도에 적당한 물건이었을 텐데 굳이 시계를 노린 이유가 궁금했다.
영주관의 방비 상태를 보니 금고라고 대회의실보다 특히 방비가 강할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정밀 감정을 해본 결과 시계는 역시 진품이었다. 그렇다면 간밤에 든 도둑은 시계를 감상만 하고 갔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시계는 오백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훌륭하게 작동하네요.”
“그렇지. 하지만 워낙 오래된 물건이니까 두 번쯤 고장 난 적이 있다네.”
루시우스의 말을 들은 제이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이렇게 오래된 명품은 수리하는 사람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대륙전쟁 이전의 시계는 요즘 시계와 만드는 방법이 달라서 수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렇죠, 시계 제작 방법이 크게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이런 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장인은 거의 없을걸요.”
제이든과 피니어스의 말에 루시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 말이 맞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느라 고생했다네. 처음 고장이 났던 건 백 년쯤 전이고 그때 당시의 이름난 장인을 불러 수리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지. 두 번째 고장이 난 건 십오 년쯤 전일세. 그때는 내가 의뢰를 맡았는데 의뢰하는 장인마다 수리할 수 없다고 손을 내젓는 바람에 결국 수리를 못 했지. 그냥 골동품으로만 남고 황금닭과 병정들의 공연은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루시우스는 숨을 한 번 돌리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몇 달 뒤 파비안 뒤포르가 소문을 듣고 연락을 해 왔네. 자기가 고쳐 보겠다고. 그리고 일주일간 영주관에서 머물면서 훌륭하게 수리를 마쳤지. 겸사겸사 영주관의 다른 시계들까지 다 점검을 해주었다네.”
피니어스가 감탄했다.
“파비안 뒤포르라면 명성 높은 시계 장인이었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더라고요.”
“이 시계를 수리하러 왔을 때 이미 나이가 많았는데, 몇 년 전 은퇴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전혀 소식이 없네. 좀 괴팍한 은둔자 성향이었으니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떴을 수도 있고. 이제 또 고장이 나면 정말 수리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제자가 몇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음, 그런데 뒤포르의 경지에 이른 장인은 없는 모양이야.”
때마침 영주관에서 부른 보석 감정사도 도착해 금고의 보석도 점검했으나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거 참, 공연히 번거롭게 한 것 같군. 수고를 끼쳐 미안하네.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시게나. 앨리스 부인이 과민해서 자네들에게 수고를 끼친 것 같네.”
루시우스의 말에 제이든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앨리스 부인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 시계가 외부인의 손을 탄 건 맞아요. 저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그냥 보기만 하고 간 걸까 하는 거죠.”
“궁금하네요. 구경하자고 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침입하진 않았을 테고.”
어쨌든 제이든과 피니어스, 그리고 동물 친구들은 푸짐한 저녁 식사에 편안한 잠자리까지 제공받고 다음 날 아침에 길을 떠났고 다린토스 영주관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경비체제를 대폭 개편, 강화한다고 했다.
그때는 기묘한 해프닝으로만 생각했던 이 시계 건이 나중에 다른 사건과 이어질 줄은 제이든도 미처 몰랐다.
* * *
“전 루스타운 도서관에 좀 들러야 합니다. 피니어스 씨는요?”
“에이,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계속 피니어스 씨라네.”
제피로스를 탄 채 마차 옆을 따르던 피니어스는 은근슬쩍 말을 놓으며 이틀새 가까워진 티를 내는 중이었다.
“예, 예, 알았어요. 조금 더 친해지면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피니어스 씨 일정은요?”
“브리오 가려면 어차피 루스타운 통과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니까 같이 가지. 도서관에 들른다니 겸사겸사 시계에 대한 자료도 좀 보고 싶고. 그나저나 레오 녀석 팔자가 늘어졌네.”
레오는 마차 안에 들어가서 퍼질러져 자고 있었다. 말 등에 얹혀 가는 것보다 아주 편안한지 코까지 도롱도롱 골고 있다.
아실리는 마부석에 앉은 제이든의 옆에 엎드려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었고 포이는 제이든의 어깨에 동그마니 앉아서 주변 구경 중이었다.
“피니어스 씨, 동방 대륙에 가 보셨어요?”
제이든은 피니어스를 만난 김에 늘 궁금했던 동방 대륙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물었다.
“어렸을 적에 한 번 가 봤지. 그때 반년 정도 머물렀지만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어. 아버지가 동방 출신이라 우리 집엔 동방 손님들도 많이 왔고 그쪽 문화에도 익숙한 편이었지만 실제로 가 보니까 정말 다르더군. 좀 더 컸을 적에 갔다면 배우는 게 많았을 텐데.”
“몇 살 때였어요?”
“열한 살.”
이세계에 떨어져 삼 년간 숨겨진 계곡에 들어박혀 죽어라 감정 공부만 하다가 카이엔 사회에 나온 지 이제 겨우 두 해가 좀 넘은 제이든에 비해 피니어스는 여러모로 경험이 풍부했고 관심사도 다양한 듯했다.
-다방면으로 박식한 사람이야. 말이 통하면 꽤 재밌을 텐데.
아실리가 흥미롭게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야옹거렸다. 아실리 자신이 박학다식한 고양이다 보니 피니어스와 꽤 죽이 맞을 것 같은데 말이 안 통해서 아쉬운 듯했다.
루스타운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한참 지났을 무렵이었다. 제이든 일행은 적당한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기는 작은 도시지만 도서관은 꽤 유명해. 예전에 루스타운 시장을 오래 지냈던 분이 자료 마니아라서 책과 자료 등을 무척 공들여 수집했거든. 꽤 먼 곳에서 자료 찾으러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도 많을걸?”
피니어스의 말대로 루스타운은 학구적인 분위기가 많이 나는 도시였다. 제이든이 본 다른 도시들에 비해 서점이 유난히 많은 것이 두드러졌다. 학교도 수준이 높다고 한다.
중심부에 있는 시립 도서관은 고전적 분위기가 잘 살아 있으면서도 구식으로 보이지 않는 매력적인 석조 건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제이든 로스 감정사님이죠? 형님께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들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석 사서인 피에르는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여관 주인 필립의 동생이라기엔 많이 젊었지만 이목구비가 닮아 있었다.
“형님이 보내신 겁니다.”
피에르의 사무실에서 차를 대접받으며 제이든이 필립에게서 전해 받은 주화 보퉁이를 건네주자 피에르는 웃으면서 받아들었다.
“형님에겐 제가 여전히 어린아이인가 봅니다. 주화 수집은 사실 제가 소년 시절에 좋아했던 취미인데 형님은 지금도 제가 주화를 좋아하는 줄 알고 이렇게 모았다가 보내 주시거든요.”
“그럼 지금은 모으지 않으시나요?”
점잖은 도서관 사서는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찡긋거렸다.
“사실 어릴 때 한동안 열중했던 취미라 지금은 크게 관심은 없지만 우리 형님이 좋아하시니까요. 형님이 이런 걸 모아 보내시면서 흐뭇해하시니 저는 계속 주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으려고요.”
효성스러운 아들 같은 그 표정에 제이든과 피니어스도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 도서관에 온 김에 자료를 좀 찾아보고 싶은데, 혹시 파비안 뒤포르에 대한 자료가 있을까요? 어제 황금닭과 병정 시계를 보고 왔더니 관심이 좀 생겨서요.”
“시계 장인 말씀이시군요. 파비안 뒤포르만 따로 나와 있는 자료는 없지만 시계 장인들에 대한 책과 시계 제작의 변화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 말씀하신 다린토스의 황금닭과 병정 시계에 대해서도 나와 있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피에르는 서가를 안내하면서 말했다.
“그다지 찾는 사람이 많은 자료는 아닌데, 이틀 연속 같은 자료를 찾는 손님이 오신 게 특이하네요. 바로 어제도 같은 자료를 찾는 분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