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5화
18. 시계 괴도(1)
“시계 괴도라면 몇 달 전 수도에 나타나 진귀한 골동품 시계를 훔쳐 갔다던 그 도둑 말인가요?”
“그렇지, 제이든 씨도 아시는군요?”
“여관에서 소문을 들었습니다.”
“보석도 아니고 명화도 아니고 시계라니, 독특하고 고전적인 취향의 도둑이지 않습니까?”
피니어스는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져서 붙임성 있게 브루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3급 감정사 피니어스 렌입니다. 우연히 동석하게 되었는데 혹시 같이 가 봐도 될까요?”
“아, 카이엔의 세 거울!”
3급 감정사라도 다 같은 3급 감정사가 아니고, 명성으로 말하자면 피니어스 렌은 제이든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브루스는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렌 감정사님이라면 영주님도 반기실 겁니다. 일단 같이 가시죠.”
식당을 나서니 마부가 말을 데리고 왔다.
“이야, 좋은 말인데요. 전마 같습니다.”
브루스가 피니어스의 말을 보며 감탄했다.
“제피로스의 부모는 둘 다 군용 전투마였거든요. 감정사가 타고 다니기엔 아까운 말이죠.”
피니어스가 장난스럽게 말의 귀를 잡아당기자 제피로스는 커다란 혓바닥으로 피니어스의 머리를 쭉 핥았다.
“야! 아침에 감았는데!”
피니어스는 손으로 제피로스의 탐스러운 갈기를 헝클어 놓고는 그 등 위에 훌쩍 올라탔다. 제피로스는 머리와 목을 푸르르 흔들어 헝클어진 갈기를 털면서 등 뒤를 한 번 흘겨보았다.
제이든도 베로의 등에 탔고 아실리가 날렵하게 그의 앞자리에 뛰어올랐다. 포이는 여전히 제이든의 배 주머니 안에서 푹 잠들어 있었다.
“자, 그럼 갈까요?”
치안대의 말에 오른 브루스가 앞장을 서자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그 뒤를 따랐다.
“왕?”
레오가 앞발을 들고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뜨자 피니어스가 외쳤다.
“넌 이번엔 그냥 따라와. 가끔씩 달리기도 해야지.”
“우웅, 왕!”
불만스럽게 짖은 레오가 제피로스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시가지 내라서 세 마리의 말은 중간 속도로 구보했고 레오도 가볍게 달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황금빛 귀와 털을 뒤쪽으로 팔락이며 달리는 모양이 제법 그럴싸했다.
-못 달리는 개는 아니었네.
아실리가 뒤를 돌아보며 미야옹 웃었다.
“너도 좀 뛸래?”
-점잖지 못하게, 집고양이는 3보 이상 뛰지 않는다옹.
“냥이들 우다다 달리기도 많이 하고 그러던데?”
-어린 것들이나 하는 거양.
아실리는 말끝에 애교를 섞으면서 머리를 제이든의 배에 비볐다. 아실리의 머리에 눌린 포이가 잠결에 삐이 소리를 내며 꼼지락거렸다.
치안대는 식당에서 별로 멀지 않아 곧 도착할 수 있었다.
“제이든, 오랜만이네, 반갑군!”
치안대 응접실에 앉아 있다가 제이든을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다린토스 영지의 집행관인 루시우스였다.
“잭 페리헌트의 일은 들었네. 마음 아픈 일이지만 내가 자네를 페리헌트에게 소개한 덕분에 뒤늦게나마 사건이 해결된 거 같아 다행이네.”
“예. 집행관님도 잘 지내셨지요? 이쪽은 감정사 피니어스 렌입니다. 우연히 만나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습니다.”
“피니어스 렌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동행했습니다.”
피니어스를 본 집행관 루시우스는 반색을 했다.
“제이든 로스에 피니어스 렌이라면 두 배로 든든하지. 영주님이 기뻐하시겠군.”
그는 다시 소파에 앉더니 제이든과 피니어스에게도 자리를 권하고 나서 브루스를 쳐다보았다.
“잠시 감정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브루스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지만 아실리와 레오는 각자 주인 옆에 앉았다.
아실리는 늘 그렇듯 제이든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엎드려서 그루밍을 시작했지만 레오는 떡하니 정자세로 앉아 루시우스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흠, 제이든 군의 고양이는 지난번에도 봤지만 렌 감정사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군. 요즘 감정사들의 유행인가.”
“마음에 평화를 주고 집중력을 강화시켜 주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전대의 마스터 다미에르도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셨다지 않습니까.”
루시우스의 말에 피니어스가 넉살 좋게 대꾸했다.
“흠, 뭐 일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상관없지. 그건 그렇고 자네들에게 부탁할 건 영주관의 시계 감정이라네.”
“혹시 다하르의 황금닭과 병정 시계인가요?”
제이든이 묻자 루시우스는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렇긴 한데 좀 애매하다네.”
“?”
“실은 어젯밤에 영주관에 도둑이 들었다네. 아니, 아무것도 잃어버린 게 없으니 도둑이 아닐 수도 있지만 침입자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다린토스 영지의 치안은 매우 좋은 편이고, 이번에 베로데인에서 일어난 페리헌트 살인 사건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라 영지민들에게 공개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의논이 분분할 정도로 강력사건이 적은 영지다.
베로데인의 흰 표범이 수호하는 영지라는 전설 때문에도 예전에는 사람들이 베로데인 근처에서 함부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서 흰 표범의 전설도 퇴색하고 심지어 그 전설을 악용한 범죄까지 일어났지만 말야. 인륜을 거스른 그 로키라는 놈은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될 걸세.”
목소리를 높였던 집행관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소리를 낮췄다.
전날 밤 영주관의 경비를 뚫고 누군가 영주관에 들어왔다 나간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내가 예전부터 영주관의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 영주님이 워낙 사람이 느긋하셔서, 설치한 지 십 년도 넘은 방어 마법이랑 경비병 한 소대 정도로 충분하다고 신경을 안 쓰시더니만.”
그는 몇 번 혀를 차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경비병들도 성실하고 방어 마법도 오래되긴 했어도 잘 작동하고 있긴 했지만, 뭐랄까 우리 영지는 워낙 평화롭다 보니 아무래도 좀 느슨한 구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경비병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떻게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알았죠?”
“사실은 말이지……, 이게 좀 창피한 일이라 치안대에는 그냥 경비병이 알아차렸다고 말했지만.”
루시우스는 낯을 조금 붉혔다.
“사실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우리 시녀장이라네. 아주 꼼꼼한 노부인이거든. 전대 영주 때부터 근무한 사람이라 발언권도 강하고 영주님 부부의 신뢰가 높지. 그 시녀장이 아침에 일어나면 영주관을 한 바퀴 쭉 돌아보거든, 밤에 자기 전에도 그렇게 하고.”
“예.”
“오늘 아침에 앨리스 부인이-시녀장 이름이 앨리스 부인이라네-영주님께 고하길 2층 객실 덧창 안쪽에 나뭇잎이 하나 떨어져 있는데 간밤에 자기 전까지는 없었다는 거야. 그리고 대회의실 기둥시계 아래쪽에 깔린 양탄자에 구김이 간 게 누가 밟은 것 같다고.”
루시우스는 말을 하면서도 좀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솔직히 나는 앨리스 부인이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지. 나뭇잎이야 어디선가 날아든 게 굴러다니던 걸 수도 있고, 양탄자도 일하는 사람 누가 밟았을 수도 있고.”
“영주관이 꽤 넓을 텐데 그렇게 작은 변화를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요?”
“앨리스 부인 눈썰미가 대단한 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이번엔 믿기 어려웠다네. 하지만 영주님이 앨리스 부인의 말을 믿으시더군. 경비병들을 불러서 확인해 봤는데 경비병들도 다 드나든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 어이없어했거든. 시녀장에게 신경과민 아니냐고들 했는데 영주님이 마법사를 불러서 점검해 봤더니 방어 마법이 해제되었던 흔적이 있다지 뭔가.”
집행관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앨리스 부인 말을 안 믿었던 우린 다 낯이 안 서게 됐지. 침입자는 없었다고 장담했던 경비병들도 그렇고. 아무튼 간밤에 일정 시간 동안 방어 마법이 외부의 힘에 의해 해제되었던 게 확인되어서 대대적으로 점검을 했는데 이상하게 없어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걸세.”
“없어진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바꿔치기를 의심하게 된 거군요?”
“그렇지.”
루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금고 쪽이 더 의심스러운데, 앨리스 부인의 말에 따르면 대회의실에 사람이 들어왔던 흔적이 있다 하고 대회의실에는 다하르의 황금닭과 병정 시계가 있지. 그래서 영주님이 시계 괴도를 의심하신다네. 자네가 페리헌트 건으로 여기 와 있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바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셨네. 시계가 전혀 달라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확인해 두는 게 좋겠다면서.”
“시계 괴도는 바꿔치는 게 아니라 절도를 한다고 들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건 그런데, 혹시 모르니까.”
“아무튼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갔는데 없어진 건 없다, 그 방에서 귀중한 건 시계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 있던 것인지 바꿔치기된 위작인지를 감정해 달라는 의뢰인 거죠?”
“그렇지.”
루시우스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포이이…….”
딱 때를 맞춰서 포이가 하품을 하면서 제이든의 배 주머니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루시우스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얼굴로 포이와 제이든을 번갈아 보았고 피니어스가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마음의 평화, 예, 그렇죠, 로스 감정사의 집중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토끼일 겁니다.”
“왕!”
제이든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 피니어스와 레오를 흘겨본 후 일어섰다.
“얼른 가 보죠. 다하르의 황금닭 시계는 저도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루시우스가 나중에 한 말에 따르면 ‘배에 토끼를 넣고 옆구리엔 고양이를 끼고 일하는 감정사’는 ‘개를 말에 태우고 다니는 감정사’와 함께 말을 달려 한 시간쯤 걸리는 영주관으로 향했다.
다린토스의 영주는 사십 대 중반쯤의 풍채가 좋은 신사였다.
제이든은 지난 봄 유물 발굴 때 잠깐 인사를 했을 뿐이지만 소탈하고 아랫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 주는 영주였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제이든과 피니어스의 인사를 받은 뒤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우리 시녀장을 알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왔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부분이 다르다. 기억력 부분에서도 어떤 이는 글을 잘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숫자를 잘 기억한다.
아룬빌의 플로렌스 부인처럼 본 물건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읽은 글이나 들은 이야기는 기억하지 못해도 들은 음악은 그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먹은 음식의 맛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냄새를 잘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다린토스 영주관의 시녀장은 ‘장면’을 기억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했다.
“앨리스 부인은 어떤 장면을 봤을 때 마치 그림처럼 그대로 기억한다네, 그 그림의 어딘가가 조금만 바뀌어도 위화감을 느낀다고 해.”
현대의 지구에서 포토그래픽 메모리라고 하는 기억 능력의 일종이다.
포토그래픽 메모리에도 몇 종류가 있지만 시녀장은 눈으로 본 장면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능력의 소유자인 듯했다.
“일단 건물의 방어 마법이 한 번 해제되었다는 것은 확인했고, 아내의 보석이나 가문의 보물을 넣어 둔 금고 쪽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앨리스 부인은 사람의 손을 탄 건 대회의실이라고 단언했네.”
영주의 부름을 받고 온 시녀장은 육십 대의 꼿꼿한 노부인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게 틀어올린 백발에 목깃이 높은 고전적 분위기의 옷차림, 정말 귀족 집안의 시녀장다운 모습이었다.
“앨리스 로데인입니다.”
앨리스 부인은 침착하게 제이든 일행을 대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의 정면 벽에는 유명한 다하르의 황금닭과 병정 시계가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건 이것 때문이에요.”
앨리스 부인은 기둥시계 아래쪽에 깔린 양탄자를 가리켰다. 짜임새가 매우 고급스러운 사각 양탄자였다.
“밤에 자기 전에 제가 회의실을 둘러볼 때 한쪽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어서 네 귀퉁이 모두 반듯하게 펴놓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둘러볼 때 보니 다른 쪽 모서리에 주름이 잡혀 있더군요.”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제가 이제 눈도 침침하고 나이도 들었으니 잘못 봤을 거라고도 하고, 누가 지나가다 밟았을 거라고도 하는데 그렇진 않아요. 아침에 저보다 먼저 이 회의실에 들어온 집안 사람은 없었어요. 물론 보석이나 금고 쪽이 손을 탔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그쪽 방은 외부인의 흔적은 없었어요.”
“도둑이 흔적을 안 남겼을 수도 있잖소? 역시 시계보다는 금고 쪽 물건들을 먼저 감정해야 하는 게 아닐지?”
경비대장이라는 기사가 끼어들었을 때 제이든이 입을 열었다.
“금고는 아직 안 봐서 모르겠지만, 이 시계는 분명히 누가 손을 댔네요.”
피니어스가 동감이라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누군가 먼저 다녀간 감정사가 있습니까?”
“아니네. 오늘 아침에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하고 오후에 제이든 군을 부르러 갔지. 다른 감정사에겐 연락하지 않았네.”
집행관의 말을 들은 피니어스가 미간을 좁히면서 머리를 기울였다.
“하지만 누군가 이 시계에 감정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