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4화
17. 우연한 만남(2)
남자의 머리는 흑발이라기엔 푸른 빛이 많이 도는 남색에 가까운 무척 독특한 색이었는데 얼굴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이목구비는 확실히 카이엔 사람이지만 동방 느낌이 섞여 있어서 이국적인 신비로움이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정도일까, 제이든보다는 몇 살 위로 보였다.
제이든은 직업적 습관으로 남자와 말을 머리끝부터 발굽 끝까지 재빨리 훑으며 관찰했다.
남자의 말은 베로보다 덩치가 컸고 남자 역시 제이든보다 좀 커 보였다. 제이든의 키가 180cm인 걸 생각하면 남자는 상당한 장신인데 다부진 근육질 체형이라 더 커 보였다.
몸이나 말을 보면 기사라고 해도 나무랄 데가 없지만 옷차림이나 말의 장비 등을 보면 기사 같지는 않았다.
말안장 뒤에 걸쳐져 있는 후드 달린 로브와 가죽 가방, 입고 있는 튜닉의 소매 아래쪽과 팔꿈치가 반질반질한 모습 등을 보면 오히려 책상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일 수 있었다.
앞에 앉은 개는 골든 리트리버인데 황금색 털이 아름다웠고 손질을 잘 받은 티가 났다. 하긴 개를 걸려서 데리고 오지 않고 말에 태운 걸 보면 무척 아끼는 개일 테지.
말의 다리까지 재빨리 훑어본 제이든이 시선을 올리자 쌍둥이처럼 똑같은 자세로 제이든을 훑어보고 머리를 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 새로 오신 분, 이쪽으로 서시죠. 어차피 앞 분이랑 같은 화덕을 쓰실 테니.”
남자의 뒤에 줄을 섰던 사람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제이든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분명히 둘이 같이 서 있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제이든은 말없이 줄 맨 뒤에 섰지만 앞사람이 스스로 제이든의 뒤로 이동했다. 하긴 말 두 마리 사이에 서 있기도 좀 그럴 테지.
같은 화덕을 쓴다는 말은 제이든과 앞의 남자가 같은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세 개의 화덕’은 원래 화덕 세 개를 놓고 시작한 식당이라 붙은 이름이지만 요즘은 이 식당의 세 개의 홀을 의미하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이 식당에는 홀이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일반 손님들을 받는 평범한 홀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싶지 않은 특별 예약 손님들만을 받는 홀, 그리고 세 번째는 동물을 동반한 손님들이 사용하는 홀이다.
카이엔은 수인들도 사는 곳이고 동물에게 관대한 편이라 웬만한 곳은 다 동물 출입이 허용되었지만 식당의 경우 아무래도 개나 고양이를 동반한 손님은 구석 자리를 준다거나 개나 고양이는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 개의 화덕’은 아예 동물을 동반한 손님들을 위한 홀을 따로 마련했고 개나 고양이를 위한 메뉴까지 준비했기에 동물을 데리고 있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 있는 준비 시간이라 아직 식당 문이 닫혀 있어서 대기 줄에 앞뒤로 나란히 서 있자니 주변 사람들이 자꾸 웃음을 참으면서 그들을 곁눈질하는 것이 좀 부끄러웠다.
‘아니 나야 고양이랑 토끼처럼 작은 동물이니까 말에 태울 수도 있지만 저 개는 저렇게 큰데 말에 타고 있으니까 다들 쳐다보잖아.’
리트리버는 제이든의 눈길을 느꼈는지 선량하게 생긴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더니 아실리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이 왕! 하고 짖었다.
아실리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고 포이는 깜짝 놀랐는지 제이든의 배 속으로, 그러니까 주머니 속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까맣고 뾰족한 귀 끝만 주머니 밖에 남아 있었다.
리트리버가 머쓱한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떨어뜨리자 주변 사람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붉어진 리트리버의 주인은 괜히 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야 개 한 마리지만 저기는 고양이에 토끼까지 말에 타고 있으니까 다들 쳐다보잖아.”
뭐래? 개가 말 타고 있는 게 훨씬 더 웃기거든요?
“자, 손님들 이쪽으로 들어오시겠습니다. 말을 데리고 계신 분들은 마부에게 맡겨 주세요.”
마침 식당 문이 열리고 직원이 나와서 안내를 시작했다.
입구 앞에서 말을 마부에게 맡기고 들어가니 깨끗하게 단장된 정원에 세 군데의 홀로 들어가는 길이 나누어져 있었다.
제이든 일행은 세 번째 홀로 안내받았다. 둥근 식탁이 있고 식탁 아래쪽으로 함께 온 동물이 쓸 수 있는 낮은 식탁이 딸려 있었다.
자그마한 식탁 앞에 제이든이 앉자 아실리가 알아서 아래쪽 식탁 앞에 앉았고 포이도 그 옆에 동그마니 앉았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손님이 몇 사람 없었다. 한 자리 건넌 식탁에 개를 말에 태워 왔던 남색 머리의 남자가 앉았다.
“왕!”
“레오! 그 자리가 아니야!”
금빛 털을 휘날리는 리트리버가 제이든의 자리로 뛰어와서 의자에 앞발을 올리며 친근한 미소를 짓더니 아실리를 향해 코를 살짝 들이댔다. 포이가 깜짝 놀라서 제이든의 무릎 위로 깡충 뛰어올랐다.
이미 자리에 앉았던 남색 머리의 남자가 황급히 뒤쫓아와서 개의 목걸이를 잡아당기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얘가 원래 이러지 않는데.”
“쿠우웅!”
레오라는 이름의 개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주인을 흘겨보더니 아예 아실리 옆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왕!”
개는 기쁜 듯이 앞발을 제이든의 맞은편 의자에 올려놓으며 주인을 향해 짖었다. 마치 너도 여기 앉으라는 것 같았다.
장신에 근육질의 미남자는 어정쩡하니 선 채 레오의 눈치를 살피더니 멋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어, 음, 어, 혹시 합석해도 괜찮으실까요?”
제이든은 아실리를 바라보았고 아실리가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삐야!”
무릎 위의 포이는 조금 뾰로통해진 것 같았지만 강력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예,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왠지 레오가 그쪽 일행에 무척 친근감을 보이네요.”
남자는 안심했다는 듯이 먼저 앉았던 자리에 걸쳐 두었던 가방과 겉옷을 들고 이쪽 자리로 넘어왔다.
-저 사람 왠지 제이든이랑 좀 비슷해.
아실리가 나지막하게 야옹거리며 앞발을 핥았다.
제이든도 사실 그런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동류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짐을 옮겨오고 자리를 잡은 남자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고 제이든이 그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제이든 로스입니다.”
“아하!”
상대의 남빛 눈이 이채를 띠며 빛을 발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피니어스 렌입니다.”
“아하!”
이번엔 제이든이 탄성을 토했다.
카이엔의 세 거울이라 불리는 젊은 감정사 삼인방, 그중에서도 선두로 꼽히는 피니어스 렌을 여기서 만나다니.
세 거울 중 엘리노어 유스틴의 초상화는 본 적이 있는데 피니어스 렌은 얼굴을 알지 못했었다. 로시에르 하논과는 지난번 글로비스의 소네트 경매 때 만난 적이 있지만 피차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지는 않았다.
피니어스 렌이라면 로시에르 하논과 함께 아카데미의 쌍룡이라고 불렸던 기린아고 양쪽 부모 모두 저명한 학자라고 들어서 막연히 안경을 쓴 학구파 감정사를 예상했었는데 제이든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
“지난 2년간 로스 감정사님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뵐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드디어 만났네요.”
약간 들뜬 표정으로 인사를 한 피니어스 렌이 친구에게 하듯 레오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레오가 말썽을 부린 게 득이 될 때도 있네요!”
“왕!”
레오는 가슴을 부풀리면서 자랑스럽게 짖었다.
“저도 렌 감정사님 만나뵙고 싶었는데 반갑습니다.”
빈말이 아니고 제이든도 피니어스 렌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가 동방 대륙에서 온 학자였기 때문인지 피니어스는 동방 유물 쪽으로는 젊은 감정사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고 했다. 동방 문화에 한해서는 2급 감정사의 실력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제이든도 피니어스를 유념해 두고 있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렌 감정사님은 어떻게 베로데인까지 오셨어요?”
“피니어스라고 불러도 됩니다.”
남색 머리칼의 감정사는 소탈하게 웃었다.
“아, 예. 그러면 저도 제이든이라고 불러 주세요.”
때맞춰 직원이 왔기에 그들은 음식을 주문했다.
사람 음식이 훌륭한 것은 물론이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위한 메뉴까지 있었다.
“손님, 토끼를 위한 채소 스틱과 당근 과자도 있으니 한번 맛보여 주시지요?”
“포이잉!”
메뉴를 설명하는 직원의 말만 듣고도 눈을 반짝거리는 포이를 위해 채소 스틱과 과자까지 주문하고 메뉴를 직원에게 돌려 주는데 레오가 왕 소리를 내며 짖었다.
“어휴, 먹보.”
피니어스가 한숨을 쉬더니 강아지용 과자를 추가로 주문했다. 레오는 그제서야 흡족한 듯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미야옹!”
아실리가 한쪽 발을 들어 꼬리를 붕붕 돌리는 레오를 조금 밀었다.
“레오, 점잖게 있어야지. 고양이가 불편해하잖아. 이 녀석이 좀 버릇이 없어서 말이죠. 아주 작은 강아지 때 여자친구가 선물한 애라 애지중지하다 보니 좀 버릇없이 컸어요.”
“쿠왕!”
레오가 항의하듯 짖었고 제이든은 새삼 그를 다시 보았다.
음, 여자친구가 있으시군. 하긴 나이도 그렇고 외모나 명성이 저만한데 여자친구가 없는 게 더 이상하겠다.
제이든은 왠지 좀 부러워져서 주머니에 넣어 둔 아마릴리스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베로데인의 흰 표범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정작 와 보니까 헛소문이라 해서 실망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라면서요.”
“예, 그렇다고 하더군요.”
치안대에서 일반 대중에게 내용을 얼마나 자세히 밝혔는지 몰라서 제이든은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동안 경험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포이가 레오와 피니어스를 관찰하다가 좀 안심이 되었는지 제이든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 내려가 아실리의 옆에 앉았다.
“아주 귀여운 토끼네요.”
피니어스가 포이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저는 사실 고양이나 토끼처럼 작은 동물을 좋아하는데 우리 레오는 몸집이 좀 커서 말이죠.”
“우왕?”
먼저 나온 강아지용 간식을 먹고 있던 레오가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
“어떨 때는 이놈이 저보다 더 상전 같다니까요. 귀여운 맛이 없어요.”
“우우웅.”
레오는 시무룩하게 웅얼거리면서 큼직한 꼬리로 피니어스의 다리를 한 대 때렸다.
“어이구 아파라. 힘도 좋지.”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피니어스와 레오는 어쩌니저쩌니 해도 사이가 좋다.
음식이 나왔고 과연 명성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한 맛이었다. 동물용 음식도 다 맛이 좋은지 아실리도 포이도 레오도 각자 자기 몫을 열심히 먹는다.
“피니어스 씨는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표범을 못 봐서 아쉽지만 또 일하러 가야죠. 브리오로 갑니다.”
“아, 정말이요? 저도 브리오로 가는데!”
“혹시 브리오 미술관에 가시는 겁니까?”
“예, 맞아요.”
브리오 미술관에서 이번에 동방 유물을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하는데, 들여온 유물 중 진위와 내력을 파악하기 어려운 유물이 몇 점 있어 미술관장이 피니어스에게 감정을 의뢰한 모양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서화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보러 가는 중인데요. 아마 이번에 기획된 전시 유물 중 하나인 것 같네요.”
“제이든 씨도 동방 유물에 관심이 많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더 반갑군요.”
주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동안 아래쪽에서는 포이가 먼저 식사를 마쳤다.
토끼는 불룩해진 배를 끌어안고 제이든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배가 불러 깡충 뛰지를 못하는지 옷을 잡고 기어 올라온 포이는 배에 있는 주머니로 꾸물꾸물 들어가더니 하품을 하면서 제이든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졸린 모양이네, 한숨 자, 포이.”
제이든이 배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잠시 후 두 명의 사람과 개와 고양이도 식사를 모두 끝냈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습니다. 말씀해 주신 검과 방패 감정 이야기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저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숙소로 돌아갈까요? 저는 내일 아침 먹고 출발할 예정인데.”
“저도요. 그런데 저는 루스타운에 들를 겁니다.”
일단 루스타운까지 동행하기로 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홀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어휴, 제이든 씨, 벌써 떠나셨나 했어요.”
치안대원 브루스였다.
“숙소에 가 보니까 안 계셔서 어디로 가셨나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듣고 찾아왔어요. 말에 개랑 고양이랑 토끼를 태운 사람이 세 개의 화덕에 갔다고. 그새 개를 한 마리 더 구조하셨나 했네요.”
아니 여기서 치안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그새 말이 와전됐네. 말에 개랑 고양이랑 토끼를 태웠다니, 내가 무슨 브레멘의 음악대야? 개는 다른 사람 개라고요.
“안 그래도 식사 후에 치안대에 인사하러 들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급히 찾으러 왔어요?”
“집행관님이 지금 제이든 씨 찾으러 오셨거든요. 떠나시기 전에 영주관의 시계를 감정해 달라고.”
“갑자기 웬 시계를…….”
제이든이 의아해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았던 피니어스가 뭔가 생각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린토스 영주관의 시계라면 유명한 시계가 하나 있었지. 다하르의 황금닭과 병정 시계.”
“설마 그 시계를 저보고 감정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오백 년간 전해져 내려온 골동품이고 이미 1급 감정사가 감정을 마친 명품일 텐데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시계를 감정해야 하니 제이든 씨가 떠나기 전에 붙잡아 오라…… 아, 아니, 모셔오라는 말만 들었거든요.”
피니어스가 제이든을 툭 치면서 귓전에 속삭였다.
“어쩌면 시계 괴도가 왔다 간 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