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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53화 (53/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3화

17. 우연한 만남(1)

에카테리나 아마릴리스…….

제이든은 손에 쥔 은화를 뒤집어 보았다. 은화에 새겨진 미녀의 옆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그 유명한 황태자비, 미녀 아마릴리스.

간밤 자신이 비몽사몽 중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카티야는 옛날에 한 남자를 사랑했었다고 했지. 인간 남자를.

자신의 본신을 본 남자가 그녀를 무서워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를 떠났다고.

“미야옹.”

“포잉.”

아실리와 포이가 부르는 바람에 제이든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우리도 나가자. 베로부터 보러 가야지.”

간밤에 시간이 너무 늦어서 베로와 마차는 치안대에 그냥 두고 왔다.

“손님도 퇴실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오늘 하루 더 묵을 거예요.”

여관을 나가려고 포이를 어깨에 올려놓으려는데 포이가 제이든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포이?”

“삐이…….”

포이는 왠지 안절부절못하면서 제이든의 손 위에서 작은 발을 동동거렸다.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다 위층을 올려다보고 또 두리번거리고 한다.

“왜 그러니? 뭘 찾아?”

“삐이이.”

“포이, 카티야 양을 찾는 거야?”

“포잇, 포잇!”

포이가 열심히 머리를 끄덕이자 커다란 깜장 귀가 작은 깃발처럼 팔락거렸다.

제이든은 포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짧은 시간인데도 제이든이 정신없이 바쁜 동안 카티야가 계속 뒤에서 포이를 돌봐 주면서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포이는 엄마 토끼가 사람의 손에 죽는 걸 본 탓인지 낯을 많이 가려서 제이든과 라파엘, 니콜레타 외의 사람에게는 곁을 주지 않았는데 묘하게 카티야는 처음부터 잘 따랐다.

카티야의 본신이 표범이라는 걸 생각하면 토끼인 포이가 무서워하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동물들은 오히려 카티야를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았다.

아실리야 보통 고양이가 아니니 논외로 하더라도 포이나 베로, 제시가 모두 그랬다.

아마 동물들에게는 카티야가 동물을 보호하고 지켜 준다는 게 느껴지는 거겠지.

“미안, 포이. 카티야 양은 떠났어. 나도 아쉽네. 인사라도 하고 가지.”

새까만 눈을 들고 제이든을 올려다보던 포이는 잠시 말똥말똥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알아들었는지 귀를 축 늘어뜨리고 얼굴을 숙였다.

“삐야…….”

조그맣게 기운 없는 콧소리를 흘려낸 포이는 머리가 제이든의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엎어졌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등과 엉덩이에서 아쉬움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제이든은 포이의 동그란 엉덩이를 통통 두들겨 준 다음 어깨 위에 올렸다.

포이는 어깨 위에서도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다른 때처럼 이리저리 주변 구경을 하는 대신 제이든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얼굴을 묻고 있었다.

“많이 아쉬운가 보네.”

-응, 포이를 많이 귀여워해 주셨어.

아실리가 제이든의 다리 옆에 붙어 따라오면서 자신도 좀 아쉬운 듯이 야옹거렸다.

* * *

치안대 마구간에서 건초를 먹고 있던 베로는 제이든 일행을 보자 반가운 듯 히힝거리며 앞발을 들썩였다.

“잘 쉬고 있었어? 밥이랑 물도 잘 먹고?”

베로의 목덜미를 두드려 주는 제이든을 보고 치안대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나이 지긋한 마부가 다가왔다.

“말은 잘 있었소. 건초랑 여물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셨다우. 그런데 마차에 조금 문제가 있던데?”

“마차요?”

“그렇다우, 잠깐 와 보시겠소?”

마부는 제이든을 건물 뒤쪽의 빈터로 데려갔다. 치안대 표식을 단 푸른 마차들 옆에 제이든의 작은 대여 마차도 주차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말을 풀 때 봤는데 말이지, 여기 말과 마차를 연결하는 부분이 헐거워져서 잘 맞지 않더라고.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이대로 두면 운행 중에 연결이 풀리면서 말이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수. 속도가 있을 때라면 마차가 넘어질 수도 있고.”

“아 그럼 수리나 교환을 해야겠네요. 여기 옐로우 코우치 지점이 어디쯤 있을까요?”

“요 앞으로 나가서 우측으로 네 블록만 지나면 있다우.”

“그럼 일단 마차를 맡기러 가겠습니다. 거기까지 운행에는 문제가 없겠죠?”

“그 정도야 상관없지.”

제이든은 베로를 마차에 연결한 후 옐로우 코우치 지점을 찾아 나섰다.

전 대륙에 지점을 둔 기업답게 옐로우 코우치의 고객 응대는 신속하고 친절했다.

“레이크빌에서 대여하신 마차군요. 일단 저희 지점에 반납 처리를 해 주시면 다른 마차를 대여해 드리겠습니다. 같은 종류로 4인승 승용마차면 되겠습니까?”

“예, 그런데 마차는 교환하고 말은 그냥 같은 말을 대여할 수도 있을까요?”

서류 준비를 하고 있던 직원이 머리를 들고 사무실 밖에 서 있는 마차를 넘겨다 보았다. 베로의 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아실리와 포이를 본 그가 미소를 지었다.

“동물을 좋아하시는군요. 말에게 잘 대해 주시는 손님은 저희로서도 감사하지요. 말은 원래 마차와 한 세트로 나가긴 합니다만 원하시면 저 말을 계속 사용하도록 하시죠. 마차만 바꿔 드리겠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한 시간쯤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마차만 따로 배정하려면 조정이 좀 필요해서요.”

“오늘은 마차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베로만 데리고 갔다가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그때 마차를 가져가죠.”

“예. 그럼 그렇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서류 작성을 끝낸 제이든은 밖으로 나와 베로를 마차에서 풀었다.

“자, 베로데인 구경을 좀 할까?”

그는 포이를 먼저 말안장 위에 올려놓은 후 그 뒤로 훌쩍 올라탔다. 아실리는 알아서 사뿐 뛰어오르더니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 포이가 좀 위험하지 않으려나?”

“포잇, 포이잇!”

포이는 괜찮다는 듯이 발돋움을 하면서 말안장 위에서 발을 콩콩 굴러 보였지만 제이든은 아무래도 조금 불안했다.

“포이는 여기 들어가 있자.”

제이든이 입고 있는 후드가 달린 튜닉에는 배 부분에 넓적한 주머니가 붙어 있었다. 포이를 그 주머니에 집어넣자 크기가 딱 적당했다.

포이도 좋은지 주머니 밖으로 머리와 앞발을 내놓은 채 꺄르륵거리며 웃었다. 카티야가 떠난 후 계속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기분이 좋아진 듯해 다행이었다.

마차를 간수하려고 나온 직원이 고양이를 앞에 태우고 토끼를 배에 넣은 채 베로를 몰아 마당을 빠져나가는 제이든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기가 좀 우습죠?”

제이든이 멋쩍게 웃자 직원은 얼른 표정을 관리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냥…… 참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토끼가 편하고 따뜻하겠어요.”

아기 캥거루처럼 제이든의 배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던 포이가 그 말이 맞다는 듯 귀를 까딱거렸다.

* * *

“한국이었으면 SNS 스타가 됐겠는데.”

베로를 타고 시내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제이든이 중얼거렸다.

고양이를 앞에 태우고 토끼를 배 주머니에 넣은 채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은 카이엔 대륙에서도 신기한 풍경인지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돌아보거나 웃으면서 지켜보고 아이들은 팔짝팔짝 뛰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아실리, 괜찮아? 불편하지 않아?”

-걱정 마, 괜찮아. 막 달려도 난 안 떨어져.

아실리는 말 위에서도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대꾸했다.

지구에 있을 때 주인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고양이 영상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다.

우리 아실리가 말 타는 영상을 올리면 백만뷰는 금방일 건데.

제이든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우편국으로 말을 몰았다.

베로데인은 큰 도시라서인지 사서함실도 여유가 있었고 아실리와 포이도 따로 대기실에 넣지 않고 개인실에 데리고 들어올 수 있었다.

“오, 아실리, 테디 씨한테서 서신이 와 있다!”

라이 한의 저주받은 거울을 마탑으로 가져갔던 마법사 테오도르에게서 서신이 와 있었다.

“동방 주술에 대해 연구한 마법사들이 달라붙어서 여러 가지로 시도한 끝에 결국 저주를 풀었대. 거울에 갇혀 있었던 영혼들이 모두 풀려나서 원래 가야 할 곳으로 갔다네. 정말 잘됐다. 계속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환각 보고 나서 제이든 한참 우울해했었는데 다행이야.

제이든은 거울의 환각 속에서 보았던 여자, 시안의 아내를 생각했고 플로렌스의 시누이라던 부인도 생각했다. 그리고 거울 속에 갇힌 채 둥둥 떠다니던 영혼의 덩어리들.

그들을 보고 나서 계속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영혼이 모두 풀려났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갇혀 있었던 영혼들은 풀려났지만 거울에 걸린 주술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네. 누군가 이 거울을 소유하면 또 잡아먹힐 수 있나 봐. 흠……, 주술의 영구 해제를 위해서 동방으로 보내기로 했다고 적혀 있네. 동방 대륙의 마탑과 공조한다고.”

원래 동방에서 온 물건이니까 아무래도 그쪽 사람들이 그런 주술에 더 익숙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냥 파괴해 버리면 안 되는 건가?

파괴해 버리기엔 아까울 정도의 예술품이긴 했지만.

제이든이 중얼거리고 있으니 아실리가 야아웅 울었다.

-마법 물품은 함부로 파괴하면 안 돼. 어떤 여파가 있을지 모르잖아.

“나도 알아. 그냥 잠깐 생각해 본 거야. 동방으로 가는 뱃길이 끊겼다면서 그 거울은 어떻게 보내려나? 한번 물어봐야지.”

제이든은 테디에게 보내는 답신을 쓰고, 의뢰서와 기타 우편물들을 확인한 후 우편국을 나왔다.

“밥 먹으러 가자. 저녁 시간으로는 조금 이르긴 해도 배고프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점심을 걸렀더니.”

“포이, 포이!”

먹보 토끼가 앞발을 들고 흔들면서 자기도 배고프다는 표시를 했다.

-봄에 왔을 때 갔던 식당, 아직 있겠지? 스튜가 아주 맛있었던 집 말이양.

아실리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세 개의 화덕’ 말이지? 그 집이야 베로데인의 명물이니까 당연히 있겠지. 오랜만에 가 보자, 지금 가면 줄 길게 안 서도 될 거야.”

‘세 개의 화덕’은 워낙 유명한 식당이라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는 대기 줄이 몹시 길었다.

지금은 아직 저녁 시간이 아니라 대기 인원이 별로 없으려니 생각한 제이든이 식당을 향해 말을 빨리 몰았다.

‘세 개의 화덕’에 가까워질수록 그쪽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 중 제이든을 보며 웃는 사람들이 늘었다.

지나가던 남자아이 하나가 누나 정도로 보이는 소녀의 손을 흔들면서 쨍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고양이도 말 진짜 잘 탄다. 빨리 가는데도 엄청 잘 앉아 있네.”

저 고양이도? 설마 우리 아실리 말고도 말을 타는 고양이가 또 있나?

소년의 말을 무심히 귓전으로 흘리면서 식당 앞에 도착한 제이든은 사람들의 반응이 왜 그랬는지 이해했다.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참는 속에서 식당 앞의 대기 줄에 말을 탄 채 서 있던 남자 한 명이 이쪽을 돌아보더니 제이든과 거의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말안장 앞쪽에는 털이 북슬북슬하고 큼직한 개 한 마리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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