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2화
16. 미녀와 야수(10)
“좋은 집 아가씨 같은데 왜 혼자 다니나? 게다가 도보로.”
“베로데인에는 무슨 일로 가시나?”
“집을 나왔나? 연락할 데는 있어?”
카토는 마차를 몰고 가는 도중 계속 말을 붙여 봤지만 카티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신분이 밝혀질까 봐 그러나? 어쨌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인 건 틀림없는데 아무래도 집을 나온 것 같네.’
오후 4시쯤 다린토스 산기슭에 도착한 카토는 전 같으면 들러서 잠시 쉬어 갔을 산아래집 앞을 지나며 오히려 말을 빨리 몰았다.
‘누가 보면 안 좋지, 괜히 내가 유괴라도 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겠어.’
문 앞에 나와 서 있던 치안대원이 마차를 세우는 바람에 찔끔했지만, 표범이 나오니 해 저문 뒤에는 입산 통제라는 말을 듣는 중에도 카티야는 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깜빡 잠이라도 든 건가 뒤를 힐끔거리면서 카토는 아직 밝은 낮이니 그냥 산을 넘겠다고 고집하고 산에 올랐다. 이 시간에 별일이야 있겠나 싶은지 치안대원도 굳이 말리진 않았다.
삼십 분쯤 산을 오르고 나서 카토는 뒤쪽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잠깐만 쉬어 가자고. 카티야 양.”
그는 마차를 길 밖으로 빼내어 조금 으슥한 나무 밑 빈터로 몰아넣었다.
길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나무들에 가려진 공간이라 언뜻 봐서는 보이지 않을 만한 자리였다.
“잠깐 쉬면서 목 좀 축일까?”
마차의 포장을 들춰 보니 카티야는 편안하게 짐에 등을 기댄 채 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른하게 눈을 치켜뜨는 모습을 보고 카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마부석 뒤에서 술병과 술잔을 꺼냈다.
“이거 좋은 포도주인데 내가 아껴 놨던 거야. 언제 딸까 했는데 아가씨 같은 귀빈을 모셨을 때 따야지.”
술잔에 포도주를 따른 그가 마차 안으로 잔을 건네자 카티야는 별말 없이 잔을 받았다. 카토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쌀쌀맞게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이게 뭐라더라, 샤토 몽, 몽블랑이던가.”
술병의 레이블을 다시 확인하려는데 한 모금 맛을 본 카티야가 툭 내뱉었다.
“샤토 몽페라, 289년 산이군. 저렴한 가격에 비해 맛이 괜찮지.”
카토는 눈을 좁혔다. 한 모금 만에 와인 이름을 알다니, 역시 귀족 아가씨인 건가.
함부로 건드렸다가 뒤탈이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평생 한 번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녀인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여행을 하는 데다 군소리 없이 내 마차에 탔잖아? 술도 받아 마시고.
그러면 내 탓이라 할 순 없지.
마차의 포장을 내리는 카토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카토가 자꾸 술을 권하자 카티야가 불쑥 말했다.
“표범이 나온다는데 신경 쓰이지 않나?”
“에이, 여기는 표범 같은 큰 짐승은 없는 산이야. 설령 소문이 맞다고 해도 대낮에 나올 리는 없지. 여긴 아직 산 아래와도 가깝고. 왜, 무서워?”
카토는 은근히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혼자서 베로데인까지는 왜 가시나?”
카티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사실 베로데인보다는 여기, 다린토스 산에 오려고 했어.”
“여기? 산엘? 왜?”
“그야, 헛소문이 도는 걸 들었기 때문이지.”
“?”
카티야의 보랏빛 눈에 금빛이 짙어졌다.
“베로데인의 흰 표범은 사람이나 동물을 함부로 해치지 않거든. 악한 자가 아니라면.”
“…….”
잠시 말을 잇지 못했던 카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옛날이야기를 믿는 아가씨였군, 표범은 그렇다치고, 자, 한 잔 더 하지?”
카토는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크림색 로브가 흘러내리고 드러난 흰 어깨가 눈부시다.
“너,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지?”
“응?”
“혼자 길 가는 여자한테 몹쓸 짓을 한 거 말이야.”
“어, 뭐,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카토는 술에 취했는지 그녀에게 취했는지 모르는 상태로 주절거렸다.
“뭐 두어 번 있지만 카티야 양 같은 미인은 한 번도 없었어. 평생 처음이라니까. 이봐, 나랑 같이 다니면 어때? 고운 옷도 사 주고 보석도 사 주고 할 테니까, 응?”
카토는 술냄새 풍기는 얼굴을 카티야의 얼굴에 들이대었다.
“어어?”
그녀의 커다란 눈의 흰자위가 금빛으로 가득차고 그 가운데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세로로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술이 취해 잘못 봤나 싶어 머리를 흔들어 보는데 옷이 흘러내린 새하얀 피부 위에 은빛 반점이 떠오른다.
“으아아악!”
카토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뒷걸음쳤다.
마차에 쌓아 놓은 짐이 등에 부딪쳐서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자 그는 두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몸을 뒤로 밀었다.
미녀는 사라지고 새하얗게 빛나는 표범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흰 몸체 위에서 비단에 새긴 듯한 은빛 무늬가 반짝였다.
“으르르르!”
표범이 위협하듯 낮게 으르렁거리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몸을 낮추고 한 발 다가서는 표범의 입술 밖으로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카토는 정신없이 마차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표범은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를 바닥에 때려눕혔다.
은식기가 등 밑에서 철그렁거리다 마차 밖으로 떨어졌다. 카토는 흩어진 짐 위에 짓눌린 채 공포에 질려 헐떡였다.
송곳 같은 발톱이 달린 앞발로 카토의 목을 짓누른 표범은 그의 머리를 한 입에 베어물 기세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송곳니가 목덜미에 닿으면서 세로로 칼끝처럼 줄어든 보랏빛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다음 순간 창날 같은 송곳니가 그의 목을 꿰뚫었다. 그는 산 채로 표범에게 갈기갈기 찢기면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정신이 나가 버린 어느 순간 그는 환각에서 빠져나왔다.
.마차 밖으로 튕겨나와 흩어진 식기와 가재 도구 사이에서 경련하고 있던 그는 몸이 자유로워진 것을 깨닫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산 아래로 달렸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카토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면서 제이든은 천천히 의식을 회복했다.
-제이든, 괜찮아?
아실리가 그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제이든은 언제 옮겨졌는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식은땀이 잔뜩 났어.
아실리는 말랑말랑한 앞발로 걱정스럽게 제이든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나무라는 듯한 눈길로 카티야를 노려보고는 제이든의 앞을 가로막듯이 야무지게 똬리를 틀고 앉았다.
“대단한 고양이네. 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카티야는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나 고양이한테 야단맞았어.”
아실리가 꾸짖는 듯한 어조로 단호하게 야옹 울었다.
-제이든은 감정이입이나 동기화가 굉장히 잘 되는 체질이란 말이에요.
“그래 미안. 네 친구를 환각에 너무 깊이 빠지게 했구나.”
아실리가 앞발을 들어 탁자 위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자 카티야가 물을 잔에 따라 제이든에게 가져다 주었다.
제이든은 물을 마시고 나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베로데인의 흰 표범…….”
제이든이 중얼거리자 카티야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래, 나야. 베로데인을 지키는 흰 표범. 선한 사람과 동물의 수호자.”
제이든은 몽롱한 의식 속에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누운 채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카티야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제이든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말했다.
“내가 무섭지 않니?”
“예? 왜요? 우린 일행이고…… 친구잖아요.”
카티야는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내 본신을 본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거든. 날 경외하거나 날 무서워하거나.”
“외로우셨겠네요.”
제이든은 힘없이 웃었다.
“전 이제 자야겠어요. 안 그래도 너무 피곤했는데 그…… 환각 때문에 진을 뺐네요.”
그는 카티야에게 손짓을 했다.
“가서 주무세요. 우유 남은 거 다 드시고 주무세요. 내일……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제이든은 카티야가 어이 없다는 듯이 웃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침대 옆에서 카티야와 아실리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들렸다.
“쟤 나를 큰 고양이쯤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 우유 남은 거 먹고 자래.”
-제이든이 좀 엉뚱한 데가 있지요.
아실리는 꼬리 끝을 만지면서 물었다.
-로버트가 꾼 꿈은 카티야 님이 꾸게 한 거죠?
“응. 그 아이도 꿈을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더라. 그 사고 현장에 나는 없었지만 다린토스의 부엉이가 목격했거든. 죽은 자가 타던 말도 내게 주인이 살해됐다고 말했고. 그래서 부엉이가 본 걸 꿈으로 보여 줬지.”
아실리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북부의 영수가 왜 베로데인의 표범이 됐어요?
카티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옛날에, 아직 어렸을 때 어떤 남자랑 사랑에 빠졌거든. 인간 남자랑.”
-…….
“그래서 북부를 떠나 카이엔 복판까지 왔지.”
카티야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날 위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 같던 그는 내 본신을 알게 되자 날 무서워했어. 그래서 내가 떠났지.”
-…….
“북부로 돌아가지 않고 베로데인에 머물렀어. 내가 아주 좋아한 메밀꽃밭이 있었거든, 지금은 농지가 됐지만 베로데인에서 실버로드까지 메밀꽃밭이 이어져 있었어. 밤에 보면 은하수 같았지. 다린토스 산도 지금 같지 않았고.”
-사람이 많아지고 산이 개발되면서 떠나신 거예요?
“응, 그렇지. 다시 북부로 갔다가 여기저기 여행도 하고.”
그녀는 잠들어 있는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사람 친구는 다시 안 만들려고 했지.”
* * *
침대에 쓰러졌던 제이든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이었다.
“삐잇!”
베개 옆에 엎드려서 제이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포이가 제이든이 눈을 뜬 것을 보고 기뻐하며 팔짝 뛰었다.
“포잉, 포잉!”
“일어났다, 일어났어. 포이야, 일어났다고.”
제이든은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고 한 손으로는 마구 달라붙는 포이를 토닥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몸은 괜찮아?
옆구리에 붙어 있던 아실리가 제이든의 배 위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며 하품을 했다.
“응, 괜찮아. 잘 자고 나서 개운해.”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제이든은 새벽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은근히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카티야 양이 베로데인의 흰 표범이란 말인가.
신수나 영수가 사람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전설은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굳이 이계에서 온 자신이 아니더라도 여기 사람들도 그런 얘기는 전설로만 생각하던데.
동물의 형질이 몸에 남아 있고 타고난 형태를 바꿀 수 없는 수인이라면 흔하지는 않아도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지만 카티야처럼 완벽하게 인간의 형태와 영수의 형태를 양쪽 다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
.본인도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포잉, 포잉!”
포이가 뒤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문밖을 가리켰다.
포이는 일찍 잠들었으니 일찍 깼겠지. 제이든이 일어나는 걸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가방을 뒤져서 아침도 챙겨 먹었는지 초록 배낭 주위에 알팔파 건초와 사과 꼭지가 흩어져 있었다.
“어디 보자, 우리 포이. 어이구 배가 불룩하네?”
제이든이 포이의 토실토실한 배를 간지럽히자 포이는 꺄르륵거리면서 뒷발로 팡팡 그의 손을 밀어냈다.
“밖에 나가고 싶지? 나가서 베로데인 구경도 좀 하고 점심도 먹고 필요한 것도 좀 사고 그러자.”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복도로 나온 제이든은 옆방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카티야 양, 카티야 양, 일어나셨습니까?”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직 안 일어나셨나?”
그때 세탁물 바구니를 안고 지나가던 여관 종업원이 말했다.
“그 손님은 떠나셨어요. 일행분이 깨어나시면 전해 드리라는 게 있었는데, 아래층 카운터에 있어요.”
이렇게 떠났다고? 인사도 없이?
제이든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일층으로 내려갔다.
“아, 손님, 나오셨습니까? 일행이신 아가씨께서 이걸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카운터의 여관 주인이 내민 것은 연보랏빛 손수건으로 무엇인가를 싼 것이었다.
손수건의 매듭을 풀어 보니 은화가 한 개, 금화가 한 개 나왔다.
은화는 카티야가 실버블로썸의 주인에게도 주었던 아마릴리스 기념 은화였다. 그러나 금화를 집어든 제이든의 눈이 커졌다.
이 금화는 제이든도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희귀한 것으로, 아마릴리스 기념 은화가 제조될 적에 카이엔 황실에서 특별히 황실 가족들만을 위해 제조한 것이었다.
.당연히 수량도 적었지만 모양만 금화일 뿐 화폐가 아니라 황실 가족들을 나타내는 영패처럼 쓰인 물건이었다.
은화와 금화 아래에 작은 쪽지가 있었다. 우아하고 고전적인 필체였다.
-제이든 로스, 성실한 감정사여.
이미 위대한 자의 손길을 받은 고양이와 행운의 토끼가 그대와 함께하고 있으니 더 이상의 축복은 필요 없겠지만 짧은 시간 나를 즐겁게 해 준 그대에게 작은 선물을 남긴다. 언젠가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니 그대의 앞길이 평안하기를.
그대의 친구, 에카테리나 아마릴리스 알렉산드로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