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1화
16. 미녀와 야수(9)
치안대에서 잡아 준 숙소는 바로 옆 거리의 깔끔한 여관으로 치안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곳인 듯했다.
로버트는 자기 집에서 묵어도 된다고 했지만 거리도 있고 좀 부담스럽기도 해서 일반 여관이 나았다.
자다 말고 나온 여관 종업원은 연신 하품을 하면서 나란히 붙은 1인실 두 개를 안내해 주었다.
카티야의 품에서 귀를 축 늘어뜨리고 잠든 포이를 침대에 눕히자 아실리도 고르릉거리며 포이의 옆에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카티야 양 방은 옆방이에요.”
“알아. 그런데 뭐 먹을 거 좀 없어?”
카티야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불쌍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든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제 로버트의 집에서 점심을 먹은 이후 계속 정신없이 돌아치느라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저녁때 치안대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긴 했지만 뭘 먹었는지 말았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아실리와 포이만 겨우 신경 써서 제때 먹을 것을 줬는데, 생각해 보니 카티야는 늘 제이든의 뒤에 조금 떨어져서 아실리와 포이를 돌보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입에 대는 걸 못 본 것 같았다.
“식사를 못 하셨군요.”
“너도 거의 안 먹던데.”
“계속 다른 데 신경을 쓰느라고요. 뭔가 먹을 게 있나 좀 볼까요.”
여관 주방은 닫았을 시간이지만 다행히도 제이든에겐 니콜레타의 마법 배낭이 있었다.
그동안 사용해 보니 숨겨진 계곡에 있는 세시온의 식료품 찬장처럼 영구 보존 마법이 걸려 있진 않지만 넣어 놓은 식품이 일주일 정도는 충분히 신선하게 유지되는 듯했다.
“실버블로썸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는 다 먹었고, 당근이랑, 건초, 사과…….”
고양이 사료, 알팔파 건초, 말린 당근 잎 등을 꺼내고 나서야 종이에 싼 빵 한 덩어리가 나왔다.
“아, 이게 아직 남아 있었네.”
뭐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면 바로 그걸 꺼낼 수 있는데 지금처럼 뭐가 남아 있는지 확실히 모르고 있으면 일반 가방처럼 뒤져야 했다.
‘냉장고 뒤지는 것 같네.’
제이든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작은 우유병을 꺼냈다.
방에 기본으로 딸려 있는 간이 탁자 위의 접시에 빵을 담고, 플로렌스 부인이 만들어 준 라벤더베리 잼을 꺼내 곁들인 후 우유를 컵에 따랐다.
“우유가 한 병 남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애들 봐주시느라 애쓰셨는데 제가 챙겨드리질 못했네요.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드세요. 빵이 맛있답니다.”
1인실이라 식기가 1인분밖에 없었다. 접시를 카티야 쪽으로 밀어 주자 그녀가 빵을 반으로 쪼개서 내밀었다.
“같이 먹어.”
제이든도 배가 고팠기에 사양하지 않고 빵을 받았다.
“라벤더베리는 중부에서 많이 나지, 예전엔 다린토스 산에도 라벤더베리 나무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다 사라지고 없더라. 이 잼은 맛있네, 풍미가 잘 살아 있어.”
“예. 잘 아는 빵집 아주머니가 만드셨는데 솜씨가 좋으세요.”
잼 바른 빵을 맛보는 카티야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제이든도 빵에 잼을 듬뿍 발랐다.
며칠 전만 해도 요정이나 정령 같기만 해서 말 한 마디 못 붙여 볼 것 같던 얼음 미녀와 이웃 누님처럼 빵을 나눠 먹고 있는 게 신기했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지 볼 때마다 헉 소리가 나오던 카티야의 미모에도 좀 적응이 되었는지 이제 코앞에 앉아 있어도 숨 쉬는 게 힘들지 않다.
빵을 먹고 우유를 마신 카티야가 턱을 고이고 제이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이든이 쿨럭 헛기침을 했다. 방금 전에 한 생각은 취소다. 크고 동그란데 눈꼬리만 요염하게 살짝 올라간 보랏빛 눈이 바로 앞에서 빤히 바라보자 왠지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았다.
“너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니?”
“예?”
카티야가 흐흥 콧소리를 내면서 고양이처럼 목을 울렸다.
“너 아까 카토? 그 행상인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날 쳐다봤지?”
“…….”
“속으로 의심하고 있는 게 있지? 그런데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
“그야…….”
제이든은 싱긋 웃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본인이 밝히지 않는데 굳이 캐묻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요.”
“기다릴 줄 아는 아이네.”
“저도 다른 사람한테 밝히지 못하는 사연 같은 게 있거든요.”
카티야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물었다.
“알고 싶어?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음…….”
제이든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보기 좋은 일은 아닐 텐데.”
“괜찮습니다. 그래도 궁금하네요.”
카토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카티야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좋아.”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탁자 건너편의 제이든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흐억!
제이든은 숨을 들이키면서 몸을 뒤로 젖히다가 의자 등받이에 덜컥 걸렸다.
이 세상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보랏빛 눈, 진주 같은 피부, 오뚝한 코에 도톰한 입술이 눈앞으로 와락 다가오더니 동그란 이마가 제이든의 이마에 탁 부딪쳤다. 달큰한 숨이 훅 끼쳐 오면서 눈앞이 뽀얘졌다.
나 기절하는 건가?
* * *
덜그럭, 덜그럭!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 바퀴가 힘겨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눈에 익은 길이 농지 사이로 뻗어 있고 깡마른 말의 등이 눈앞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디지?
제이든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이 길은 실버로드에서 베로데인으로 향하는 국도였다. 앞에서 힘겹게 달리고 있는 말은 제시였고 그 등에 채찍질을 하고 있는 남자는…… 그래, 카토였다.
제이든의 의식이 카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의 생각과 행동이 보였다.
카토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제시의 등에 또 채찍질을 했다.
이 쓸모없이 비루먹은 말, 더 빨리 달리란 말이야. 그 여자가 아까 출발했다고 하지만 말도 마차도 없으니 여자 걸음으로 얼마나 갔겠어?
그런 미녀는 평생 처음 봤다. 말이라도 좀 섞어 보고 싶었는데 어찌나 쌀쌀맞던지.
베로데인으로 향했다고 했지? 큰길은 이거 하나니까 곧 따라잡을 수 있겠지. 그래도 여관에서 낯은 익혔으니 마차를 태워 준다고 잘 꼬드기면…… 카토는 입꼬리를 올렸다.
베로데인까지 가는 길을 반 넘게 달렸는데도 여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쳇! 아무래도 중간에 다른 마을로 빠졌나 보네.
카토는 이제 힘이 빠져서 달리지 못하고 걷기만 하는 제시에게 괜히 화풀이를 했다. 저놈의 말이 조금만 더 기운찬 놈이었으면 여자가 다른 마을로 빠지기 전에 따라잡았을지도 모르는데.
공연히 죄없는 말에게 욕을 하는데 제시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 망할 말 새끼가, 안 걸어? 어쭈? 안 걸어?”
카토는 화를 내면서 사정없이 채찍질을 했지만 제시는 걸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대로 무릎을 꺾고 쓰러지고 말았다.
몇 번 더 채찍을 휘두르다가 마차에서 내려온 카토는 쓰러져서 가쁜 숨만 몰아쉬는 제시를 내려다보면서 혀를 찼다. 게거품을 물고 누운 게 아무래도 다시 일어서지는 못할 거 같았다.
“에이, 길 중간에서 이렇게 퍼져 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야!”
그는 제시를 발로 걷어찼으나 제시는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헐떡이기만 했다.
“그나마 가까운 게 다리엔이니 거기까지 걸어가서 다른 말을 사 오든 빌려오든 해야 하나? 이놈은 푸줏간에 팔아 버리고.”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나.
아까 여관에서 보니 고양이랑 토끼를 데리고 다니는 젊은 놈도 베로데인 간다고 하던데. 아침 먹고 천천히 출발했다 치면 한 시간쯤 기다리면 지나가지 않을까? 그놈 말을 빌려서 다리엔에 갔다 오면 어떨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카토는 짜증이 나서 제시를 한 번 더 걷어차려고 발을 들었다가 왠지 모를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헉!”
뒤를 돌아본 카토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언제 나타났는지 크림색 로브를 걸친 카티야가 길가에 서서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가씨 언제 왔어?”
말을 하고 보니 웃겼다.
들판 한복판에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을 리는 없고 아마 다리엔으로 빠지는 길 쪽에서 왔을 텐데 나무에 가려서 자신이 못 본 거겠지.
“카티야 양이라고 했지? 다리엔에 들렀던 모양이네? 걸음이 무지 빠르시군.”
“…….”
“말이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내가 베로데인까지 태워다 드릴 텐데. 아쉽게 됐네.”
카티야가 미끄러지듯 다가오더니 제시를 내려다보았다.
“말이라고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원. 오래 타지도 않았는데. 아 참, 잘됐네. 마차를 두고 가기 뭣했는데 카티야 양, 여기서 마차 좀 봐주겠어? 내가 얼른 다리엔에 가서 새 말을 끌고 올 테니까. 마차 좀 지켜 주면 내가 톡톡히 사례를 하지.”
카티야는 묵묵히 제시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카토를 돌아보았다.
“물.”
“물? 아, 목이 마르신가?”
카토는 얼른 마부석에 있던 물통을 꺼내 통째로 내밀었다.
“참, 아가씨 같은 사람이 물통째 먹진 않겠지. 잠깐만 기다려요.”
마차 안에 들어간 카토가 식기를 뒤적거려 깨끗한 컵을 찾아서 나왔을 때 카티야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쓰러진 제시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그놈 그거 물 먹여 봐야 소용없어. 카티야 양, 내가 딱 보면 아는데 그놈 이제 못 일어나, 그 조막만 한 손으로 물 몇 모금이나 먹이겠다고.”
카티야는 들은 척 만 척 물통의 물을 손에 부어서 제시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녀의 손에 담긴 물이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제시가 그 몇 모금의 물을 겨우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카토는 혀를 찼다.
“곧 죽을 목숨인데 쓸데없는 짓을. 하긴 뭐 카티야 양 같은 미녀의 손에 물 받아먹고 죽으면 그것도 저놈 복이겠네.”
제시에게 물을 먹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카티야가 일어섰다.
한결 편안한 숨을 내쉬던 제시가 잠시 후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카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봐도 금방 죽을 것 같던 말이 다시 일어서다니?
카티야가 제시의 목을 두드리자 제시가 코를 울리면서 발굽을 가볍게 구르고 그녀의 어깨에 코를 비볐다.
제시는 원래 온순한 말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렇게 친밀하게 대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카토는 가까이 가서 제시를 확인해 보았다. 여전히 바싹 말랐고 채찍질로 인한 상처도 많았지만 눈에도 힘이 있고 좀 전까지 거품을 물었던 입도 깨끗했다.
아마 실버로드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지친 데다 탈수 증세가 좀 왔던 모양이군. 이 정도면 베로데인까지 마차를 끌고 가는 데는 지장이 없겠네. 베로데인에 가서 푸줏간에 팔아 버리고 새 말을 구해야겠어.
카토는 혼자 생각하고 나서 카티야를 돌아보며 한껏 친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녀가 주는 물을 마시니 말도 기운이 나나 보구만. 감사의 뜻으로 내가 베로데인까지 모셔다 드리지. 어떤가, 카티야 양?”
카티야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젠장, 가까이서 보니 진짜 숨 막히게 예쁘다. 이런 여자랑 마차를 같이 타고 베로데인까지 가면서 친분도 쌓고 술이라도 한잔 같이한다면…… 카토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어서 타요. 걸어가다 보면 다린토스 산에도 가기 전에 해가 질 건데, 카티야 양처럼 예쁜 아가씨가 혼자 길을 가는 건 위험해.”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는 카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티야가 마침내 고개를 까딱했다.
“그렇지, 잘 생각했어요. 자, 이리, 이리로 타면 돼.”
카토는 마부석 바로 뒤, 마차의 가장 안쪽 부분 깔아 놓은 모포를 털고 짐을 밀치며 부산스럽게 자리를 만들었다.
원래 길 가는 도중 잠시 쉬거나 낮잠을 잘 때 쓰는 공간으로 비워 둔 자리인데 이렇게 쓰네!
공주님 모시듯 카티야의 손을 잡아 마부석을 통과해 마차 안쪽으로 들여보낸 카토는 마부석과 마차 사이의 포장을 내린 후 입이 귀까지 벌어져서 제시를 몰기 시작했다.
순순히 마차에 탄 걸 보면 저 여자도 내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야, 암 그렇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