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9화
16. 미녀와 야수(7)
돌돌 말려 있는 길고 얇은 종이 한쪽 끝을 손가락에 걸고 능숙하게 펼쳐가며 읽은 뒤 다시 감으면서 브루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표범의 흔적은 없었답니다. 사고 현장에도 발자국이나 털 같은 건 없었고 사람과 말의 흔적밖에 찾지 못했대요. 다른 동물들의 발자국이나 흔적은 좀 있었지만 모두 소동물이어서 표범과는 연관시킬 수 없대요.”
“그것 봐! 표범은 꾸며낸 말이라니까요. 로키랑 제임스가 짠 겁니다.”
흥분하는 로버트를 진정시키면서 브루스가 말을 이었다.
“아직 증거가 없으니까 섣불리 예단할 순 없고요. 수색대에 동행한 마법사는 환영 마법을 의심했지만 마법이 사용된 흔적 역시 찾지 못했대요.”
아, 그래, 환영 마법도 있었지. 제이든은 아실리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아실리도 환영 마법을 잘 쓰지. 누군가 환영 마법으로 표범을 보이게 했다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게 가능할 텐데 영지의 마법사가 마법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하니 그것도 아니려나?
제이든이 이런저런 궁리를 해 보는 동안 브루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신수나 영물은 원래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진짜 베로데인의 흰 표범이 나타난 거라면 오히려 발자국이나 흔적이 없는 게 정상 아닐까요?”
아이고! 제이든은 무심결에 머리를 짚었다.
이 세계에 온 지 벌써 몇 년이 되어 이제 익숙해졌다 싶다가도 가끔 이런 문화적 충격을 겪을 때면 낯설고 생소한 기분이 든다.
여기는 과학 수사가 발달되지 않기도 했지만 애당초 과학 수사 성립이 어려운 세계이기도 했다.
.마법이라든지 신수, 수인 등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보니 제이든이 생각하는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자동차가 없고 말과 마차가 주 교통수단인 한편 공간 이동이 가능한 포탈이 있고, 비둘기와 까마귀가 우편물을 전달하지만 영상 통화가 가능한 영상구는 있는 세계.
.치안대원인 브루스조차 발자국이 없는 것을 의심하기보다 정말 전설 속의 영수가 나타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세상.
제이든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균형해 보이는 발전을 이룬 세계인 것이다.
“그 제임스라는 엽사는 찾았나요?”
“찾는 중입니다. 원래 페리헌트 씨 사망 과정 진술을 받고 귀가시키기는 했지만 추가진술이나 조사가 필요할 수 있으니 치안대와 계속 연락이 닿아야 한다고 고지해 놨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사라져서 대장님도 화가 나셨습니다.”
브루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아보니 술과 도박을 좋아하는 인간이라 이렇게 며칠씩 연락두절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군요. 어쩌면 취해서 어딘가에 처박혀 자고 있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털레털레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브루스는 치안대로 귀대한다고 했고, 제이든은 그림을 가지고 베로데인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투시 광선 장치를 보유한 감정소가 없어 병원의 신세를 져야 할 듯했다.
“제가 치안대에 가는 대로 병원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일단 치안대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응? 아실리, 왜?”
아실리가 제이든의 바지 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나지막하게 야웅거렸다.
-말을 조사해 보라고 해.
‘말?’
잠깐 생각하던 제이든이 브루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잭 페리헌트가 타고 갔던 말은 혹시 조사해 보셨나요?”
“말이라면…….”
브루스가 로버트를 향했다.
“아버님이 타고 가셨던 말은 댁 마구간에 있지요?”
“예. 그날 로키와 제임스가 허겁지겁 산에서 내려온 후 치안대에 신고하고 다시 올라가 봤더니 벼랑 위쪽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후 제가 데리고 내려왔지요.”
“말은 특별한 문제가 없었나요?”
제이든이 묻자 로버트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떨어질 때 다쳤는지 옆구리에 안장과 등자에 쓸린 상처가 있었는데 심하진 않았고요. 왼쪽 앞다리를 조금 절더군요.”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신이 없어서 그냥 마부에게 맡겨 놓고 따로 살펴보거나 수의사에게 보이진 않았는데…….”
“간밤에 꾸셨다는 꿈에서, 말이 날뛰어서 부친께서 낙마하셨다고 하셨죠? 혹시 말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로버트의 눈이 커졌다.
“아, 그 생각은 못 했습니다. 어제까지는 표범에게 쫓겨 추락사한 걸로만 생각해서…… 그래요. 당장 수의사를 불러 살펴보라고 하겠습니다.”
제이든의 뒤에서 카티야가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똑똑한 고양이네.”
수의사가 온다는 말을 듣자 브루스가 남아서 말 검진을 입회하겠다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원통을 꺼내더니 돌돌 말린 종이와 펜, 핀 두 개를 꺼냈다.
.탁자 위에 가늘고 긴 종이를 쭉 펴고 양쪽 끝을 핀으로 탁자에 꽂아서 펼쳐 놓더니 빠른 속도로 종이 위에 점과 선을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종이를 꽉 채운 그가 핀을 뽑고 종이를 돌돌 말더니 토리를 불렀다.
아실리의 눈치를 보면서 포이를 집적거리고 있던 비둘기는 브루스의 부름에 총총거리고 걸어와 탁자 위로 날아올라왔다. 그리고 한쪽 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치안대에 전해.”
브루스가 편지 통을 달기 쉽게 한쪽 발을 내밀고 섰던 비둘기는 그가 편지 통을 다리에 채워 주자 구구거리면서 브루스의 귓전을 장난스럽게 두어 번 쪼고 나서 날개를 펴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아주 똑똑한 비둘기네요.”
제이든이 감탄하자 브루스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치안대에 비둘기가 몇 마리 있지만 토리가 제일 똑똑해요. 빠르기도 하고요. 저를 제일 잘 따른답니다.”
“집배조용 타자기가 아니라 수기로 서신을 작성하시는데도 엄청 빠르시네요.”
“예, 치안대 특성상 타자기를 쓸 수 없는 곳에서 서신 작성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속기를 익혔어요. 본대에도 해독할 수 있는 대원이 있으니까 병원으로 금방 협조 공문을 보내줄 겁니다.”
제이든이 그림을 들고 나와 마차에 싣자 카티야가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나와 자연스럽게 마차에 올랐다.
“카티야 양, 저는 지금 베로데인 병원으로 갈 건데요.”
“응. 저 그림을 검사할 거지? 그동안 아가들 봐 줄 사람 필요하지 않아?”
카티야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제이든은 반사적으로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갑자기 웃으시면 안 되죠. 카티야 양.
“아실리는 누가 봐 줄 필요가 없고, 포이는 아실리가 봐 주면 되는데요.”
“나 이 표범 사건에 관심이 있거든. 이거 끝날 때까지만 같이 좀 다니자.”
카티야는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같이 다니게 해 주면…… 음, 그렇지. 그 종적을 감췄다는 엽사를 찾아 줄게, 어때?”
“카티야 양이요?”
“응. 치안대에서도 수색을 하겠지만 내가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어떻게 찾으실 건데요?”
카티야는 또 생긋 웃었다.
“비법이 있어.”
제이든은 더 자세히 물어 보고 싶었지만 카티야는 딴청을 부리면서 포이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무래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결국 포기한 제이든은 마부석에 올라 베로를 병원 쪽으로 몰았다.
처음 봤을 때의 카티야는 말도 없고 표정도 없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더니 좀 익숙해지니 의외로 말도 잘하고 소탈한 아가씨다. 이제야 좀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제이든은 길을 재촉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협조 공문을 받은 행정실에서 직원을 붙여 주었다.
“환자도 아니고 그림에 투시 광선을 쏘인단 말인가요?”
젊은 직원은 제이든의 뒤를 따라오는 카티야와 그녀가 안고 있는 포이, 그리고 옆을 걸어오는 아실리를 신기한 듯 힐끔힐끔 보면서 말을 걸었다.
“예, 감정 기법 중 하나입니다. 의료용 투시 광선을 회화나 유물에 쏘여 보는 것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투시 광선 투사실에는 담당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든은 마법으로 운용된다는 이 투시 광선이 지구의 X선과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몰랐지만 효과가 거의 같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림에 투시 광선을 쪼인 기사가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종이처럼 얇은 은판을 제이든에게 주었다.
“보실 만한 게 있으신지요?”
제이든은 신중하게 은판에 떠오른 영상을 살펴 보았지만 기본적인 정보 외에 제이든이 찾고 있는 눈에 띄게 색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이중 그림도 아니었고 캔버스에도 아무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 액자까지 살펴 보았는데 테두리를 따라 박힌 수정 장식이 다소 화려했지만 이런 류의 장식으로 흔히 사용되는 저품질 수정이어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실망했니?”
투사실 밖에서 기다리던 카티야가 제이든의 얼굴을 보고 말을 던졌다.
“예,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네요.”
로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림에서 뭐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치안대에 가서 감식 보고서를 쓰고 그림은 로버트 씨에게 돌려줘야겠어요. 로키 씨가 금방 가져가겠지만.”
치안대로 마차를 몰고 가는 중 어디선가 커다란 솔개 한 마리가 날아왔다.
솔개는 원을 그리며 하늘을 몇 번 선회하더니 제이든의 마차 지붕에 내려앉았다.
창밖 내다보는 걸 좋아하는 아기 토끼가 있는데 위험하다 싶어서 제이든이 솔개를 쫓으려 하는데 마차 창문 밖으로 길쭉하고 흰 손이 쑥 나왔다.
“쫓지 마라, 내 친구야.”
솔개는 카티야가 내민 팔에 앉더니 반가운 듯이 목을 울렸다.
몸에 아무 표식이 없는 걸 보니 집배조는 아닌데 그래도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는구나.
솔개와 친밀한 사람은 처음 보는데, 하긴 매를 기르는 사람도 많으니까.
제이든이 마부석에서 뒤를 흘끔거리는 동안 잠시 카티야와 비둘기처럼 구구거리던 솔개는 다시 휙 날아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 * *
“오, 마침 오셨네. 제이든 씨, 덕분에 말의 다리에 상처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어요.”
어느새 치안대에 돌아와 있었는지 브루스가 반갑게 제이든 일행을 맞았다. 이 친구도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구나. 치안대원들 월급 많이 받아야 하겠다.
“수의사가 검진을 했는데 말 다리 관절 부분에 이런 쇳조각이 박혀 있었어요.”
다리에서 뽑아낸 쇳조각은 이미 증거물 보관실로 들어갔다지만 브루스가 손짓 발짓을 하며 묘사해 준 내용에 따르면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얇고 날카로운 세모꼴의 쇳조각이라고 했다.
“그런 게 우연히 말의 다리에 박혔을 확률은 거의 없지 않겠어요?”
브루스는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음, 베로데인의 흰 표범을 믿고 있던 브루스도 이제 사람의 범행일 가능성에 약간 무게를 두는 것 같다.
“만약 사람이 그런 거라면 같이 산에 갔던 로키나 제임스도 손을 쓸 수 있었겠지만 산으로 떠나기 전에 로버트가 말에 뭔가 조작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그 제임스라는 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주변 탐문을 해 보니 평판이 아주 나쁘던데.”
카티야가 뒤에서 제이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실리도 당기고 포이도 당기고 이제 카티야 양까지 옷자락을 당기네.
제이든이 카티야를 돌아보자 카티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 제임스라는 놈 말이야. 어딨는지 내가 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