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8화
16. 미녀와 야수(6)
“처음엔 로키가 앞장을 섰습니다. 표범을 본 자리로 안내하는 것처럼 보였죠. 그러다 점점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더니 아버지가 앞장을 서고 두 사람이 뒤를 따랐어요. 마치 제가 높은 산꼭대기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 장면이 잘 보였습니다.”
로버트는 세 사람이 숲속을 뒤지며 표범을 찾는 것을 보았다.
벼랑 근처까지 왔을 때 잭 페리헌트가 말에서 내려서 땅과 나무의 흔적을 살폈고 특별한 게 없었는지 다시 말에 오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말이 날뛰기 시작했고 미처 말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말을 계속하기 어려운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한참 만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말에서 떨어진 아버지에게 로키와 제임스가 다가가기에 당연히 아버지를 도우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 두 놈이, 아버지를 벼랑 밑으로 밀어 떨어뜨려 버리더라고요.”
로버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너무 선명했습니다. 마치 그 자리에서 제가 본 것 같았어요. 깨자마자 치안대로 달려갔죠.”
그는 겨우 숨을 가라앉힌 다음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꿈을 증거로 채택해 주지 않는다는 건 저도 알고, 치안대에서도 믿어 주지 않았지만 아침에는 그 꿈이 너무 선명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때 꾸는 꿈과는 전혀 달랐어요.”
그는 번쩍 고개를 들고 제이든을 바라봤다.
“감정사 선생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정말 봤다고요. 이건 분명히 돌아가신 아버지가 제게 사고의 진실을 보여준 거라고 믿습니다.”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말을 가려가며 대답했다.
“꿈과 환각이라면 저도 종종 겪는 일이라 절대 안 믿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만한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겠지요.”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너무 흥분해서 바로 치안대에 달려갔지만 꼭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고 말 겁니다.”
“일단 수색대가 조사하러 간다고 했으니 조사 결과를 기다려 보시죠.”
제이든은 로버트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카티야를 향했다.
“카티야 양, 저는 마리세트 거리에 있는 이분 댁으로 갑니다. 카티야 양 행선지를 알려 주시면 모셔다 드릴게요.”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카티야가 후드를 약간 올리면서 말했다.
“아실리랑 포이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나도 이분 댁에 같이 가면 안 될까?”
후드를 올린 카티야의 얼굴을 본 로버트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열심히 머리를 끄덕였다.
“되, 되, 됩니다. 얼마든지 오셔도 됩니다.”
이거 참, 무기가 따로 없네!
잠시 후 도착한 페리헌트 저택에는 뜻밖에도 아까 치안대에서 나간 로키 페리헌트가 먼저 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짐 챙기는 중이지. 정신 나간 사촌이 날 숙부 살인범으로 고발했는데 어떻게 이 집에 또 오겠어?”
로키의 집은 베로데인 시 외곽에 있지만 숙부 집에 자주 드나들고 사냥도 같이 다니고 하는 일이 많아 로키가 올 때마다 머무는 방이 따로 하나 있다고 했다. 옷이며 사냥 도구 등도 있고.
짐을 꾸리는 로키나 지켜보는 로버트나 서로에 대한 분노가 가득해 보였다. 브루스가 둘이 또 싸움이 붙을까 싶어 긴장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탓인지 싸움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이 사촌 형제는 원래도 사이가 좋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짐을 마차에 싣고 돌아온 로키가 거실 벽의 그림을 가리켰다.
“저 그림은 숙부님이 내게 주시기로 한 거 너도 알지? 지금 가져가도 될까?”
제이든은 거실 벽에 걸린 다이카의 ‘설산’ 그림을 쳐다보았다. 잘 그린 그림이지만 로버트의 말대로 모작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버지가 감정을 받아 보려고 의뢰하셨던데…….”
로버트가 제이든을 돌아보며 말하자 로키도 그제서야 제이든을 알아챈 듯 눈을 돌렸다.
“아, 의뢰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는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또 감정받을 필요가 있을까? 모작인 건 다 알잖아? 난 원래 이 그림을 좋아했고 숙부님과의 추억이 있어서 가져가려는 것뿐인데. 넌 이 그림 좋아하지도 않잖아?”
로버트는 잠시 망설이면서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저 그림을 로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건 맞습니다.”
제이든은 짐짓 엄숙한 얼굴을 하고 옷깃을 바로잡으면서 말했다.
“고인께서 제게 감정을 의뢰하셨으니 저로서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감정을 완료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도 감사하겠습니다.”
제이든과 로버트의 말을 들은 로키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이든은 그림 앞에 다가가 신중하게 그림을 살펴보았다.
일반적 감정 외에도 혹시 마법이라도 걸려 있지 않은지, 숨겨진 내력이 보이지는 않는지 안력에 힘을 주고 집중해 보았으나 특별히 나타나는 것은 없었다.
판매를 염두에 둔 위작과 다르게 화가의 서명을 위조하지 않았고 종이나 안료 등 사용한 재료도 옛날 것을 쓰거나 흉내 내지 않은 정직한 모작이었다.
벽에서 그림을 내려 뒷면까지 살펴본 후에야 제이든은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그림은 폴로 다이카의 ‘설산’을 모사한 그림입니다. 솜씨는 상당히 훌륭하지만 대가의 반열에는 이르지 못하고, 위작이 아니라 모작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 다이카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한 사람의 작품일 것입니다. 그림에 서명은 없지만 제가 보기에 네이슨 카마로가 아직 무명이던 시절, 그러니까 십오 년쯤 전에 그린 그림인 듯합니다.”
네이슨 카마로는 늦은 나이에 뒤늦게 이름을 얻기 시작한 화가인데 무명 시절이 길었다.
그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고 은행에 근무하는 틈틈이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화가였다. 전문 화가가 되기 전에는 그림 동호회에서 활동했는데 폴로 다이카와 모데로티스를 존경해서 그들의 그림을 많이 모사했다.
“모작이긴 하지만 좋은 그림이네요. 네이슨 카마로가 확실히 재능 있는 화가임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원작을 모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 역시 보이고 있네요. 이때부터 네이슨 카마로의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무명 시절의 그림이고 모작이라 값이 많이 나가지는 않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소장하셔도 될 만한 그림입니다.”
제이든의 말이 끝나자 로키가 즉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제가 가져가도 되겠죠? 숙부님이 아끼시던 그림인데 이걸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집에 두고 싶지 않네요.”
그림을 향해 손을 내미는 로키를 제이든이 살짝 저지했다.
“조금만 더 살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림을 하루만 저한테 맡겨 주시죠.”
제이든은 이 그림에 의료용 투시 광선을 한 번 쪼여 보고 싶었다.
저택에 오기 전 말만 들었을 때 그림이 이중 그림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죽은 잭 페리헌터가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라지만 3급 감정사가 이미 모작이라고 감정해 준 그림을 자신에게 다시 감정 의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림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거나, 아니면 더 가치 있는 그림이 뒤에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잭 페리헌터에게 제이든을 소개해 준 사람은 베로데인이 속한 다린토스 영지의 집행관이었는데, 지난 봄 영지에서 발굴된 유물 감정을 제이든이 맡았을 때 함께 일했었다.
그때 이중 그림이 한 점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림은 평범한 풍경화였는데 안쪽에 거장 유센토르의 명화가 숨어 있었다.
‘안쪽 그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겉면의 그림을 세심하게 벗겨내느라 상당한 고생을 했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
제이든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얼마 전 ‘해변의 기수’로 인해 알게 되었던 키타이너의 내력도 떠올렸다.
그림의 뒤에 다른 그림이 숨어 있는 경우 의료용 투시 광선을 쏘여 보면 안쪽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방법을 찾아낸 것은 세시온 다미에르인데 그로 인해 그때까지 극도로 분간이 어렵던 키타이너의 위작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키타이너는 자신이 그린 위작에 매번 표식을 남겼는데, 그림의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새끼 손톱만 한 토끼 형상을 찍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초록 나뭇잎 사이에 초록 안료로 그려넣어 놓거나 그림 가장자리의 불분명한 부분에 같은 색으로 찍어 놓거나 해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극도로 어려웠다.
그런데 그림에 투시 광선을 쏘여 보면 토끼 부분만 반짝일 뿐 아니라 키타이너의 서명이 명확하게 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키타이너는 백연(白鉛)으로 미리 서명을 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의료용 투시 광선을 쏘이면 그림 안쪽의 서명이 보이는 것이다.
세시온 다미에르가 이 방법을 찾아낸 이후에야 키타이너의 위작을 명확하게 가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값진 그림을 평범한 그림 안에 숨겨 유통하는 밀매업자 등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제이든의 경우는 좀 달라서 위작이나 모작 안쪽에 명화가 있다면 제이든은 투시 광선 없이도 그 명화에서 피어오르는 아우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쪽 그림이 아우라를 뿜을 수 없을 정도의 범작이라면 제이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페리헌트 저택의 ‘설산’ 모작에서는 아우라를 느낄 수 없었다. 안쪽에 설령 그림이 있다 해도 가치 있는 명작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도 제이든은 이 그림에 투시 광선을 한 번 쏘여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시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감정을 의뢰하셨으니 로키에게 줄 때는 주더라도 감정은 완료하고 싶네요.”
로버트의 말을 들은 로키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럼 감정이 끝나면 그림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연락 주십시오.”
로키가 떠난 후 일행은 로버트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아실리와 포이도 식탁 아래쪽에서 각자 먹을거리를 받았다.
“사촌분이 저 그림에 꽤 애착이 있으신 것 같네요.”
“그게 좀 이상하단 말입니다. 원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림이나 예술품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아버지와 로키는 사냥을 좋아했지요. 저는 사냥을 싫어해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로버트는 수프를 뜨면서 말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장사를 맡은 건 접니다. 로키는 아버지 따라 사냥이나 다니곤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저 그림을 사 왔는데 유난히 저 그림을 좋아하더군요. 액자도 로키가 해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끼시니까 비위를 맞추느라 그러나 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가끔 마음에 드는 예술품이 있는 법이다. 그게 꼭 명품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이고.
“유언장에 따르면 아버지는 로키에게 2만 골드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꽤 넉넉한 편이죠. 로키가 부모님을 일찍 잃었다고 늘 안쓰러워하시고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셨으니까.”
로버트는 입맛이 없는지 숟가락을 놓았다.
“유산도 괜찮고 그림도 로키가 가져도 전 괜찮습니다. 로키가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되지만 않았다면요.”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꿈에서 본 것처럼 로키가 아버지를 벼랑으로 민 거라면 죽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아껴 주셨는데, 아들인 저보다도 더요.”
그때 식당 창문을 누군가 똑똑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언제 왔는지 비둘기 토리가 부리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브루스가 재빨리 창을 열고 토리의 다리에 묶인 통에서 서신을 꺼냈다.
“수색대에게서 소식이 왔네요.”
#작가의 말
작중 키타이너의 백연 서명 이야기는 영국 위작가 톰 키팅이 실제로 캔버스에 백연으로 서명을 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을 모티브로 썼습니다.
그림에 X-선을 쪼이면 백연 서명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