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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47화 (4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7화

16. 미녀와 야수(5)

표범에게 쫓기다 벼랑으로 떨어졌다는 은퇴한 엽사 출신 모피 상인, 사고의 목격자는 조카와 고용한 엽사라고 했었다.

“아들이 고발했다면 증거는 있는 건가? 혹시 조카를 먼저 도망치게 하고 후미에 남은 게 아니라 조카가 숙부를 일부러 사지에 몰아넣었다는 거야?”

“글쎄요. 토리 편 서신에 그렇게 자세한 내용까지는 없고요. 아무튼 빨리 귀대하라고 합니다.”

선임 치안대원에게 대답한 브루스가 제이든에게 다가왔다.

“저희는 카토 씨를 데리고 바로 베로데인 치안대로 귀대할 거고요. 의사 선생도 동행할 겁니다. 제이든 씨와 뒤에 계신…….”

그는 제이든의 뒤에 일행처럼 서 있는 카티야에게 모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뒤에 계신 숙녀분은 어떻게 하실 건지요? 베로데인으로 가실 거면 저희와 동행하시는 게 안전하실 것 같고 다레인이나 실버로드 쪽으로 돌아가신다면 굳이 호위는 필요 없을 듯하니 여기서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베로데인에 감정 의뢰가 한 건 있습니다. 베로데인에서 의뢰를 처리하고 나면 루스타운을 거쳐 브리오로 갈 예정입니다. 카티야 양은요?”

제이든이 그녀를 돌아보자 카티야는 짧게 대답했다.

“베로데인.”

“좋습니다. 그러면 다 같이 출발하도록 하죠.”

돌아서려던 브루스는 다시 제이든에게 물었다.

“제이든 씨, 베로데인 어디로 가시나요?”

“마리세트 거리의 잭 페리헌트 씨 댁입니다. 그림 감정 의뢰를 받았습니다.”

브루스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거 참 공교로운 우연인데요.”

“예?”

“그게…….”

브루스는 제이든에게 바짝 다가서면서 소리를 낮췄다.

“사망한 모피 상인 말입니다. 표범에 쫓기다 추락사한 걸로 알려졌다가 오늘 아침에 그 집 아들이 목격자인 조카를 고발했다는 전직 엽사요.”

“예.”

“그 사망자가 바로 잭 페리헌트입니다.”

* * *

덜커덩, 마차가 흔들렸다.

“피잇!”

제이든의 옆에 마치 사람 어린애처럼 뒷발로 일어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포이가 뒤로 통 구르면서 뒷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고꾸라졌다.

“포이, 괜찮아?”

“피이잉.”

생각에 빠져 있던 제이든은 포이가 구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포이를 일으켜서 무릎에 앉혔다.

제이든의 다리에 턱을 얹은 채 엎드려 있던 아실리가 머리를 조금 움직여 포이가 앉을 자리를 내 주었다.

“포이잉!”

금방 넘어졌는데도 포이는 다시 창밖이 보고 싶은지 제이든의 무릎에서 발딱 일어섰다.

“넘어질라. 조심해, 포이.”

깃이 고운 새가 나뭇가지에서 마차 옆을 스칠 듯 날아서 지나가고 길 근처에 있던 갈색 토끼 몇 마리가 숲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포잇, 포잇!”

“그래, 토끼지? 털 색은 달라도 우리 포이 친구들이네.”

“포이잉.”

치안대 마차에 선임 치안대원과 카토, 의사, 또 한 명의 치안대원이 타고 앞장을 섰고, 제이든의 마차 안에는 아실리, 포이, 카티야가 제이든과 함께 타고 브루스가 마부석에서 베로를 몰고 있었다.

제이든이 마차를 몰겠다고 브루스에게 안에 타라고 했지만 브루스가 질색을 하며 사양했다.

“고양이랑 토끼, 게다가 저런 얼음 미녀랑 마차 안에 타라고요? 그냥 제가 말을 몰게요.”

“아실리랑 포이는 나랑 마부석에 타도 되는데요.”

“헉, 그럼 저 여자분이랑 저랑 둘이 마차 안에 있으라고요? 베로데인까지 세 시간을? 너무 부담스러워요. 제이든 씨, 저는 약혼녀가 있다고요.”

내외하는 조선 남자도 아니고, 약혼녀가 있다고 다른 여자랑 마차에 못 탈 게 뭔가 싶긴 했지만 어쨌든 브루스가 얼굴까지 빨개지며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브루스가 마부석에 앉고 제이든이 마차 안에 탔다.

그래서 지금 마주보는 좌석에 앉아 있는 카티야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간밤에 잠이 부족해서 깜빡 졸다가 침이라도 흘렀나?

아실리의 자세를 편하게 해 주고 포이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않게 붙잡는 등 단속을 하다 말고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는 제이든을 보고 카티야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아니, 그냥, 내 모습을 보면서 딴짓하느라 바쁜 남자는 오랜만이라서.”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다니.

하지만 그게 또 위화감 없이 납득되는 게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한 외모인 것이다.

“의뢰인이 사망해 버려서 심란한가 봐?”

“예, 좀 그렇지요.”

제이든은 마차의 창 너머로 지나가는 다린토스 산의 숲을 보면서 창틀에 턱을 괴었다.

“안면은 없는 사람이고, 원래는 거절할까 했던 의뢰인데 올 봄에 베로데인 들렀을 때 신세를 졌던 분이 소개를 해서 수락한 의뢰인데 말예요.”

의뢰인이 사망해 버렸으니 일을 안 맡아도 그만이긴 하지만 잭 페리헌트는 이미 제이든에게 계약금을 입금했다.

그리고 제이든도 이 표범 출몰 사건에 좀 관심이 있었다.

“저거, 카토 씨의 마차네요.”

산으로 올라온 지 삼십 분쯤 됐을까. 길에서 벗어난 숲길 안쪽에 카토의 짐마차가 서 있었다.

주변에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노랗게 반짝이는 줄이 아니라면 언뜻 못 보고 지나갈 수도 있을 만한 으슥한 자리였다.

치안대에서 범죄 현장 등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쓴다는 방어 마법 밧줄인데 제이든도 말만 들었지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차를 저 자리에 세운 것은 아마 카토일 것이었다.

나무 밑에 얌전하게 세워져 있는 걸 보면 카토가 뭔가에 놀란 것은 마차를 세운 다음일 것이다. 애당초 카토는 왜 마차를 길 밖으로 빼서 숲 안쪽에 세웠을까?

산에서 올라온 지 삼십 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라 쉬어 간다기엔 애매한 자리였고 혹시 용변이 급했다면 저렇게 안쪽에 세울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내려서 카토의 짐마차 부근을 한 번 보고 싶었지만 앞에 가는 치안대원들의 마차가 멈추지 않았기에 계속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산꼭대기 부근까지 이르자 마부석에서 브루스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

“제이든 씨, 저기가 표범이 나왔다는 자리예요. 저쪽으로 쭉 들어가면 바위 벼랑이 나와요. 이 산에서 그나마 제일 험한 지역이지요.”

제이든이 창밖으로 목을 빼자 포이가 발돋움을 하면서 밖을 내다보고 아실리까지 일어나서 바깥을 쳐다봤다.

사람과 고양이와 토끼가 한꺼번에 창에 몰려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보고 앞에 앉아 있던 카티야가 마치 고양이처럼 목을 울리면서 웃었다.

조금 부끄러워진 제이든이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아실리와 포이도 제자리에 앉혔다.

그들 일행은 정오가 되기 전에 베로데인 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낮이기도 했지만 가는 동안 보인 것은 작은 동물들뿐이었고 표범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일단 치안대에 들렀다가 카토는 의사 동행하에 병원으로 가기로 했고 제이든은 의뢰인의 집에 갈 예정이었다.

마차를 치안대 뒤쪽 공터에 세우고 내리려 하자 카티야가 제이든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안쪽은 번잡스러울 테니 난 여기 있을게. 토끼랑 고양이랑 같이.”

아실리도 야아옹 울면서 동의하기에 제이든은 그녀에게 아실리와 포이를 부탁하고 브루스를 따라 치안대 건물로 향했다.

문을 밀고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요란하게 서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자 두 명이었다.

“아니 내가 유산을 받으면 얼마나 받는다고 삼촌을 죽이냐고요! 유산 때문이면 로버트 저놈이 더 동기가 있겠지요.”

“발자국도 없는 표범 이야기를 꾸며내서 아버지를 한밤중에 산에 데리고 간 게 너잖아. 험하지도 않은 다린토스 산에서 아버지가 벼랑에 떨어질 리가 있어? 말 타는 게 귀신 같은 분인데.”

“허 참, 표범을 나 혼자 봤냐고! 저번에 곡물 행상인도 봤고 이번에 산에 같이 간 제임스도 봤는데!”

얼굴이나 분위기가 닮은 게 친척 관계가 분명해 보이는 두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는데 둘 다 덩치가 크고 힘도 좋아서 치안대원들이 뜯어말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 제임스란 작자는 어딜 간 거야? 어제 낮까지만 해도 시내에 있었다더니 왜 내가 고발하자마자 자취를 감췄냐고? 뭔가 꿀리니까 숨어 버린 거 아냐?”

“그자가 어디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갖다 붙이지 좀 말라고!”

싸우고 있는 두 남자를 떼어놓은 치안대원들이 먼저 조카라는 자에게 사람을 붙여 귀가시켰다.

고인의 아들이라는 로버트 페리헌트는 다른 방에 끌려들어가 다른 치안대원을 상대로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유리창은 있었지만 방음이 된 방인지 바깥에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카토가 의사와 함께 병원으로 출발한 후 제이든은 브루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브루스 씨, 저기 로버트 페리헌트랑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 돌아가신 부친의 의뢰를 받고 여기 온 거라서 말입니다.”

“예. 잠깐 대장님께 여쭤 보고요.”

치안대장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온 브루스가 제이든을 로버트 페리헌트가 있는 방에 안내했다.

제이든은 로버트에게 우선 조의를 표한 후 입을 열었다.

“페리헌트 씨, 감정사 제이든 로스라고 합니다. 부친께서 그림 감정을 의뢰하셔서 베로데인에 왔는데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로버트 페리헌트는 제이든의 말을 듣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악수를 청했다.

“예, 로스 감정사님께 의뢰서를 보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렸지만요.”

“?”

“2급 감정사님이 감정하실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동물이나 모피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예술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거든요. 감정을 맡기시려고 했던 그림은 다이카의 ‘설산’인데 누가 봐도 모작입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셔서 거실에 걸어 놨지만…….”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까 보셨던 제 사촌 로키가 아버지 비위를 맞추느라고 그 그림을 매번 칭찬하니까 혹시 하고 감정을 받아 보시려고 한 겁니다만 사실 이미 3급 감정사가 모작이라고 감정한 적이 있는 그림입니다. 아버지가 고집이 세셔서 믿질 않고 일류 감정사한테 한 번 더 감정을 받아 보겠다고 로스 감정사님께 편지를 한 겁니다.”

로버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게 두는 건데. 감정받고 싶으면 받는 거지 그게 뭐라고 아버지 기분 상하게 핀잔을 줘가면서 말렸는지.”

그는 목이 메는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표범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난 알아요.”

동석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로버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자, 로버트 씨, 말씀은 알았는데 증거도 없이 로버트 씨 말만으로 로키 씨를 체포할 수는 없어요. 꿈을 증거로 채택할 수도 없고요. 잠시 후에 수색대가 산에 올라가니까 면밀하게 조사를 해 볼 겁니다. 수사 경과는 알려드릴 테니 일단 댁에 돌아가서 쉬세요.”

“제가 모시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부친께서 의뢰하신 그림도 한 번 보고 싶은데요.”

제이든이 로버트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아버지가 의뢰하셨던 그림이니 뒤늦게라도 감정사님이 봐 주시면 아버지도 좋아하실지도 모르고.”

“예. 제가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아, 그런데 제가 치안대에 영업마차를 타고 왔습니다. 치안대 분들께는 아까 말씀드렸지만 간밤에 꾼 꿈 때문에 손이 떨려서 말을 몰 수가 있어야지요. 실례지만 저희 집까지 영업마차로 모셔야겠네요.”

“아니 제 마차가 있으니까 그걸 타시죠. 대여 마차긴 하지만.”

제이든이 로버트를 마차로 안내하는데 브루스가 쫓아나왔다.

“대장님이 함께 가라고 하셔서요.”

브루스가 마부석에 앉고, 제이든을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선 로버트는 고양이와 토끼, 그리고 후드를 코밑까지 내린 여자가 이미 마차 안에 있는 걸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일행입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무척…… 독특한 일행이시군요…….”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지나가는 말로 들었는데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증거로 채택할 수 없는 꿈이란 게 뭡니까?”

로버트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제이든을 쳐다봤다.

“실은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꿈이 잘 맞는 편입니다. 그런데 간밤에 갓 그린 그림처럼 뚜렷한 꿈을 꾸었거든요.”

그의 꿈속에 나타난 것은 다린토스 산이었다.

자신은 산꼭대기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아래에서 아버지와 로키, 제임스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다린토스 산 안쪽을 수색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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