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6화
16. 미녀와 야수(4)
마차 안에서 잠들어 있던 제이든은 무심코 돌아누우려다가 눈을 떴다.
마차 좌석을 최대한 젖히고 자리를 만들어 누웠지만 아무래도 다리를 충분히 펴지 못했고 돌아눕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옆구리에 붙어 자고 있는 아실리와 포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마차 밖으로 나왔다.
달을 보니 아직 한밤중이다. 날이 새려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팔다리를 쭉쭉 펴면서 몸을 좀 풀어 주는데 뭔가 희끗한 것이 눈에 비쳤다.
다린토스 산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언덕길, 크림색 로브를 걸친 뒷모습이 산 위쪽을 향해 가는 것이 언뜻 보였다.
‘카티야 양인가? 설마 이 밤중에 혼자 산에 올라가는 거야?’
불러 보려고 했을 때는 흰 그림자가 이미 나무에 가려 보였다 안 보였다 하기 시작했다.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 산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니 겁도 없이 이 시간에 혼자 산에 올라가다니.
말려서 데리고 내려올 생각으로 걸음을 재게 놀렸지만 흰 그림자는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처음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던 자리에 이르렀을 때는 흰 그림자는 이미 산모롱이를 돌아가 버린 후였다.
아니 무슨 걸음이 저렇게 빨라.
숨을 몰아쉰 제이든이 더 따라가 봐야 하나 망설일 때 등 뒤에서 나직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야옹!”
“아실리?”
돌아보자 언제 잠에서 깨어 따라왔는지 아실리가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따라가지 마.
제이든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표범이 나온다잖아. 설령 표범이 안 나온다 해도 밤길인데 여자 혼자 산에 오르는 건 위험하고.”
-그 사람은 괜찮아.
제이든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아실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실리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 카티야 양, 보통 사람이 아닌 거구나?”
-으응.
“마법사야? 옷차림을 보면 그런 느낌도 드는데.”
-글쎄. 짐작가는 게 있긴 한데 아직 확실하진 않아. 그치만…….
아실리는 뭔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한 번 잠에서 깨고 나니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아실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산에 올라간 카티야도 아무래도 걱정이 되고.
조금 졸다 깨다 하던 제이든은 아예 일어나서 주변을 가볍게 달린 뒤 맨손 체술 품새를 반복하며 몸을 풀었다.
감정사는 물론 지식과 책상 일이 주가 되는 직업이지만 체력 단련 또한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아실리는 제이든에게 처음 수련 때부터 꾸준히 체력 단련을 시켰다.
세시온 다미에르의 서재에는 체술이나 무술에 관한 자료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는데 제이든은 아실리가 추천하는 자료에다 한국에서 꽤 오랫동안 배웠던 태권도를 접목해서 나름대로 개인 운동 루틴을 만들어 꾸준히 몸을 단련해오고 있었다.
마부석에 엎드려 제이든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아실리가 하품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제이든은 혼자서 열심히 동작을 이어갔다.
“포이잉!”
한 시간쯤 몸을 풀고 마칠 준비를 하는 참인데 마차 창문으로 까만 귀 두 개가 쫑긋 올라왔다.
“포이 깼어? 아직 날 밝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시끄러워서 깼어?”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부산스러웠는지 포이가 깨 버린 모양이다.
까만 귀가 마차 창문 위로 폴짝폴짝 올라왔다 내려왔다 몇 번 하더니 하얀 털북숭이 얼굴이 창문 위로 쏙 나타났다.
.낑낑 뽀시락거리며 창문 위로 기어오른 토끼가 네 발을 모아서 깡충 뛰어내리더니 제이든을 향해 통통 튀며 달려왔다.
안아 주려고 손을 내밀었더니 포이는 머리를 도리도리 젓고는 다시 폴짝폴짝 뛰었다.
“왜, 뭐?”
“피이잉!”
포이는 답답한 듯 깡충 뛰면서 뒷다리를 옆으로 쭉 뻗어 보였다. 짧은 앞발에 비해 뒷다리는 쭉 펴면 나름 길쭉한 편이다.
“?”
“포이잉!”
“이거 말이야?”
제이든은 좀 전에 하던 태권도의 옆차기 자세를 해 보였다.
“포잉, 포잉!”
좋아라고 깡충거리는 걸 보니 이게 맞는가 보다.
제이든은 하던 운동 자세를 계속하며 포이를 곁눈질로 보았다. 옆에서 신나게 같이 폴짝거리는 게 좋은가 보다.
“형아 운동하는 거 보는 게 좋아? 그럼 맘껏 봐. 자, 돌려차기도 보여줄게.”
“포잉, 포잉!”
달밤에 청년과 토끼가 같이 폴짝폴짝 뛰면서 이쪽으로 주먹을 뻗고 저쪽으로 다리를 차면서 놀고 있는 걸 누가 보면 병원에 가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 시원하다. 포이도 한밤중에 운동했네?”
제이든이 이마의 땀을 씻는데 조금 전까지 폴짝거리던 포이가 조르르 달려와서 제이든의 바짓가랑이에 얼굴을 묻었다.
“왜?”
“포잉…….”
포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제이든의 뒤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제이든이 뒤를 돌아보자 언제 돌아왔는지 산길에서 내려와 길에 서 있는 카티야가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아무것도 못 느끼고 토끼랑 뛰고 있었다니.
얼굴이 빨개진 제이든이 보니 카티야는 얼굴에 어렴풋이 웃음을 띤 채 포이를 보고 있었다.
“카티야 양, 괜찮습니까?”
“?”
여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산에 혼자 올라가셨잖아요. 밤중에. 그것도 표범이 나온다는데.”
“아아…….”
그제서야 납득이 간 듯 그녀는 가볍게 미소했다.
“괜찮다.”
카티야가 가까이 걸어오면서 후드를 머리 뒤로 젖히자 눈부신 은발과 보랏빛 눈동자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녀는 제이든의 다리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포이와 마부석에서 어느새 일어나 앉은 아실리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무척 재미있는 토끼와 고양이를 데리고 있네.”
그녀가 아실리를 바라보자 보랏빛 눈동자와 초록빛 눈동자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서더니 제이든을 훑어본 뒤 산아래집의 마당 쪽으로 걸어가면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사람도 재미있고.”
“?”
카티야는 웃음기가 어린 눈으로 제이든을 돌아보며 말했다.
“커피 한 잔 하려고 하는데 같이 하겠어?”
갑자기 말투가 부쩍 친밀해진 것 같았지만 제이든은 얼떨떨한 가운데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갔다. 아실리와 포이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엊저녁에 피웠던 모닥불은 꺼져 있었지만 장작을 몇 개 넣고 마른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붙이니 금방 불이 다시 살아났다.
제이든이 불을 피우는 동안 주방에 들어갔던 그녀가 커피 쟁반을 들고 나왔다.
“카티야 A. 알렉산드로브나.”
그녀가 커피잔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제이든 로스입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던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티야라면 풀네임은 에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인가요?”
“응.”
제이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주방 일이라곤 안 해 봤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의외로 커피 맛이 무척 좋았다.
“북부에서 오셨어요?”
“응. 아주 오랜만에 왔지.”
카티야는 북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옛날에 이쪽에 산 적이 있어. 다시 안 오려고 했는데 소문을 듣는 바람에 왔지. 오랜만에 메밀꽃도 보고 다린토스 산도 보고. 메밀꽃밭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다린토스 산은…….”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망가졌던데. 산을 더럽히는 헛소문도 나고.”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제이든의 옆에 있던 포이가 살짝 몸을 떨었다.
“괜찮아, 포이.”
제이든이 포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카티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귀여운 아이네. 포에니 토끼는 정말 오랜만에 봐.”
제이든은 흠칫 놀라서 반사적으로 포이를 몸으로 가렸다.
니콜레타가 포이에게 환영 마법을 걸어 준 이후 포이의 원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는데.
“괜찮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눈을 찡긋하는 카티야의 모습은 소녀 같았다.
아실리가 안심하라는 듯이 꼬리로 제이든의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포이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물게 있을 수 있다던 니콜레타의 말을 되새기면서 제이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티야는 그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구나.
“산의 헛소문이라면 무슨 소문 말인가요?”
“응? 당연히 표범 말이지.”
카티야는 새삼스럽게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표범이 헛소문이란 말인가요?”
제이든이 재차 묻는데 덜커덩 방문이 열리면서 주인 할머니가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구 벌써 일어났어? 커피도 알아서 끓여 마시고 있네?”
카티야는 재빨리 후드를 다시 쓰면서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 말하기 싫은 것 같아 제이든도 눈치껏 입을 다물고 불을 조금 더 지폈다.
날이 밝고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세수도 하고 아침 준비도 하는 중인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제시!”
말을 타고 달려온 소년이 미처 말을 세우기도 전에 뛰어내려서 울타리에 묶어 둔 제시의 목을 껴안았다.
제시가 기쁜 듯이 마주 푸르릉거리며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무사했구나, 제시!”
실버블로썸 여관의 노엘이 제시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다친 데는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카티야 양이 제시를 찾았다고 다리엔에서 비둘기를 보내 줘서 아침이 되자마자 달려왔어요. 카토 씨는 무사해요?”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난 노엘은 선임 치안대원을 향해 부탁했다.
“카토 씨는 오늘 베로데인 병원으로 가겠지요? 짐마차는 나중에 치안대에서 수습할 테지만 제시는 일단 실버로드로 데려가면 안 될까요? 제가 데리고 가서 잘 돌보고 있을게요. 나중에 카토 씨나 카토 씨 가족들이 오실 때까지 제가 돌보게 해 주세요.”
치안대원들은 잠깐 의논해 본 뒤 승낙했고 노엘은 기쁜 얼굴로 카티야와 제이든에게 인사를 한 후 타고 온 말의 안장에 제시의 고삐 줄을 걸고는 능숙하게 두 마리 말을 몰아 온 길을 돌아갔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말을 잘 다루네.”
치안대원이 감탄하면서 말을 이었다.
“원래 저 말도 베로데인까지 끌고 가서 공용 마구간에라도 맡겨야 할 뻔했는데 일을 덜었네.”
제이든도 공감하면서 카티야를 돌아보았다.
“카티야 양이 세심하시네요. 노엘이 말을 무척 아끼고 제시도 노엘을 좋아하니까 저기 맡기면 안심이지요.”
카티야는 눌러 쓴 후드 밑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노엘이 제시를 데리고 떠난 후 아침 식사를 시작한 일행이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다린토스 산 쪽에서 커다란 비둘기 한 마리가 마당으로 날아들어왔다.
목에 새파란 휘장이 달린 고리를 끼고 있는 게 일반 우편 집배조가 아니고 관용 비둘기였다.
“토리!”
비둘기를 발견한 브루스가 팔을 올리자 비둘기는 재빨리 그의 팔에 내려앉았다.
비둘기 다리에 묶인 서신을 꺼내 읽은 브루스가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나, 브루스?”
선임 치안대원이 묻자 브루스는 서신을 그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어제 저녁에 베로데인에 보냈던 서신에 대한 답신인데요. 카토 씨를 되도록 빨리 베로데인으로 이송하랍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뭐가 이상해?”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요.”
브루스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 엽사 출신 모피 상인 말입니다. 표범에게 변을 당한 피해자요. 그 집 아들이 오늘 아침 일찍 사촌을…… 그러니까 두 번째 목격자였던 상인의 조카 말입니다. 그 조카를 숙부 살해 용의자로 고발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