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5화
16. 미녀와 야수(3)
“아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됐지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는 사람입니까?”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어젯밤 같은 여관에 묵었습니다.”
제이든은 마차를 세워 놓고 카토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카토 씨, 무슨 일이에요?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우우우……, 표, 표…….”
카토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으로 덜덜 떨면서 어버버거리기만 할 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용없어, 그 사람 지금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해. 뭐에 놀랐는지 혼이 다 빠졌다니까.”
주인 노인이 뭔가 마실 것을 들고 나와 치안대원 두 명에게 나눠 주면서 말했고 치안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지금은 좀 안정된 겁니다. 아까는 훨씬 더 심했어요. 의사를 부르러 다리엔에 사람을 보냈는데 아직 안 왔네요.”
다리엔은 한 시간쯤 전 제이든이 지나온 농지 안쪽의 마을로 큰길에서 안쪽으로 많이 들어가야 하지만 여기서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주방에서 남편을 따라 나오던 할머니가 제이든을 보더니 반색을 했다.
“봄에 다녀갔던 총각 아녀? 고양이랑 같이 왔던?”
“예, 맞아요. 잘 지내셨어요?”
“우리야 뭐 늘 똑같지. 고양이는 어쨌어?”
“마차에 있어요. 잠깐 정리 좀 하고 들어올게요.”
산아래집에는 말이나 마차를 넣을 공간이 없기 때문에 제이든은 마차를 길 밖으로 빼고 베로도 풀어서 고삐 줄을 나무에 묶어 두었다.
“포이, 어떻게 할래? 집 안으로 갈래?”
포이는 마차 밖으로 머리를 살짝 빼고 눈을 굴리더니 얼른 머리를 도로 넣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낯선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 가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포이가 낯을 가리니까 우린 베로랑 같이 여기 있을게.
“그래, 그럼.”
아실리가 함께 있으니까 괜찮겠지.
베로와 아실리, 포이가 먹을 저녁거리와 물을 챙겨 준 뒤 제이든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카토 씨는 어쩌다 저렇게 된 건가요?”
마당에 있는 치안대원들에게 물었는데 집주인 노인이 먼저 손짓을 했다.
“내가 말해 줄게.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앉게.”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했던 듯한 노인은 동글뱅이 의자 비슷하게 생긴 나무토막 하나를 제이든에게 밀어 주더니 흥분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토는 몇 년 전부터 서너 달에 한 번은 꼭 여길 지나가는 사람이라 얼굴을 알지. 산 넘어갈 때도 들르고 다시 넘어올 때도 들르고 하니까.”
카토는 두 시간쯤 전, 오후 4시 경에 산아래집 앞을 지나갔다고 했다.
“사흘 전 밤에 표범에게 변을 당한 사람이 생겨서, 여기 치안대 양반들이 우리 집에 나와 입산 통제 중이었거든. 카토는 원래 산 넘기 전에 우리 집에 들러 요기라도 하면서 잠시 쉬어 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바로 산으로 올라가더라고.”
“여기 치안대 양반이 표범 얘기를 했더니 코웃음을 치던데. 아직 밝은 낮이라 괜찮다면서 그냥 갔어.”
“내 볼 땐 마차 안에 누가 있는 거 같기도 하던데, 자꾸 마차 안을 흘끔거리는 게.”
“아니야, 자기 혼자라고 했어.”
노부부는 번갈아가며 말을 이었고 치안대원도 말을 얹었다.
“표범 얘기를 했지만 낮이라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길래, 해 저물기 전에 산 넘어갈 만한 시간대여서 저도 굳이 붙잡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도 못되어 카토가 말도 짐마차도 버린 맨몸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산을 뛰어내려왔다는 것이다.
“아주 제정신이 아니었어. 달래고 얼러서 겨우 몇 마디 말을 들었는데 표범, 표범 하면서 횡설수설하더라니까.”
무장한 치안대원 둘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 봤더니 마차는 길 한쪽 옆 숲속에 좀 들어간 채로 세워져 있었는데 싣고 있던 고급 식기며 가재도구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표범에 놀란 거라면 밝은 낮에 표범이 나온 건 처음인데, 일단 내일 수색이 예정되어 있어서 짐마차는 그냥 두고 내려왔습니다.”
제이든은 걱정스럽게 산 쪽을 바라보았다. 마차만 있고 말이 없었다고?
제시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놀라서 도망가 버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마차에 묶인 말이 도망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카토를 힐끗 보았다.
.정말 표범을 만난 거라면 이 인정머리 없는 작자가 도망치기 전에 말을 풀어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을 미끼로 던져 주고 제 몸만 살아나왔으면 모를까.
하기야 사람 목숨이 우선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발자국이나…… 핏자국 같은 거라도 있었나요?”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묻자 치안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살펴보진 못했지만 그런 건 없었습니다. 워낙 잘 다져진 마른 길이라 마차처럼 무거운 바퀴 자국이나 남을까 동물 발자국은 안 남을 거 같기도 하고요. 길에서 벗어난 숲 쪽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 베로데인에서 엽사들이 와서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말발굽 소리와 마차 구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자그마한 승용 마차 한 대가 산아래집 문 앞에서 멎었다.
마부석에서 치안대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뛰어내렸고, 한눈에 보아도 의사인 듯한 안경을 쓰고 왕진가방을 든 사람이 마차 안에서 나와 급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어? 제이든 씨!”
마차를 몰고 온 젊은 치안대원은 제이든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봄 실버로드를 거쳐 베로데인에 들러 일을 볼 때 얼굴을 익힌 브루스라는 젊은이였다.
“베로데인 가는 길이에요?”
“예, 그런데 통제중이라 오늘은 못 가겠네요.”
“그러게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브루스는 말을 울타리에 묶으면서 뒤쪽을 계속 보았다. 누가 따라오나 싶어 길 뒤쪽을 보던 제이든은 깜짝 놀랐다.
길 저편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은 기다란 크림색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여자였다.
“카티야 양?”
“아는 사람이에요?”
“예……. 그리고 말도 아는 말인데요?”
제이든은 중얼거리듯 대답하면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말과 여자를 바라보았다. 카티야를 태우고 흔들흔들 다가오는 몸집 작은 말은 제시였다.
“어제 같은 여관에 묵었던 분이에요.”
“아하.”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의사 모시고 오는데 길에서 만났어요. 베로데인 가는 중인가봐요. 저는 급하니까 앞질러 왔지만 입산 통제중이라고 말은 했어요.”
제이든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이상한데?
카티야는 실버로드에서 도보로 출발했다. 아무리 걸음이 빠르다 해도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올 수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제이든은 오는 길에서 그녀를 보지 못했다. 도로를 타지 않았거나 중간에 다른 마을에 들렀다면 못 볼 수는 있지만 속도가 맞지 않는데…….
그리고 어떻게 제시를 타고 오는 거지? 두 시간쯤 전에 다린토스 산에서 사라진 제시가 왜 저쪽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제이든의 앞에 도착한 카티야가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다리엔 근처에서 헤매고 있길래 데려왔다.”
필립의 말대로 자연스러운 반말이었는데 생각보다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제시의 고삐를 울타리에 걸치는데 제시가 울타리 안쪽을 넘겨다보면서 끙끙거렸다.
“쯧!”
나직이 혀를 찬 카티야가 고삐를 놓아 주자 제시는 얼른 마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 이 말이 왜 안으로 들어와?”
치안대원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제시는 열려 있는 방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의사의 진료를 받고 있는 카토를 향해 걱정스러운 듯이 코를 울리는 제시를 보자 마음이 뭉클해진 제이든이 따라 들어가서 제시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네 주인은 무사해. 많이 놀란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나가자.”
제시는 카토를 다시 한번 보더니 순순히 제이든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베로 옆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물과 먹이를 주는 제이든의 뒤에서 카티야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것도 주인이라고, 쯧!”
제이든도 동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건초와 물을 챙겨주고 일어서서 제시의 마른 등을 쓰다듬었다. 매를 맞은 흉터가 여기저기 손에 만져졌다. 이런데도 제시는 저 못된 주인을 걱정하는구나.
개나 말, 고양이 등 동물들이 주인에게 가지는 의리는 때로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 * *
“카토 씨는 너무 공황 상태여서 일단 진정제로 재웠습니다. 신체적으로는 산에서 내려올 때 넘어져 다친 찰과상 정도 외에는 외상도 없고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제가 그쪽 전문의는 아니지만 한동안 요양이 필요할 듯합니다.”
의사의 말을 들은 선임 치안대원이 물었다.
“큰 병원으로 빨리 이송해야 하는 상태는 아닙니까? 그러면 베로데인으로 가야 할 텐데 이미 날이 어두워진 터라…….”
“내일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일단 푹 재우도록 하죠.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다들 오늘 밤은 여기서 묵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 간단한 식사를 한 뒤 잠자리를 정했다.
“아가씨는 안방에서 자요.”
안방에서 주인 할머니와 카티야가 자고 손님용 방 둘 중 하나에는 의사와 카토, 선임 치안대원, 다른 방에 브루스와 치안대원 또 한 명, 주인 할아버지가 자기로 했다.
세 명 누우면 꽉 차는 방인 데다 아실리와 포이가 있어 제이든은 마차에서 자겠다고 했다.
밤이 되니 산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이 찼다.
브루스가 마당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자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둘러앉았고 주인 노부부가 차와 커피를 내왔다.
.카티야도 조용히 제이든 옆에 앉아서 커피잔을 손에 들었고 아실리가 어느새 마차에서 내려와 반대쪽 옆에 붙었다. 포이는 자는 모양이었다.
“다린토스 산에 표범이라니 대체 몇십 년 만에 듣는 이야기인지.”
처음 표범을 봤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은 두 달쯤 전이라고 했다. 밤에 산을 넘던 곡물 행상인이 혼비백산해서 마차를 달려 베로데인으로 들어온 날이었다.
“그때 마침 제가 야간 당직이어서 진술을 받았는데요. 산 중턱을 넘을 때쯤 큰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었답니다. 그 행상인은 다린토스 산을 넘어 다닌 지가 이미 십여 년이 넘어서 밤에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는데, 그런 울음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대요.”
젊은 치안대원은 모닥불에 손을 쪼이면서 말을 이었다.
“다린토스 산에 맹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울음소리를 들으니 무섭잖아요. 긴가민가 하면서 가는데 뒤쪽 숲속에서 뭔가 계속 부스럭거리며 따라오는 거 같더래요.”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빨리 모는데 숲속에서 갑자기 불이 두 개, 확 켜지더랍니다.”
두 개의 붉은 등이 번쩍 켜지는 순간 곡물 상인은 그것이 맹수의 눈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음 순간 나무들 사이에서 표범의 흰 몸과 은빛 반점이 스쳐 보였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죽어라 말을 재촉하며 달려서 산길을 내려갔고 베로데인에 도착하자마자 치안대로 직행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분명히 표범을 봤다고 맹세를 했지만 사실 그때 우리는 안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인이 맹수를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고 술도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였거든요. 큰 고라니라도 보고 표범이라고 겁을 먹은 거겠지 했어요.”
“진짜 표범을 만났다면 곡물을 잔뜩 실은 무거운 마차를 멀쩡하게 끌고 산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겠나 싶기도 했고요. 금방 따라잡혔을 텐데.”
어쨌든 제보가 있었으니 다음 날 낮에 치안대원들 몇이 산에 올라가 보았다.
길 옆 풀숲을 따라 뭔가 지나간 흔적이 있기는 했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동물의 털 같은 것도 있고 발자국 같은 것도 있기는 했으나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발자국이 잘 남을 만한 토질이나 날씨도 아니었고.
“일단 우리가 그 곡물 상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조사하지 않은 것도 있기는 합니다.”
치안대원은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 이후 맹수를 봤다거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곡물 상인이 술김에 졸다가 헛것을 봤겠거니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또 표범을 봤다는 사람이 나왔다. 이번엔 술을 먹지도 않았고 실버로드에 메밀꽃을 보러 다녀오던 베로데인 주민이었다.
게다가 이번 목격자는 동물을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엽사 출신인 숙부를 따라 사냥을 다녀 본 경험이 많은 이였다.
“분명히 봤다는 겁니다. 확실히 흰 표범이었다고 했어요. 숲속에서 눈을 번쩍이고 있다가 천천히 따라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낮에 가 보니 역시 발자국은 없었어요.”
목격자가 두 명이 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오래전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바람처럼 움직이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베로데인의 흰 표범.
“하지만 전설 속 베로데인의 흰 표범은 베로데인과 다린토스 산을 지켜주는 존재 아니었어요?”
“그렇지. 사람도 동물도 지켜주는 영수였는데. 선한 이에겐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겐 벌을 내린다는.”
집주인 노인은 말을 하면서 카토가 있는 방 쪽을 힐끔 보았다.
표범이 나왔다면 잡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베로데인의 흰 표범이 돌아왔다면 오히려 반길 일이라는 사람들도 있는 와중에 세 번째 목격자가 나왔고, 이번엔 사람이 죽었다.
“바로 사흘 전 일이고 아직 쉬쉬하는 중이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피해자는 두 번째 목격자의 숙부인 은퇴한 엽사였다.
젊어서 엽사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이후 모피 사업으로 성공해 부유한 은퇴 생활을 누리고 있었는데 조카의 목격담을 듣고 산을 올랐다가 변을 당했다.
“혼자 표범을 잡으러 갔다가 당했다는 말인가요?”
“목격자인 조카와 고용한 엽사 한 명까지 세 명이 갔었답니다. 사인은 낙사입니다. 말에서 떨어져 벼랑으로 굴렀어요. 같이 갔던 사람들 말로는 표범이 공격했는데 조카와 동료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아 후미를 막았다는군요.”
옆에서 가볍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났다.
제이든이 돌아보자 카티야가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후드 밑으로 보이는 모양 좋은 입술이 냉소적으로 살짝 비틀어진 게 보였다.
“사상자가 나와서 영주님 명으로 사흘간 엽사들을 모아 전문 수색 팀을 꾸렸거든요. 내일 대대적으로 수색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오늘 피해자가 한 명 더 나왔네요.”
브루스도 카토가 있는 방 쪽을 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랑이가 됐든 표범이 됐든 뭔가 산에 있다면 내일 찾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