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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44화 (44/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4화

16. 미녀와 야수(2)

잠깐 숨을 멈추었던 제이든은 그녀가 천천히 길 쪽으로 걸어나오는 걸 보고서야 다시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구나.’

잠시 요정이나 정령이 현세에 강림한 줄 알았다.

혹시 엘프가 아닌가 귀를 보았는데 뾰족하지는 않았다. 아마 이 여자가 메밀꽃을 보러 왔다는 손님, 카티야인가 보다.

제이든은 아까 미녀를 보기 위해 식당에 몰려 있었다는 남자들을 속으로 은근히 우습게 여겼던 것을 반성했다. 그럴 만도 했구나.

미녀라면 제이든도 꽤 많이 봤다.

일 때문에 귀족 저택에 갔을 때 미모가 뛰어나다는 귀족 아가씨들을 본 적도 있고, 가깝게는 톰슨 골동품상의 이노시카 톰슨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문관국의 마법사 레노아도 길에서 마주치면 누구라도 돌아볼 만큼 이국적인 미인이었고.

그런데 메밀꽃밭의 여자는 그냥 미녀라고 형용하기엔 부족한 압도적인 신비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밤바람이 춥지도 않은지 민소매 원피스 밖으로 길쭉한 팔을 그냥 드러내 놓고 걸어나온 여자는 꽃밭 밖으로 나와서야 손에 들고 있던 로브를 툭툭 털더니 머리부터 후드를 뒤집어썼다.

저런 미모라면 가려야지, 암, 그냥 드러내 놓고 다니면 얼마나 피곤한 일이 많겠어.

제이든은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자가 제이든을 힐끗 보았다.

후드 아래에서 금빛과 연보랏빛이 섞인 듯한 눈동자가 잠시 그를 주시하더니 그에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실버블로썸 쪽으로 걸어갔다.

제이든은 메밀꽃을 바라보며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자신도 실버블로썸으로 돌아갔다.

“우리 꼬맹이들, 밥도 안 먹고 잠만 자?”

-제이든이 꺼내 놓고 간 거 조금 챙겨 먹었어. 뭐 간식 갖고 온 거 있어?

나른하게 머리를 들어 올렸던 아실리는 제이든에게 머리를 가까이 대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메밀꽃 냄새가 나.

“응, 메밀꽃밭에 다녀왔어. 밤의 메밀꽃밭은 정말 아름답더라. 너랑 포이한테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자고 있어서.”

아실리는 그의 품에 머리를 조금 더 파묻었다.

-메밀꽃 냄새랑, 흙냄새랑, 그리고…… 조금 묘한 냄새가 나는데.

“묘한 냄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웅얼거리던 아실리는 다시 잠에 빠졌다.

그동안 포이 육아에 꽤나 곤했나 보다. 제이든은 잠든 아실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다가 자신도 잘 준비를 했다.

* * *

“포잉, 포잉, 포잉!”

호수와 메밀꽃밭을 보여 주려고 아침부터 데리고 나왔더니 포이는 좋아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메밀꽃도 좋아했지만 호수가 더 마음에 드는지 호숫가 길을 따라 하얀 공처럼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한참이나 뛰어다니다 지쳤는지 통통통 제이든에게 뛰어온 포이가 뒷발로 서서 두 앞발을 제이든에게 뻗었다.

먼저 안아 달라고 앞발을 내미는 모습에 감동한 제이든이 포이를 덥석 안아 올리자 조그맣게 웃던 아실리가 자기도 앞발을 들고 일어섰다.

-나도 안아 줘.

“너도? 넌 뛰지도 않았잖아?”

옆에서 천천히 걷기만 했는데?

고양이는 새침하게 얼굴을 꼬면서 야아옹 울었다.

-난 늙었잖아. 나이든 고양이가 이렇게 아침 일찍 나와서 축축한 이슬 밟으며 산책이라니.

포이처럼 길섶 덤불 속이나 수풀 속으로 뛰어다닌 것도 아니고 잘 다져진 길이 그리 축축하지도 않았지만 가슴이 뭉클해진 제이든은 얼른 아실리까지 안아 올렸다.

아실리가 기분 좋게 골골거리며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고 포이는 아실리가 올라오자 더 좋은지 꺅꺅거리며 아실리의 목을 감쌌다.

“실컷 놀았지? 이제 가서 아침 먹자.”

제이든은 두 마리를 안은 채 여관으로 돌아갔다.

아침 식사를 하려는 투숙객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뭐? 벌써 떠났다고? 허, 참 빠르기도 하네.”

필립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투덜거리며 돌아서는 건 카토였다.

“이건 또 뭐야? 아니 멀쩡한 사내자식이 웬 고양이랑 토끼를 안고 다녀?”

제이든과 마주친 카토가 아실리와 포이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아실리야 카토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포이가 놀랄까 봐 제이든은 포이를 감싸면서 카토에게 마주 얼굴을 굳혀 보이고 등을 돌렸다.

“저는 방에서 아침 먹을게요. 오믈렛 세트면 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아침부터 왜 또 저래요?”

“내 참, 나잇살이나 먹어서 추접스럽긴.”

제이든의 물음에 필립이 카토 쪽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카티야 양이 아침 먹으러 내려올 건지 방으로 주문했는지 묻잖아. 그래서 그런 건 알아서 뭐할 거냐고 카티야 양은 이미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더니 저런다네.”

못마땅하게 혀를 차던 필립은 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나도 딸이 있지만, 카티야 양은 아무래도 귀족 집안 아가씨 같던데 수행원도 없이 혼자 다니면 저런 놈들이 많을 텐데 괜찮을지 몰라. 말도 마차도 없고. 걱정이 되어 호위라도 좀 고용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더니 웃기만 하더라고.”

“어젯밤에 저도 잠깐 봤는데, 이름이나 외모로 보면 북부 출신 같던데요. 짐작가는 가문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본인이 귀족이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보면 알지. 생긴 거나 행동거지도 그렇지만 말투가 달라.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던걸? 그런데 전혀 무례하다는 느낌이 안 들었어.”

필립은 고개를 좀 기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 아가씨 좀 이상한 데가 있었어.”

그는 주머니에서 아마릴리스 은화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거 귀한 거라면서? 오늘 아침에 숙박비를 치르더니 이거 하나를 덤으로 주면서 이러는 거야.”

그는 고개를 세우고 우아한 여성의 태도를 흉내 내어 보이면서 고상한 어조로 말했다.

“메밀꽃밭을 잘 돌봐줘서 고맙네. 오랜만에 보는데 여전히 아름답군. 계속 잘 부탁하네.”

“흠, 말투가 고풍스럽긴 하네요.”

“아니, 말투도 좀 그렇지만 내가 이상하다고 했던 건 말이야.”

필립은 또 머리를 기웃거렸다.

“메밀꽃밭은 마을 공동 소유지만 우리 집이 메밀꽃밭이랑 제일 가까우니까 나한테 인사를 차린 걸 수는 있는데, 그 아가씨 아주 어리지는 않아도 서른은 절대 안 되어 보였잖아?”

“그렇죠.”

“그런데 내가 여기서 여관을 이십 년 넘게 하고 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아가씨 여기 처음 왔어. 혹시 어렸을 때 왔다고 해도 그런 외모라면 잊을 리가 없지.”

* * *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서 아실리와 포이와 함께 아침을 먹는데 카토가 덜컹거리며 짐마차를 몰고 길을 떠나는 게 보였다.

산더미 같은 짐을 실은 마차를 힘겹게 끌고 있는 것은 말구종 소년 노엘이 안타까워하던 말 제시였다.

“쯧!”

미운 놈이 미운 짓만 골라 한다고 뭐가 그리 급한지 제시에게 마구 채찍질을 해대며 길을 서두르는 카토를 보고 제이든이 혀를 찼다.

“괜히 길에서 만날라. 우리는 좀 천천히 가자.”

호숫가로 뻗은 길을 쭉 따라가면 베로데인을 향한다.

실버로드로부터 베로데인까지 가는 길에 있는 농지와 마을 서너 개, 그리고 베로데인 너머의 마을 몇 군데까지는 모두 다린토스 백작의 영지에 속해 있다.

.원래 이름은 다린토스 영지이나 베로데인이 가장 큰 도시여서 사람들은 영지를 통틀어 베로데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카티야 양이라고 했던가? 그 아가씨가 괜히 저 인간이랑 마주치지나 않으면 좋겠는데.”

-카티야가 누구야?

아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아 여기 묵었던 투숙객인데, 혼자 여행하는 아가씨야. 방금 간 짐마차 봤지? 그 상인처럼 엉큼한 마음을 품은 놈들이 있는 거 같아 좀 걱정이 돼서.”

-흐음, 예뻤나 보네.

아실리가 눈을 가늘게 뜨는 바람에 제이든은 괜히 콧등을 한 번 문질렀다.

“응, 엄청.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어.”

* * *

“그럼 잘 부탁하네.”

“제이든 씨, 이건 도시락이니까 점심 때 드세요.”

“아 이거, 간단한 심부름 하나 해 드리는데 숙박비도 무료, 식사도 무료, 게다가 도시락까지 주시다니 너무 과한데요.”

제이든은 필립이 건네 준 주화 보퉁이를 든 채 머리를 긁었다.

“무슨 소리,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이런 부탁도 하는 거지. 다음에도 이쪽 지나게 되면 잊지 말고 들러 주게.”

“그래요. 우리 집 양반이 제이든 씨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거든. 우리 딸이 아카데미에 가 있지 않았으면 한번 인사라도 시켰을 텐데.”

“아하하.”

“고양이랑 토끼도 잘 가고. 다음에 또 오렴.”

제이든이 필립 부부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노엘이 마구간에서 말 베로를 데리고 나와 마차에 연결해 주고는 베로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잘 먹고 푹 쉰 베로는 기운 좋게 푸르릉 코를 울리고는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호숫가의 길을 따라가다가 호수가 끝나자 농지가 계속 펼쳐졌다.

포이는 호수가 사라진 게 아쉬운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토끼는 물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무슨 토끼가 이렇게 호수를 좋아해? 바다라도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길 옆으로 계속 이어지는 농지는 이미 수확이 끝난 뒤라 다소 썰렁한 느낌이었지만 그런대로 또 시원한 맛이 있었다.

적당한 곳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 좀 쉰 뒤 제이든은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식곤증이 오는지 아실리와 포이가 졸기 시작했다.

“떨어질라. 안에 들어가서 자.”

-제이든은 안 자도 괜찮아?

“응, 괜찮아. 좀 늦게 출발해서 밤 되기 전에 베로데인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쪽에는 저녁때 묵을 만한 마을이 없을 텐데 어쩌면 오늘 밤은 다린토스 산 밑에서 노숙하고 내일 베로데인 들어가야 할 수도 있겠는데?”

출발도 좀 늦었고 점심 먹고 나서 포이가 뛰어다니며 노느라고 시간을 좀 지체했다. 어차피 급한 일정은 아니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마차가 있으니 노숙한다고 해도 별문제가 없을 듯했고.

베로가 걸음이 빠른 덕분인지 제이든의 생각보다는 빨리, 석양이 질 무렵 다린토스 산기슭까지 도착했다.

여관에서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예전에는 큰 산이었지만 베로데인이 개발되면서 산을 계속 깎아들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작아져 버렸고 사람의 왕래가 많아 큰 동물도 거의 없어져 버린 산이다.

.이 산만 넘어가면 바로 베로데인이 나온다.

산기슭에는 한국이라면 주막이라고 할 만한 집이 하나 있다.

.산을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고, 쉬어갈 수 있는 방도 두 칸 정도 있는 작은 집인데 상호도 없이 나이든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행인들은 여기를 그냥 ‘산아래집’이라고 부르는데 제이든은 전에도 여기 들렀던 일이 있다.

.작아서 손님 서너 명 받으면 끝인 집인데 오늘은 왠지 낮은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좁은 마당에 사람이 북적북적해 보였다.

산아래집의 문에 가까워지면서 쉬었다 아침에 갈까 그냥 산을 넘을까 망설이는 중인데 마당에서 베로데인 치안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산 넘으시려고요? 해가 저물어서 지금은 안 됩니다. 여기 주변에서 노숙하시고 내일 날 밝은 뒤에 넘어가세요.”

“?”

다린토스 산을 통과하는 마차 길은 잘 닦여 있고 완만한 데다 위험한 동물도 없어서 밤에도 사람들이 산 넘기를 그리 꺼리지 않는 곳인데…….

.치안대원을 보며 제이든이 여관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는데 과연 치안대원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표범이 나온다는 제보가 있어서 통제 중입니다.”

“다린토스 산에 표범이라니요.”

여관에서 들은 이야기를 여기서 또 듣는데도 잘 믿어지지 않아서 제이든이 산을 올려다봤다. 표범이 있을 만한 산이 아닌데.

그의 표정을 읽은 치안대원이 말을 덧붙였다.

“저희도 처음엔 믿지 못했는데 최근 두어 달 사이에 해를 입은 사람이 세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해도 저물기 전에 또 한 명 나왔어요.”

치안대원은 산아래집 안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제이든은 깜짝 놀랐다.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은 아침에 실버블로썸에서 짐마차를 끌고 떠났던 카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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