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3화
16. 미녀와 야수(1)
카이엔 대륙에는 원래 일곱 왕국이 있었고 사용하는 화폐도 모두 달랐다.
대륙전쟁 이후 카이엔 제국으로 통일되면서 화폐도 차차 통일되었지만 초기에 예전 화폐들이 혼용되던 시기가 꽤나 길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고 수집이나 교환의 대상으로만 남았는데, 지구와는 달리 화폐 수집이 그렇게까지 성하지 않아서 가격대가 높지는 않았다.
.희귀한 것들 중에는 매우 비싼 것도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 일반인도 수집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여관을 하다 보니까 외지 손님들도 많고, 내가 이런 옛날 돈 좋아하는 거 아는 분들이 밥값 대신으로 주기도 하시거든. 일부러 몇 개씩 구해다 주는 사람들도 있고.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동생 주려고 하는 거지만.”
“아하, 동생분을 많이 아끼시네요.”
“늦둥이거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키우다시피 했다 보니 동생이라기보다는 자식 같아서.”
필립은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웃었다.
제이든은 새삼 누나 생각이 나서 그를 다시 보았다. 우리 누나도 나를 저렇게 자식처럼 생각했는데…….
“그동안 제법 많이 모여서 동생에게 보내 주려던 참이거든. 금화 같은 건 없지만 종류가 다양하니까 좋아할 거야. 조금 더 있으니까 정리해서 내일 자네 떠날 때 주겠네.”
제이든은 손끝으로 은화며 동화 등을 살짝 들쳐 보았다.
필립이 뿌듯해하는 것에 비해 그다지 귀한 주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이 더 귀한 거 아니겠어.
“혹시 동생분이 골동품 관련 일을 하시나요?”
“아니야. 도서관 사서라네. 옛날 주화 모으는 건 그냥 취미야.”
크레마 은화, 디나로 동화,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방 대륙의 엽전…….
“어? 이건…….”
제이든이 은화 한 닢을 집어 올렸다.
“이건 꽤 귀한 건데 어디서 구하셨어요?”
아마릴리스 은화. 이 은화는 실제로 화폐로 통용된 것은 아니고 백여 년쯤 전 카이엔의 황태자가 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발행했던 약혼 기념 주화였다.
액면가는 1실버지만 오래되기도 했고 수가 적어서 높은 값에 거래된다.
‘미녀 아마릴리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황태자의 약혼녀는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그 이후 현재까지도 아마릴리스라는 이름이 미녀의 대명사가 되게 한 여성이다.
.황후가 된 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요절했기 때문에 그녀의 미모는 더욱 전설로 남았다.
“오늘 아침에 오신 손님이 주셨다네. 메밀꽃을 보러 오신 여자 손님이신데, 정말이지 아마릴리스 같은 미인이더군.”
필립은 가슴에 손을 얹고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나이에 딸 같은 아가씨를 보고 가슴이 떨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깐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니까. 은발에 보랏빛 눈, 얼마나 신비롭고 예쁘던지.”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이 무슨 큰일 날 소릴. 우리 마누라한테는 절대 비밀일세.”
필립은 대단한 애처가로 유명했다. 제이든은 몸집은 작아도 강단 있는 그의 부인 클로이를 떠올리면서 쿡쿡 웃었다.
“부인은 어디 가셨나요?”
“뭘 좀 살 게 있다고 나갔다네. 금방 올 거야.”
주화를 정리하고 필립과 함께 여관 쪽으로 나오자마자 식당에서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여기 하루이틀 단골도 아닌데 그 정도 편의도 못 봐줘? 그냥 그걸 나 주고 새로 만들면 되잖아.”
“손님, 그건 곤란합니다. 일단 이건 주문하신 분께 갖다 드리고 손님 걸 새로 만들어 드리면…….”
“정말 말이 많네. 필립은 어디 갔어? 주인이 이렇게 자릴 비우니까 여관이 제대로 안 굴러가지!”
필립이 서둘러 식당에 들어가 보니 큰소리를 치고 있는 사람은 키도 크고 골격이 좋은데 얼굴만은 이상할 정도로 바짝 말라서 강퍅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눈도 가늘고 입술이 얇아서 더 그렇게 보였다.
“카토 씨,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음식 좀 바꿔 달라니까 안 바꿔 주잖아. 서비스가 왜 이래?”
난처한 표정으로 홀에 나와 있던 요리사와 음식을 나르고 있던 종업원 처녀가 필립을 보면서 억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카토 씨가 주문하신 음식은 벌써 나왔어요. 그런데 이층에서 주문하신 음식을 방으로 가져가려고 하는데 다짜고짜 음식을 바꿔 달라잖아요. 다른 손님 음식인데.”
“아 일단 날 주고 그 손님 건 다시 해 주면 되잖아. 어차피 그 손님은 방에서 기다린다며. 좀 늦어도 상관없잖아.”
제이든은 종업원이 들고 있는 쟁반을 보았다.
그 위에 놓여 있는 음식은 제이든이 주문한 실버블로썸 파스타 정식 세트였다.
카토라는 자의 식탁을 보니 고기 정식이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고기 정식을 주문해서 받았는데 파스타 정식이 다른 사람한테 나가는 걸 보니까 그게 먹고 싶어졌단 말이지? 뭐 이런 진상이 있어?
식당의 다른 손님들도 제이든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카토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한 번 휘 둘러보더니 크게 인심 쓴다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 바꿔 달라고는 안 할 테니 그냥 그걸 날 줘. 내가 고기도 먹고 파스타도 먹지. 이층에는 새로 한 걸 올려보내고, 됐지?”
“아니, 카토 씨, 그럼 고기 정식을 드시면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건 이층에 올려보내고 카토 씨께는 새 파스타 정식을 바로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서 장사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
카토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됐습니다. 괜히 시끄러워지니까 그거 저분 드리세요. 제가 기다릴게요.”
제이든이 입을 열자 카토가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오호, 이 친구가 이층에서 주문했다는 사람이군? 젊은 친구가 게으른가 보네. 방으로 주문을 하고……, 난 또 예쁜 아가씨가 주문한 줄 알았더니.”
그는 실망한 듯한 얼굴로 의자에 앉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럼 됐지? 저 친구가 양보한다고 했으니 그거 나 주고 저 친구 건 새로 해 주면 되겠네.”
“되긴 뭐가 돼요?”
식당 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리고 호리호리한 중년 여자가 발소리를 콩콩 내며 들어와서 허리에 손을 짚고 카토의 앞에 섰다.
“여, 여보…….”
필립이 당황한 듯 그녀를 부르자 여자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홱 날릴 정도로 고개를 틀었다.
“하여간 사람만 좋아서! 단골손님이라고 이렇게 진상짓을 하는데도 받아주고! 이봐요, 카토 씨! 요리는 주문한 순서대로 나가는 거 몰라요? 싫으면 나가세요. 카토 씨 같은 손님 안 받아도 우리 안 망해요!”
“아니, 그래도 오랜 단골인데…….”
그녀의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지금까지 진상을 부리던 카토는 급격히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가 문간에서 다 들었어요. 우리 바깥양반이 너그럽다고 그렇게 억지를 부려요? 제이든 씨도 그래요. 딱 잘라 안 된다고 하지 양보는 무슨 양보야.”
그녀는 제이든에게도 한소리를 하더니 주방에 제이든의 음식을 새로 만들어 주라고 했다.
“식었잖아요. 우리 집 양반이 빨리 처리를 못 해서 그런 거니까 미안해요.”
그녀는 식당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사과의 뜻으로 후식을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서비스보다는 그녀의 딱 부러지는 기세 때문에 다들 조용해진 것 같았다. 카토도 궁시렁거리면서도 제 몫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식당이 정리되자 그녀는 언제 큰소리를 냈느냐는 듯 상냥해진 얼굴로 제이든과 필립에게 웃어 보이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 생각에 저 인간, 저렇게 소란스럽게 굴면 카티야 양이 나와 볼 줄 알고 그런 거예요. 오지랖 넓은 토비아스 씨가 카토 씨가 저러는데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고. 하여간 남자들이란.”
“에이, 설마 그렇겠어?”
“아마 맞을 걸요? 점심 식사 때 다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카티야 양만 쳐다봤잖아요. 그러니까 불편해서 저녁 때는 식당에 안 나온 건데 다들 기다리는 거 아니겠어요? 사람들이 다 미녀 앞에서 당신처럼 마음이 굳질 않다고요.”
그녀가 남편에게 신뢰 가득한 웃음을 보내자 필립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음식이 다시 준비되는 동안 제이든이 방에 올라가 보니 아실리와 포이는 곤히 자고 있었다.
아래층의 소란 때문에 놀라지나 않았을까 했는데 하루 종일 마차를 타고 오느라 꽤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저도 그냥 아래층에서 먹겠습니다.”
제이든도 빈 자리를 찾아 앉았고 금방 새로 만든 파스타 정식이 나왔다.
카토의 진상짓 때문에 어수선해졌던 분위기도 안정되었고 식사가 끝나자 방에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아서 커피와 담소를 즐길 사람은 남고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요즘 뭐 새로운 소식 좀 없나요?”
클로이 부인이 토비아스라고 불렀던 청년이 과연 오지랖이 넓은지 사람들 분위기를 잘 맞추면서 이야기를 끌어내었다.
“글로비스에서 포에니 토끼를 봤다는 사람이 있습디다.”
“콜록!”
“제이든 씨, 왜 그래요? 사레가 들렸나요?”
“아 예, 괜찮습니다.”
제이든은 얼른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포에니 토끼라고요? 옛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동물 아니에요?”
“아니 정말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 소네트 경매 때 거리에서 달려가는 토끼를 봤는데 분명히 포에니 토끼였다고 맹세를 하던 걸요. 그래서 복권도 샀답디다.”
“에이, 포에니 토끼가 세상에 안 나온 게 언제라고, 아마 비슷한 토끼를 잘못 봤겠지요.”
“베로데인에서는 표범이 나왔다더니 글로비스에서는 포에니 토끼라고?”
“표범이요? 베로데인 같은 도시에?”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말을 꺼낸 나이 지긋한 상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베로데인이 아니고 베로데인 외곽으로 산이 하나 있잖아요. 그 산에 요새 표범이 나온답니다. 산길을 넘어가던 행상인들 중 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어요.”
“설마……, 그 산은 그렇게 험한 산도 아닌데, 옛날에야 큰 산이어서 산짐승들도 많이 살았다지만 그 산을 깎아서 도시를 만들면서 모두 없어졌잖아요.”
손님들 중 노인 한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옛날에 그 산이 아직 큰 산이고 베로데인은 지금처럼 큰 도시가 아니라 작은 마을일 적에 그 산의 왕이 표범이라는 말은 있었지.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베로데인 출신이라 옛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거든.”
“저는 호랑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야, 표범이 맞아. 베로데인의 흰 표범이라고 유명해서 사냥꾼들이 여러 번 잡으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다던데. 그런데 언젠가부터 안 보이게 되어서 아마 늙어 죽었나 보다 했다는군.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표범이 그냥 있었으면 산을 건드리지 못해서 베로데인이 지금처럼 큰 도시가 되지 못했을 거라 하시더라고.”
“흰 표범이 있어요?”
“나도 본 적은 없지만 백호가 있는 거 보면 백표도 있지 않겠어?”
여관 주인 필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도 어릴 적에 들어 본 기억이 나네요. 중부에서는 베로데인의 흰 표범, 동부에서는 에테노른의 금빛 독수리, 또 뭐가 있더라, 옛 영수들의 이야기 있잖아요.”
“북부에는 다카티움의 검은 호랑이와 푸른 용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죠.”
“그건 진짜 전설이잖아. 베로데인의 흰 표범은 실제로 있었던 표범이라니까.”
한동안 전설적 동물들의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시계 도둑이 있다는데 알고 계세요?”
“시계를 훔쳐요?”
“몇 달 전 얘긴데요. 골동품 시계를 훔치는 도둑이 있다더라고요. 수도에서도 귀족 가문 여러 집이 털렸대요. 진귀한 시계만 용케 골라 간다고 하던데 전담 수사진이 꾸려지니까 귀신같이 절도가 뚝 끊어졌다네요.”
“내년 봄에 세렌토 영주 가문에 혼례가 있답니다. 벌써부터 좋은 비단이며 보석, 장신구 등을 구한다고 하니까 이번 상행은 그쪽으로…….”
제이든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바람도 좀 쏘이고 싶고 내일이면 떠날 테니 밤의 메밀꽃밭도 한 번 봐 두고 싶었다.
늦가을이라 밤바람이 좀 쌀쌀했지만 달도 밝고 날씨도 맑아서 기분이 좋았다.
천천히 메밀꽃밭을 향해 걸어가던 제이든은 메밀꽃밭이 눈에 들어오자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달빛 아래 하얗게 반짝이고 있는 메밀꽃밭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거 못 보고 갔으면 두고두고 아쉬울 뻔했네. 아실리랑 포이에게도 보여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아실리랑 포이도 깨워서 데리고 올까?
메밀꽃을 감상하고 있는 제이든의 눈앞에서 갑자기 메밀꽃밭 한 군데가 눈에 띄게 일렁거렸다.
“?”
하얀 메밀꽃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더니 마치 물보라 속에서 솟아오르는 인어처럼 누군가 꽃 사이에서 일어섰다.
순간 제이든은 메밀꽃의 정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하얀 피부, 물안개처럼 흔들리는 흰옷의 여자가 제이든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