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2화
15. 실버로드에서
지대가 점점 낮아지면서 아스토시엔 산이 뒤쪽으로 아슴푸레 멀어져가고 평지가 시작되었다.
양쪽으로 이어지던 숲이 드문드문 끊어지면서 밭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시야가 툭 터지듯 넓어지면서 이미 수확을 끝낸 밭자락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올해는 밀 농사, 보리 농사가 잘 되었다고 들었으니 농부들도 한참 마음이 푸근할 시기였다.
해가 슬슬 저물어 갈 무렵 제이든 일행은 호숫가에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대체로 호숫가에 있는 마을은 레이크타운이라든지, 레이크빌이라든지 호수와 관련된 이름을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 마을의 이름은 호수와 관계 없는 실버로드였다.
은빛 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마을 초입에 펼쳐져 있는 메밀꽃밭 때문이다.
가을바람 아래에서 메밀꽃이 길 양편으로 마치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얗게 반짝이며 흔들렸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마을 사람이 제이든 일행을 보고 눈을 비볐다.
은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메밀꽃 사이로 자그마한 마차가 다가오는 풍경은 그것만으로도 동화 같은데, 마부석에 토끼와 고양이가 앉아 있다.
마을 사람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보았다.
토끼와 고양이가 탄 마차를 끄는 밤색 말의 연한 갈색 갈기가 저녁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 * *
“지난번엔 고양이만 데리고 있더니 어느새 토끼가 한 마리 늘었네.”
“그렇게 됐어요. 아, 필립 아저씨, 그렇게 자랑하시던 메밀꽃 풍경을 드디어 봤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메밀꽃은 어디나 다 곱지만 우리 마을 메밀꽃은 그중에서도 특별하지.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 은빛을 많이 띠고 있어서 색다르거든. 꽃송이도 크고.”
여관 ‘실버블로썸’에 제이든이 묵는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지난번엔 이 근처에 일이 있었던 관계로 열흘 가까이 묵었던 터라 그동안 친해진 여관 주인 필립에게 메밀꽃 자랑을 한참이나 들었지만 제철이 아니어서 실버로드 마을의 자랑인 메밀꽃을 보지 못했었다.
보리밭이나 밀밭은 개인 소유지만 메밀꽃밭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가꾸는 것인데, 실버로드의 메밀꽃은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다들 자기 꽃밭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실제로 이 메밀꽃밭을 보기 위해 먼 곳에서 오는 꽃 애호가들도 있다고 한다.
“이번엔 얼마나 묵을 예정인가?”
“아, 오늘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내일 아침 먹고 떠날 거예요.”
“지난 봄에 자네가 썼던 방이 비어 있는데 같은 방으로 줄까? 그 방이 통풍도 좋고 전망이 좋지.”
“예, 감사합니다. 얘들 좀 방에 데려다 주고 올 테니 말 좀 부탁드려요.”
“노엘! 이 손님 말이랑 마차 좀 건사해라!”
말구종 소년을 불러 말을 마구간에 데려가게 한 필립이 물었다.
“식사는?”
“좀 씻고 쉬었다가 할게요.”
방에 올라가자 아실리는 피곤한지 침대 발치에 드러누웠지만 포이는 창문 밑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포잉, 포잉!”
“우리 포이 바깥이 보고 싶어?”
포이를 안아서 창문턱에 올려 주자 포이는 눈을 크게 뜨면서 포르릉 탄식 같은 소리를 냈다. 나름 감탄하는 모양이다. 새까만 귀가 쫑긋 섰다.
“포이잉!”
창문턱에서 뒷발로 일어선 포이가 침대 위의 아실리를 돌아봤다.
앞발을 손짓하듯 바둥바둥 움직이는 게 아실리에게도 와서 보라는 것 같았다.
아실리가 기지개를 켜면서 돌아누워 야아웅 나른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호수 말이지? 난 지난번에 봤어.
“포이잉…….”
-봤다니까앙.
모른 척 돌아누우려던 아실리는 포이가 칭얼거리며 뒷발을 통통 구르자 할 수 없다는 듯 끄응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어린 것한테 맞추려니까 힘들다옹.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창턱에 사뿐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전혀 나이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실리가 투덜거리면서도 창턱에 올라서자 포이는 만족했는지 아실리에게 몸을 찰싹 붙인 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메밀꽃밭을 지날 때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좋아하더니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모양이다.
아실리도 투덜거리던 것과는 달리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좋은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을 들이마시면서 기분 좋게 골골거렸다.
제이든도 아실리와 포이의 뒤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실버로드의 호수는 크지는 않지만 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아주 예뻤다. 봄철에 와서 봤을 때와는 또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새로운 맛이 있었다.
“나는 말을 좀 보고 올게. 쉬고 있어. 포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창문에 안전 창살이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사람 기준이라 창살 사이가 너무 넓었다.
토끼나 고양이는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넓이라 제이든은 아실리에게 주의를 준 뒤 배낭에서 당근과 사과를 몇 개 꺼냈다. 라벤더베리 과자가 두세 봉지 남았기에 그것도 한 봉지 들고 나왔다.
플로렌스 부인이 어찌나 손이 큰지, 마법 배낭이 아니었으면 그녀가 준 과자며 빵을 다 담아 오지도 못할 뻔했다.
마차는 여관 뒤쪽의 공터에 세워져 있었고 마구간에서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밀빛 더벅머리의 소년이 말들에게 물과 여물을 주는 중이었다.
여물을 먹고 있던 밤색 말이 제이든을 알아보고 머리를 들고 푸르릉 코를 울렸다.
“그래, 베로, 여물은 맛있니? 이름이 베로 맞지?”
마차를 빌릴 때 말 이름을 들었는데 베리였던가 베로였던가, 수말이니까 베로가 맞겠지.
“하루 종일 마차 끌고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많이 먹고 푹 쉬렴. 이건 후식이다.”
여물을 먹고 난 말의 목덜미를 두드려 주며 사과를 주는 걸 본 말구종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분이시네요. 자기 말도 아니고 삯마차 말인데도 아껴 주시고.”
“말만 보고 삯마차 말인 걸 알아?”
소년이 웃었다.
“마차에 옐로우 코우치 표식이 달려 있잖아요.”
“아 그렇지 참, 깜빡했네.”
옐로우 코우치(Yellow coach)는 카이엔에서 가장 큰 삯마차 회사의 이름으로 어지간한 도시에는 다 옐로우 코우치의 지사가 있다.
“그런데 전에 왔을 때 말을 돌보던 친구가 아닌데, 바뀌었나?”
“아, 전에 있었던 말구종은 우리 형이에요. 베로데인에 일자리가 나서 갔거든요. 지금은 제가 마구간 일을 하고 있어요. 노엘이라고 해요.”
노엘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싱긋 웃었다.
“말을 돌보는 일은 자신 있거든요.”
제이든은 가져온 사과와 당근을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래, 노엘, 잘 부탁해. 이건 베로 간식으로 가져온 거니까 나중에 적당히 주고.”
“예.”
“그리고 이건 라벤더베리 과자인데 깨끗한 거야. 너도 먹고 베로도 몇 개 주고 하렴.”
“와, 향이 정말 좋네요. 라벤더베리 쿠키는 처음 봐요.”
과자 봉지를 열어 본 노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저기, 이 과자, 다른 말한테 좀 줘도 될까요?”
그는 마구간 안쪽을 가리켰다.
“저 말은 짐마차를 끄는데 주인이 너무 험하게 다뤄서 안쓰러워서요. 사과나 당근은 제가 줘도 되지만 이런 과자는 흔히 못 보는 거니까…….”
마구간 안쪽에는 몸집이 작고 지친 듯한 황갈색 암말이 서 있었다. 소년이 말에게 가까이 가서 콧등을 쓰다듬자 말은 가냘프게 콧소리를 내면서 대답했다.
“물론 줘도 되지. 더 가져올 테니까 다른 말들에게도 주렴. 그런데 그 말은 어디 아프니?”
“몸도 다쳤고 너무 지쳐서 그래요.”
노엘이 말에게 라벤더베리 과자를 주자 말은 냄새를 맡아 보더니 깜짝 놀란 듯 콧소리를 내고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다는 듯 급하게 먹는 모습이 어딘가 포이를 연상하게 했다.
“이 말 이름은 제시예요. 순하고 좋은 말인데…….”
노엘은 마구간 문 쪽을 흘끗 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손님처럼 남의 말한테도 잘해 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말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제시 주인은 살림 도구며 그릇 같은 걸 팔러 다니는 상인인데…… 말을 진짜 함부로 다뤄요. 얘 몸에 상처투성이인 거 좀 보세요. 마르기는 또 얼마나 말랐는지.”
“저런! 몸에 정말 상처가 많네. 왜 이렇게 다쳤지?”
“쓸데없이 채찍질을 많이 하고 뭐 잘 안 되면 화풀이로 말을 때리고 해서 그래요.”
말을 하다 보니 화가 났는지 노엘은 분개한 어조가 되었다.
“안 보면 또 모르는데 우리 마을에 자주 온단 말예요. 뒤에서 손님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저는 말을 좋아해서 형이 여기서 일할 때부터 와서 마구간 일을 거들었거든요. 제시 주인의 조수로 일하던 사람한테 들었는데요. 제시 이전에 그 사람 마차를 끌던 말은 너무 혹사를 당해서 여름날에 길에 쓰러졌대요. 그런데 주인이란 작자는 물도 안 주고 일어나라고 채찍질만 했대요.”
“저런!”
“애당초 배불리 먹이지도 않고 쉬게 해 주지도 않으면서 짐을 너무 턱없이 무겁게 실어서 그런 건데, 그 말은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대요. 조수 아저씨는 그 꼴을 보고 일 그만뒀대요. 말은 안 하지만 자기 말한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조수한테는 뭐 잘했겠어요?”
노엘은 소년답지 않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제시의 목을 쓰다듬었다.
“제시는 우리 마을 말이었단 말이에요. 제가 망아지 때부터 봤는데 그런 사람한테 팔려갈 줄은 몰랐어요.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말이었는데 이렇게 형편없이 만들어 가지고 오다니.”
소년은 주먹으로 눈을 비비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해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오늘 제시가 이렇게 다쳐서 온 거 보니까 너무 속상해서요. 손님이 친절하셔서 그만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어요.”
“괜찮아.”
제이든은 노엘의 등을 두드려 주고 제시를 넘겨다보았다.
커다랗고 맑은 눈을 가진 말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노엘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제이든이 우울할 때 아실리가 제이든을 달래 주려는 동작과 똑같았다.
여관으로 돌아와 보니 식당에서는 예닐곱 명의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들 중 누가 그 몰인정한 상인이려나?
“오, 제이든, 저녁 식사 할 텐가?”
“예, 그런데 방에서 먹을게요.”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있으니 그냥 방에서 먹는 게 나을 거 같아 식사 주문을 하고 방으로 올라가려는 제이든을 필립이 불렀다.
“저, 이번엔 어디로 가나?”
“베로데인이요. 거기서 의뢰 하나만 처리하고 바로 브리오 쪽으로 갈 예정이에요.”
“오, 그러면 혹시 루스타운에도 들르게 되나?”
“루스타운이요? 거기는 가 본 적이 없는데. 전에 브리오 갈 때는 다른 길로 갔었거든요.”
“베로데인에서 브리오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 루스타운을 거쳐 가는 거라네. 지도 보여 줄까?”
필립은 카운터 아래에서 지도를 꺼내 펼쳐 보였다.
“이것 보게. 베로데인에서 아침 먹고 떠나면 늦은 점심 무렵에 루스타운에 도착하게 될 거야. 루스타운에서 브리오까지 마차로 또 하룻길이고. 이렇게 루스타운을 거치는 게 브리오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이지.”
“그러네요. 그런데 루스타운은 왜요?”
“아, 내 동생이 루스타운에 사는데 마침 물건 좀 보낼 게 있거든. 혹시 자네가 전해 줄 수 있을까? 그러면 오늘 숙박비와 식사는 내가 대접하지.”
“예, 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전하실 물건이 뭔데요?”
“자네도 재미있어할 만한 물건이야. 잠깐 내 방으로 와 보게.”
메이빌의 루이네 집과 마찬가지로 살림집을 겸하고 있는 필립의 여관 안방으로 따라가 보니 필립이 보자기로 싼 상자를 하나 꺼내 왔다.
“이것 봐. 어때?”
그가 펼쳐 보인 상자 안에는 여러 개의 동전과 은화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전이랑 은화네요?”
“응, 내 동생이 이런 걸 수집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