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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40화 (4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0화

13. 다시 보는 거울(5)

한밤중에 뒷산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라이는 개인 공방에 들어박혀 뭔가를 열심히 만들었다.

보름 후 시안이 다시 수도로 올라가는 날, 라이는 시안을 만나러 가서 자개함 하나를 내밀었다.

“혼인 선물일세. 오랜만에 만들어 봤는데 마음에 들면 좋겠네.”

자개함 안에는 정교하게 만든 동경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야, 역시 솜씨가 죽지 않았군. 좋은 작품이야. 소중히 간직하겠네.”

시안은 진심으로 기뻐했고 라이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라이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가 시안을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자 아이를 어르고 있던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친구분은 수도로 올라가셨나요?”

“음.”

라이는 아내의 눈을 피하듯이 아랫목에 앉으며 물그릇을 끌어당겼다. 바짝 마른 목에 물을 흘려넣은 뒤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지난 보름 동안 이 손으로 온갖 공을 들여 만든 거울, 그 거울을 시안에게 주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결국 건네주고 말았다.

.어쩐지 손바닥에 피라도 묻은 듯한 느낌이라 그는 멀쩡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왜 그래요?”

“…….”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불안한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가서 집 뒤에 마련된 공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라이는 아내에게 곱게 세공된 은제 머리 뒤꽂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웬 뒤꽂이예요?”

“그냥, 하나 만들어 봤어.”

아내의 얼굴이 환하게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눈길을 피했다.

그만그만한 집안에서 서로 맞춰 혼인한 아내는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나 라이는 아내에게 특별한 정을 보인 일이 없었다.

자신도 왕궁의 경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더 좋은 집안의 더 고운 규수와 혼인할 만한 인물이었는데 그냥 고향 처녀와 혼인한 게 늘 못마땅했다.

청예원의 도제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장인이라고.

지금이야 경장 일을 그만뒀지만 원래는 왕궁에 납품할 만한 물건을 만들었던 손이고 자신이 만든 거울 석 점도 왕궁의 비빈들이 사용하고 있을 텐데.

아내에게는 거울도 장신구도 직접 만들어 준 일이 없었다. 분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장터에서 산 투박한 거울과 뒤꽂이를 쓰고 있던 아내는 혼인 후 처음으로 남편이 만든 장신구를 받고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뒤꽂이는 귀족 규수들이나 할 만큼 섬세하고 고왔다.

“이거 써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너무 고운데.”

“고와 봤자 뒤꽂이지. 그냥 써.”

“함부로 못 쓰겠어요. 잘 넣어 뒀다 어디 잔치 갈 때나 써야지.”

라이는 좋아하는 아내를 보는 게 괴로워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워 버렸다.

늘 모자라다고만 생각했던 순박한 아내, 저 여인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까.

그로부터 몇 달 후, 시안이 왕궁의 경장 일을 사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왜 그랬대? 아직 한창 나이인데 그렇게 좋은 자리를.”

“그 댁 새신부가 병이 나서 자리보전하고 누웠다는군. 따뜻한 남쪽 고을로 요양하러 간다던데.”

“그렇다고 왕가의 경장 자리를 내던지고 같이 간다고?”

“시안 렌이 어린 처를 끔찍이 여긴다잖아. 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같이 죽을 기세라던데.”

“쯧쯧, 혼인 잘했다고 다들 부러워했는데 몸이 약한 처를 얻었던가 보군.”

우물가에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들 곁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라이의 다리가 떨렸다.

설마 하면서 일을 저질렀는데 주술사 노인의 말이 맞았다. 거울에 담긴 저주는 확실했다.

시안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 그 여자를 잃게 되면 시안의 삶은 나락에 빠지게 되겠지.

라이의 마음은 기쁜 것도 같고 허망한 것도 같았다. 거울을 시안에게 넘길 때만 해도 그에게도 나와 같은 괴로움을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여보, 왜 그래요? 이 날씨에 땀을 흘리고.”

“응? 아, 아무것도 아냐.”

아내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라이는 공방으로 가려다가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당신은 괜찮아? 어디 몸 안 좋은 데는 없어?”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왜 그래요?”

“아냐, 괜찮으면 됐어.”

라이는 공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래, 주술사 노인의 말이 모두 맞는 건 아닐 수도 있어. 그냥 사람이 오랫동안 아프고 고생만 하다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 꼭 죽지는 않을지도 몰라.

그는 수도 쪽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아닌 척하면서 달려가 시안 렌에 대해 묻곤 했다.

아내의 병이 점점 깊어진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식사하세요. 오늘 국이 맛있게 끓여졌어요.”

“당신은 왜 안 먹어?”

저녁상을 들여 놓고 자신은 수저를 뜨지 않는 아내에게 라이가 묻자 아내가 도리질을 했다.

“왠지 속이 불편하네요. 입맛이 없어요.”

그날 밤 라이는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쁜 꿈을 꾸었는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 채 일어나 앉은 라이는 어둠 속에서 잠든 아내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몸이 고된지 그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은 라이는 뒷산으로 올라갔다.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는 새벽빛에 의지해 산에 올라 보니 움막은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주술사 노인을 본 지 오래되었다. 혹시 떠난 건가.

맥없이 돌아서서 산을 내려오는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라이는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사람도 참, 왜 그렇게 놀래? 새벽부터 어쩐 일인가?”

주술사 노인이 유령처럼 나타나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칠 겨를도 없이 노인에게 말했다.

“그거, 그때 내 거울에 걸었던 저주, 취소하고 싶소.”

“…….”

“취소하고 싶다니까. 대가라면 내겠소.”

노인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때 말했을 텐데? 잘 생각하라고. 만약 그 저주를 풀고 싶다면 자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미 저주에 대한 대가를 치른 자네가 또 다른 대가를 부담할 수 있을까?”

“…….”

“내려가 보게. 그자는 자네가 원했던 만큼 충분한 괴로움을 겪을 거야.”

라이는 집에 돌아와 여전히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떨리는 가슴을 손으로 쓸었다. 괜찮겠지. 별일 없을 거야.

서너 달 후, 장사 일로 수도에 다녀왔다는 이웃 사람이 주막에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안 렌 말인가? 그 집에 초상이 나서 말이 아니라더군. 남쪽 고을에서 요양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네. 아마 가산을 정리해서 고향으로 내려올 모양이던데.”

“그 집 부인이 결국 죽었나?”

“그래, 참 안됐지. 혼인하고 겨우 한 해 넘겼는데. 시안이 아내를 잃고 반 실성한 사람 같았다더라고.”

라이는 갑자기 등골이 써늘했다.

그는 집으로 달려갔다. 사립문 밖에서 이미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자리에 누워 있었다.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벌써 누웠나?

“여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든 듯 누워 있는 그녀는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 준 채 한 손에 그가 만들어 준 뒤꽂이를 쥐고 있었다. 한 번도 밖에 하고 나가지 못했지만 집에서 몇 번씩 꺼내 보고 쓰다듬어 보고 하던 그 뒤꽂이.

* * *

보름 동안 밤낮으로 매달려 만들었던 동경을 시안에게 전해 주기 전날 밤, 라이는 그 거울을 가지고 뒷산 움막을 찾아갔었다.

“정말 만들어 왔군. 역시 솜씨가 좋아. 이인자로 사느니 경장 일을 그만둬 버릴 법도 하군.”

주술사 노인은 그의 거울을 만지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자네의 한을 풀 주술을 이 거울에 걸어 주겠네.”

노인은 뱀처럼 교활하면서도 유혹적인 눈으로 라이를 바라보았다.

“한을 푸는 대신 자네도 대가를 치러야 해.”

“뭘 주면 되겠소? 은자라면 모아 둔 게 좀 있소.”

노인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니야, 이런 건 돈으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네.”

“?”

“자네는 시안 렌이 경장 일을 못 할 만큼 괴로움을 겪기를 원하지? 나는 이 거울에 그만한 저주를 부여할 걸세. 거울의 주인은 시름시름 아플 테고 십중팔구는 죽겠지.”

그는 라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네 내 말을 믿지 않지? 저주를 걸 물건을 가져오라니까 혹시 하고 거울을 만들어 오긴 했지만 온전히 믿는 건 아니야, 그렇지?”

“…….”

라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찾아왔던 날 주술사 노인이 그의 한을 풀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완전히 믿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의 절반 정도만 이루어진다 해도 기분이 좀 풀릴 듯해서 거울을 만들어 왔는데, 정작 노인을 마주하니 불안감이 들었다.

“지켜보게. 내 말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대가를 돈으로 치를 수 없다면 뭘로 치르면 되오?”

“흠…….”

주술사 노인은 뱀을 닮은 눈으로 라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이 정도의 저주를 걸려면 자네도 꽤 큼직한 걸 내놓아야지. 자네에게도 중한 것 말이야.”

라이는 그의 눈길에 소름이 끼쳐서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목숨을 하나 대가로 내놓게. 거울의 주인처럼 앓게 될 걸세.”

“죽지는 않소?”

“글쎄, 대가로 내놓은 목숨의 명이 아주 튼튼하다면 허약해지는 걸로 끝나겠지만.”

노인은 말을 흐리면서 기묘하게 웃었다.

어두운 움막 속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최면을 걸듯 라이의 의식을 사로잡으며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어둠을 끄집어냈다.

“자, 고개만 끄덕이면 되네. 고개 한 번 끄덕이면 오랫동안 자네를 좀먹어 온 한을 풀 수 있다니까.”

“…….”

“자, 어서.”

* * *

달칵!

수잔이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소리에 제이든이 퍼뜩 깨어났다.

그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잔이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음미하고 두어 모금 마신 뒤 내려놓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제이든은 이백 년 전 센 왕국에 다녀온 것이다.

아실리가 꼬리로 제이든의 다리를 토닥거리자 마음이 안정되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뭔가 알아내셨나요, 감정사님?”

“예…….”

목이 잠겨서 잠시 기침을 하며 소리를 고른 제이든은 사람들을 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 거울에는 강력한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절대 집에 두시면 안 되는 물건이에요. 거울을 자주 쓰는 사람은 시름시름 앓다가 서서히 죽게 되고, 더 무서운 건 죽은 자의 영혼이 거울 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 그럼 우리 어머니의 영혼도 이 안에 갇혔다는 건가요?”

제이든은 말하기 어려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마탑에 즉시 신고해야 합니다. 저는 감정은 할 수 있지만 정화는 못 하거든요. 마탑에서 나와 조치를 취해 줄 겁니다.”

고인의 가족들은 제이든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제이든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치안대에 가서 문화재 관리국과 마탑에 신고를 넣었다.

“보통 신고 후 2주 이내에 마탑에서 사람이 나오는데, 이 거울은 위험성이 높아서 그런지 3일 내로 온다고 합니다. 그동안 거울은 치안대에서 보관하는 게 좋을 듯한데요.”

치안대 금고에 거울을 보관하고 플로렌스 부인과도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제이든은 아실리에게 환각 속에서 본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은 참 어리석어.

아실리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제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질투와 열등감은 사람을 좀먹고, 그 틈새를 노리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만들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로 인해 남을 파괴하고 자신도 파괴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제이든은 마음이 답답해서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환각 속에서 본 사내, 아내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던 라이의 모습과 거울 속에 갇혀 있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여자는 아마 최초의 피해자, 가장 강력하게 저주를 받은 시안 렌의 아내였겠지.

“마탑에서 빨리 거울을 정화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영혼들을 풀어 주면 좋겠다.”

아실리가 말없이 위로하듯 제이든의 팔에 머리를 비볐다. 포이는 집안을 깡충거리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제이든은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유물의 내력을 보는 능력을 갖고 싶어서 그렇게 애썼는데, 어쩌면 이게 꼭 좋은 능력이 아닐 수도 있을 듯했다.

우울해하고 있는 제이든의 다리를 뭔가 톡톡 두드렸다.

내려다보니 뒷발로 일어선 포이가 입에는 연보라색 라벤더베리 한 알을 문 채 앞발로 그의 무릎을 건드리고 있었다.

“포이 왜?”

눈이 마주친 포이는 제이든의 무릎에 깡충 뛰어오르더니 물고 있던 라벤더베리를 그의 무릎에 떨어뜨렸다. 이거 줄게, 하는 것처럼.

“포이이…….”

아기 토끼는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울면서 아실리가 하듯이 작은 머리를 그의 품에 살짝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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