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9화
13. 다시 보는 거울(4)
그렇다면 사람의 형체를 한 저 덩어리들은 이 거울의 소유자들이었을까.
생명을 잃은 지 오래된 사람들일수록 흐릿하고 얼마 안 된 사람일수록 형체가 선명한 것 같았다. 본체는 당연히 아닐 테고 어쩌면 그들의 영혼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이 거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저 여자만은 어째서 덩어리에 갇히지도 않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완전한 형체를 갖춘 채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것일까? 의식도 명료하고.
제이든이 여자를 돌아보자 그녀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손등을 덮는 기다란 소매를 무릎에 늘어뜨리고 폭이 넓은 치마를 펼친 채 고개를 숙인 여자의 모습은 막 떨어지려는 꽃송이처럼 애잔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를 주시하는 동안 제이든의 눈앞이 다시 흐려졌다.
카이엔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훨씬 더 옛날, 아마도 이백 년쯤 전, 제이든이 가 본 적 없는 센 왕조 시절 동방 대륙 어느 고을의 풍경이었다.
아마도 관아인 듯, 태수나 현령쯤으로 보이는 관복 차림의 사내가 섬돌 아래 시립한 검정 옷의 군관을 닦달하고 있었다.
* * *
“마경장(磨鏡匠)을 불러오라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태수가 짜증스럽게 서안을 두드리자 군관이 허리를 굽혔다.
“이미 두 명을 불러와 대기 중입니다.”
“그놈들은 다 쓸모가 없어. 내가 불러오라고 한 건 라이 한이다.”
“하지만 라이 한은 병중이라 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리 거울이 나오기 전 청동, 백동 등의 금속 거울을 제작하는 장인을 경장(鏡匠)이라 했다.
경장 외에 마경장(磨鏡匠)이라는 전문 인력이 따로 있는데 이는 거울을 갈고 닦는 사람을 말한다.
금속 거울은 쉽게 녹이 슬고 관리가 어려웠다. 탁해진 거울 표면이 다시 깨끗해지도록 표면을 연마하는 데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라이 한은 원래 제법 촉망받던 경장이었으나 몇 년 전부터 경장 일을 그만두고 마경장 일을 하고 있었다.
.마경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아무리 낡고 탁해진 거울도 그가 손을 대면 새것처럼 변해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비출 수 있게 된다고 했다.
태수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번에 시안 렌의 동경을 구한 것을 모르느냐. 그런 명품을 아무 마경장에게나 맡길 수는 없지. 라이 한에게 의원을 보내라. 걸을 수 있으면 데려오라고 해. 혹시 꾀병이면 묶어서 끌고 올 것이라 엄포를 놓아라.”
군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태수가 고집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니 라이 한은 와야만 할 것이다.
태수는 외지에서 부임한 사람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 고장 태생인 군관은 사실 라이 한이 오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라이 한은 시안 렌의 동경을 닦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안 렌과 라이 한은 같은 스승 밑에서 거울 제작을 배웠다.
그들의 스승은 센 최고의 경장이라는 찬사를 들었으며 왕궁의 제례에 쓰이는 거울을 도맡아 만들었던 명인이었다.
젊어서는 왕궁에서 경장을 지냈는데 나이든 후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고 있었다.
시안과 라이는 둘 다 자질이 뛰어난 편이라 여러 제자들 중에서 일찍 두각을 나타냈는데, 시안은 은은하면서도 정교한 작품을 선호했고 라이는 아름답고 화려한 꾸밈에 뛰어났다.
“명인, 제자들을 참 잘 키우셨습니다. 저 두 사람은 젊은데도 정말 실력이 좋네요.”
“예. 우수한 아이들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난가요?”
“허허. 둘 다 재능이 있고 잘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니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 스승에게 그들의 우열을 물으면 스승은 미소 지으며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했지만 라이는 항상 스승이 시안의 작품을 더 좋아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봤자 사람들은 내 작품을 더 좋아해. 나중에는 결국 내가 더 이름을 떨치게 될 걸?’
라이 생각에 시안의 취향은 너무 수수했다.
고상한 척하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교한 세공 솜씨가 뛰어난 것은 인정하겠지만 전체적인 만듦새나 꾸밈에 있어서는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믿었다.
게다가 거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면, 사물을 더 잘 비출 수 있게 표면을 연마하는 솜씨는 시안이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시안은 온화한 성정이라 가끔씩 라이가 얕보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웃기만 하고 늘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기에 주변 사람들도 은연중에 제자들 중 첫째는 라이라고 대접해 주곤 했다.
그들이 갓 서른줄에 접어들었을 무렵 왕궁에서 사람이 왔다.
선왕이 붕어하고 신왕이 즉위한 지 반년쯤 되었던 시기였다. 그간 내명부들도 대폭 바뀌었고 새로 들어온 사람도 여럿이니 왕궁 내명부들이 쓸 거울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저는 이제 너무 늙었습니다. 이미 눈도 잘 보이지 않고 손도 떨려서 명을 받잡지 못하겠으나 제자들 중 두어 명의 공부가 나쁘지 않사오니 가히 명을 수행할 만합니다.”
스승은 연로함을 이유로 왕명을 사양하고 대신 라이와 시안을 추천했다. 두 사람은 수도로 올라가 왕궁에 납품할 거울을 만들게 되었다.
라이는 자신만만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실력을 보일 기회다. 왕궁 여인들이라면 당연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할 테고 그 방면은 시안보다 내가 더 뛰어나지. 분명 내 거울이 더 그분들의 마음에 들 것이다.’
각자 공방을 하나씩 받아 세 점씩의 거울을 제작하게 된 라이와 시안은 심혈을 기울여 최상의 거울을 만들어 냈다.
‘시안이 어떤 거울을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내 것보다 훌륭하진 못할 거다. 백동을 이처럼 맑게 갈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걸.’
침식을 잊고 오로지 거울에 매달린 결과물은 훌륭했다.
라이가 제작한 석 점의 거울 중에서도 마지막에 만든 모란을 형상화한 거울은 자신도 이보다 더 훌륭한 거울을 또 만들어 내지는 못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된 거울을 심사하는 날, 거울을 제출한 라이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하다. 과연 명인의 제자라 할 만한 솜씨다. 스승이 잘 가르쳤구나.”
궁내 그림 및 예술작품을 관리하는 청예원(淸藝院)의 원로들이 두 사람의 거울을 심사하고 윗전에도 올려 왕과 왕비, 태후와 비빈들이 보게 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풍성한 상이 내려졌고 왕명이 떨어졌다.
“시안 렌은 왕궁에 남아 경장으로 일하라. 라이 한에게는 충분한 포상을 하고 청예원에서 일하거나 귀향하거나 그 거취를 스스로 정하게 하라.”
라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시안이 왕가의 다음 경장으로 낙점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밑에서 일하거나 귀향하거나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시안이 만든 거울을 보길 청했고 청예원의 도제조가 직접 그에게 여섯 점의 거울을 모두 보여 주었다.
“자네의 거울도 물론 훌륭하지. 나이를 생각하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솜씨야. 기술적인 면에서는 자네나 시안 렌이나 차이가 없다고 여겨지네. 그러나 시안 렌의 작품은 그 고아함과 정교한 신비로움에 있어 이미 명인의 경지를 넘어서는 바가 있네.”
라이는 시안이 만든 거울을 노려보았다.
도제조의 평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안 역시 필생의 역작을 만들었던 것이다.
시안이 이번에 만든 거울 세 점은 참으로 명품이라 할 만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신의 작품보다 앞서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였다.
거울 표면을 맑고 깨끗하게 연마하는 기술만큼은 라이가 시안을 앞섰다.
그러나 그 시기의 경장이란 화장용 거울을 만드는 장인이 아니었다. 경장의 더 중요한 임무는 제례용 신물로 사용되는 거울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안의 거울에는 다른 이가 따라잡기 힘든 신기(神氣)가 깃들어 있었다.
라이는 타는 듯한 자괴감을 느꼈다.
왕궁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으나 시안의 아래에서 일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도저히 시안의 밑에서 일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더 이상 거울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 이토록 강한 질투심이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었는데, 어쩌면 그동안 계속 시안을 질투해 왔었는지도 몰랐다.
라이는 귀향했고 더 이상 경장 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마경장 일을 시작했다.
그의 마경 솜씨는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므로 곧 근동 제일의 마경장으로 소문이 났고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혼인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나 가끔씩 그의 평화를 깨는 일이 있었다.
“이봐, 그 얘기 들었어? 시안 렌 경장이 작위를 받았다는 거.”
“아하 들었어. 지난번 기우제에 사용한 거울 덕분이라지?”
“그러니까, 거울을 하늘에 비췄더니 비가 내렸다잖아. 정말 신묘하지.”
“이제 귀족이야, 우리 고을의 자랑일세.”
듣고 싶지 않은 시안 렌의 이야기는 잊을 만하면 들려왔고 꼬리표처럼 자신의 이야기도 따라오곤 했다.
“마경장 라이 한도 원래는 경장이었지?”
“시안 렌 경장과 동문수학했었지. 그이도 어렸을 때는 명인이 될 재목이라는 소릴 들었는데 아깝게 됐어. 지금은 아예 거울을 안 만들잖아.”
“하필 시안 렌이랑 같은 때를 타고났으니 실력으로 밀린 거지, 그래도 동문이라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지 않겠어?”
마을 사람들의 생각 없는 수군거림이라도 듣고 온 날은 공방에 들어박혀 뭔가 하나라도 부숴야 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속에는 어둠이 쌓여 갔다.
새로 부임한 태수가 시안 렌의 거울을 닦으라고 자신을 부른 날, 라이는 병을 핑계로 거절했으나 태수의 수하들이 결국 그를 끌어다 태수 앞에 세웠다.
“귀한 거울이니 손톱만 한 흠집이라도 내면 경을 칠 것이다. 무려 시안 렌의 작품이다. 옥처럼 깨끗이 닦고 광을 내거라.”
아름다운 거울이었다. 시안 렌의 고아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 거울을 닦는 라이의 마음은 검은 진흙처럼 어둡고 끈적했다. 들고 있는 숫돌로 백동 표면을 깨 버리고 싶었다.
마경을 끝내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자네 얼굴에 어둠이 가득하네.”
얼마 전 흘러들어와 뒷산 움막에 머물고 있다는 떠돌이 주술사 노인이었다.
“속에 화가 가득 찼어. 어때? 풀고 싶지 않나?”
“무슨 소리요?”
“내가 도와줄 게 있을 텐데.”
“시답잖은 소리 말고 가던 길 가쇼.”
주술사 노인은 약초로 검게 물든 이를 보이며 웃었다.
“곧 나한테 오게 될 거야. 기억해 두게. 자네가 원하는 건 내가 풀어 줄 수 있어.”
그로부터 얼마 후, 시안 렌이 귀향했다. 늦은 혼인을 하게 되어 고향에 들렀다고 했다.
혼인 상대는 수도 귀족의 딸이었다.
태수는 시안 일행을 위해 연회를 열었고 시안은 라이를 비롯한 옛 동문들까지 초대했다.
연로한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 경장 또는 마경장으로 일하고 있던 동문들은 기쁘게 연회에 참석했다.
라이가 이제 거울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시안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자네만 한 경장이 거울을 만들지 않는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야. 마경만 하기에는 재주가 아깝지 않나.”
누구 때문인데. 라이는 이를 악물고 억지 웃음을 짓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몸살을 핑계로 일찍 연회장을 떠나는 그를 굳이 쫓아나와서 배웅하는 시안이 더 달갑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는 아내를 보았다. 비슷비슷한 집안에서 그만그만하게 서로 맞춰 혼인한 아내는 이미 중년 여인의 태가 났다.
시안이 혼인하는 여자는 귀족의 딸인 데다 젊고 아름다운데.
내가 그보다 부족할 게 하나도 없었는데 우리 삶은 어째서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날 밤 라이는 뒷산을 올랐다.
“올 줄 알고 있었다네.”
움막에 관솔불을 밝혀 놓고 있던 주술사 노인은 정말 그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맞았다.
#작가의 말
“13일 마경장(磨鏡匠) 15명을 대령하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공조와 상의원 해당 관원을 국문하라!”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504년. 연산 10년 1월 14일.
경장(鏡匠)과 마경장(磨鏡匠)은 실제로 있었던 전문 직종입니다.
실록에도 연산군이 후궁들의 거울을 닦게 하려고 마경장을 한꺼번에 15명이나 불렀는데 수를 맞추지 못했다고 담당 관원에게 벌을 내리는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