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8화
13. 다시 보는 거울(3)
아실리를 좋아하니까 아실리가 하는 건 뭐든 다 따라하고 싶었는지 고양이 화장실에 쉬를 하고 나온 포이는 칭찬을 기대하는 눈으로 제이든과 아실리를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입이 벌어져서 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토끼가 모래 화장실을 쓴다는 얘긴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우리 포이 정말 똑똑하구나!”
토끼도 배변판을 쓰긴 하지만 청소가 쉽지 않다던데, 이렇게 모래 화장실에 쉬를 해 주면 얼마나 청소가 쉬운가. 게다가 아실리의 화장실은 청소도 필요 없는 자동 화장실인데!
아실리의 화장실은 사료 그릇과 마찬가지로 저절로 새 모래가 채워지고 용변을 본 모래는 사라지는 마법 화장실이었다.
.세시온 다미에르가 자신이 없어도 아실리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제이든에게 칭찬과 쓰담쓰담을 받고 난 포이는 깡충깡충 아실리에게 뛰어가서 동그란 머리를 쏙 내밀었다. 아실리가 칭찬하듯 귀와 머리를 핥아 주자 아주 뿌듯한 얼굴이 되어 골골거린다.
“토끼인지 고양인지 원.”
제이든은 웃으면서 다시 책에 집중했다.
* * *
다음 날은 아침부터 가랑비가 왔다.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마을에 내려가 플로렌스 부인과 합류했다.
레이크빌로 가는 마을마차는 느릿느릿 산길을 내려갔고 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신기한지 포이는 자꾸 천장을 쳐다봤다.
“야옹이랑 토끼를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시네요.”
플로렌스가 아실리를 쓰다듬으며 웃었고 제이든도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요. 방해는 안 할 겁니다.”
그녀의 시가는 꽤 큰 포목점을 하는 집으로 레이크빌의 유지쯤 되는 모양이었다.
저택이랄 정도는 아니어도 마당이 넓고 제법 잘 꾸며진 집의 대문에는 상중이라는 표시로 흰색 깃발을 단 하얀 등이 걸려 있었고 조문객들 때문인지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야옹이는 제가 안고 들어가도 될까요?”
비를 맞을까 봐 한쪽 팔로 아실리를 안고 포이를 어깨에 태운 채 우산을 받친 제이든이 불편해 보였는지 플로렌스가 손을 내밀었다.
아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품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아실리가 순하지만 아무나 따르는 아이는 아닌데, 아주머니를 참 좋아하나 봐요.”
“야옹아, 그러니? 고맙기도 해라.”
마당을 지나는데 본채에서 사람이 나왔다.
“숙모님, 이제 오세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키가 큰데 움직임이 낭창낭창해서 버드나무를 연상하게 하는 여자는 의아한 눈으로 플로렌스와 제이든을 번갈아 보았다.
“감정사를 데리고 오신다더니 웬 토끼와 고양이예요?”
“이분이 감정사야. 로스 감정사님, 제가 말씀드렸던 조카예요. 수잔이라고 해요.”
이름을 알지만 늘 감정사 총각이라고 부르던 플로렌스가 로스 감정사님이라고 깍듯이 소개하기에 제이든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정사 제이든 로스입니다. 플로렌스 부인 부탁으로 왔습니다.”
“잘 오셨어요. 어머니 유품도 있고, 봐 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두어 가지 있어요.”
제이든은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 다른 가족들과도 인사를 했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소. 그런데 우리 집에 뭐 감정사가 감정해야 할 만큼 대단한 물건은 없을 텐데 괜히 헛걸음한 거 아닌가 몰라.”
고인의 남편이라는 장년 신사는 딸과는 달리 몸집이 작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남자로 좀 소심해 보였다.
“2급 감정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모르긴 몰라도 감정료도 비쌀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일부러 모시고 온 건데 감정료는 제가 낼게요.”
“아니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플로렌스 부인 의뢰로 특별히 온 거니까 감정료는 일단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기의 보물 급이 나오지 않는 이상 감정료는 빵으로 받을 겁니다.”
제이든이 농담을 하고 나서야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풀어졌다.
다들 자리에 앉자 플로렌스가 말을 시작했다.
“사실 제가 감정사님을 모시고 온 건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전에는 긴가민가해서 말을 못 했는데 형님 유품 중에 동방에서 왔다는 골동 거울이 하나 있잖아요? 그게 제가 살 뻔했던 물건이거든요. 5년쯤 전에…….”
플로렌스는 처음 제이든을 만났을 때 제이든이 그 거울을 못 사게 말렸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해서요. 형님이 아끼셨던 거울이라 수잔도 애착이 있는 건 아는데 제대로 감정을 받아보고 싶어서 모시고 온 거예요.”
“5년이나 지났다면서 숙모님 보셨던 같은 거울이 확실한가요? 비슷한 물건일지도 모르고. 감정사분도 이렇게 젊은데 그런 물건을 볼 수 있을까요?”
수잔의 오빠라는 피터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리 집사람 눈썰미 몰라? 이 사람이 같은 거라면 같은 게 맞을걸? 삼 년 전에 한 번 본 제과점 케익 모양이 달라진 것도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플로렌스의 남편은 아내의 눈썰미를 단단히 믿는 듯했다.
“숙모님이 생각해서 모시고 와 주셨는데 일단 보여 드리죠, 뭐. 어머니가 몇 년 전에 그 골동품 상인이 왔을 때 거울이랑 몇 가지 사셨다고 들었어요. 다 가지고 와 볼게요.”
수잔이 시원스럽게 일어서더니 몇 가지 물건을 챙겨왔다.
문제의 거울, 그리고 로시난트 풍의 꽃병 한 쌍, 10호 정도 크기(약 53x41㎝)의 풍경화 한 점이었다.
제이든은 네 점의 물건을 훑어보았다.
“어머님께서 안목이 상당하셨네요.”
그는 우선 로시난트 풍의 꽃병 한 쌍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이 꽃병은 꽤 잘 만든 거지만 골동품은 아닙니다. 최근 삼십 년 이내에 만든 작품이고 로시난트의 유명한 ‘청포도와 새’ 화병을 본떠 만들었는데 똑같이 만든 모조품이 아니라 제작자가 창의적으로 디자인을 변형했네요. 크게 가격이 나가지는 않지만 장식품으로는 상당히 좋은 물건입니다.”
꽃병 한 쌍을 치워 놓은 뒤 문제의 거울을 앞에 놓자 예전엔 경험이 없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백 년쯤 전 제작된 백동경(白銅鏡)이다. 그때는 서방 대륙에 유리 거울이 이미 나와 있었지만 동방 대륙에선 여전히 청동이나 백동 거울이 주로 사용되던 시기였다.
거울면은 얇은 백동편이고 뒷면에는 청동판을 붙여서 그림을 새겨 넣은 전형적인 센 왕조 후기 거울인데, 이름난 장인의 물건은 아닌 듯하지만 정교한 장식이나 만듦새가 예사 솜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거울에서 구름처럼 넘실넘실 풍기고 있는 탁한 안개였다.
“뭔가 안 좋은가요?”
제이든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고 수잔이 물었다.
“예, 조금 자세히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주가 걸린 물건 같은데, 이거 혹시 내력을 볼 수 있을까?
제이든이 아실리를 돌아보자 거실 한쪽에 포이와 함께 있던 아실리가 살그머니 걸어와서 제이든의 다리에 몸을 붙이면서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포이가 조금 불안한 얼굴로 아실리를 따라왔다.
“제가 특이한 습관이 있어서요. 감정할 때 제 고양이가 옆에 있어야 더 집중이 잘 되거든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제이든이 안력을 돋워 거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거울을 감싸고 있던 검푸른 안개가 서서히 짙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흐려졌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수잔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마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제이든의 의식이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 * *
안개 속에서 여자가 울고 있었다.
흐트러진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등에 늘어뜨린 여자는 옛날 동방 풍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짧은 저고리나 폭이 넓은 치마, 소매나 허리 장식의 형태 등으로 볼 때 센 왕조 후기의 옷이었다.
안개가 점점 걷히면서 그녀의 모습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옷차림으로 보면 센의 하급 귀족 같은데 머리를 정리하지 않은 게 옷과 어울리지 않았다.
앞쪽을 보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려니 하면서 제이든이 의식을 그녀의 앞쪽으로 옮기는데 갑자기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죠?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요?”
억양이 좀 이상했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제이든은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들어갔던 유물의 환각 중에서 환각 속의 사람이 제이든을 인식했던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가 보이는 것 같았고 말까지 걸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멈춰 있는 그를 향해 여자가 달려오더니 팔을 부여잡았다. 아니,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그냥 통과해 버렸다.
여자인지 제이든인지 둘 중 하나는 보이기만 할 뿐 형체가 없는지 만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자는 제이든을 잡으려고 몇 번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만질 수가 없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 좀 데리고 나가 줘요. 여기서 나 좀 데리고 나가 줘요.”
난감해진 제이든이 그녀를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손 역시 그녀의 몸을 통과할 뿐 닿지 않았다.
“저, 여긴 어딥니까?”
제이든이 묻자 그녀가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모르고 들어왔어요? 여긴 거울 속이에요. 난 여기 갇혀 버렸어요.”
그녀가 긴 소매를 휘저었다.
“저 사람들도, 저기 저 사람도, 나처럼 여기 갇힌 사람들이에요.”
그제서야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흐릿한 덩어리들이 보였다.
여자처럼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흐릿한 덩어리들 속에는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어떤 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렸고, 어떤 것은 얼굴과 옷이 보일 정도로 뚜렷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으며 동방과 서방, 여러 시대의 옷차림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저런 덩어리에 갇히지 않아서 혹시 우릴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했는데.”
그녀는 기다란 소매로 눈물을 닦고 일어서더니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오랫동안 체념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이 오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려서, 우스운 꼴을 보여 드렸네요.”
쓸쓸하게 미소를 지은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다시 공중에 떠다니는 덩어리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내 말을 듣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도 못해요. 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차라리 나도 그랬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거울 속에 갇히게 된 건지는 아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제 부군이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거울이었는데 제게 줬어요. 몹시 마음에 드는 거울이라서 항상 침상 옆에 두고 아꼈답니다. 고운 숫돌로 갈아 주고 들기름을 발라 가며 광택을 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과거를 추억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제가 병이 들었지요. 의원도 병명을 알지 못했어요. 몇 달이나 시름시름 앓다가 나중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
“아픈 와중에도 매일 거울을 봤었답니다. 아직 젊어서 그랬는지……, 그러다 어느 날 저도 모르는 새 세상을 떴나 봐요. 사실 죽었는지도 확실히 모르겠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여기 갇혀 있었어요.”
그녀는 제이든의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처음엔 바깥이 보였어요. 울고 있는 부군도 보였고 거울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그래서 여기가 거울 속인 걸 알았죠. 날 꺼내 달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벽이 부서져라 두드리기도 했는데 아무도 날 보지 못하고 내 말을 듣지 못했어요. 그러다 차차 바깥이 안 보이게 되더군요. 이 막막한 공간에 나 혼자 두고.”
여자는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그녀는 얼굴을 들고 말을 이었다.
“죽은 자의 세상인가 생각했어요. 왜 나 혼자일까 한탄도 했었지만 시간이 자꾸 흐르면서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생각 안 하게 되었는데, 그럴 때 누군가가 들어왔어요.”
그녀는 공중에 떠다니는 덩어리들을 가리켰다.
“그동안 들어온 사람? 어쩌면 혼백일까요? 아무튼 저 사람들이 간격을 두고 한 번씩 들어온답니다. 몇 년만인지, 몇 달만인지 시간 가늠은 안 되지만.”
“…….”
“저 사람이 제일 나중에 들어왔어요. 바로 얼마 전에.”
제이든은 그녀가 가리키는 덩어리를 보았다. 사람의 형체가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덩어리였다. 눈을 감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아까 만났던 수잔을 몹시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