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7화
13. 다시 보는 거울(2)
딕 노인에게 팔자에 없는 꿈 해몽을 해 주고 온 다음 날, 제이든은 아침부터 냥퐁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포잇, 포잉, 포잇!”
“왜 그래? 왜 아침부터 이렇게 냥냥퐁퐁 법석이야?”
-깨우지 말라니까 결국 깨웠네.
포이를 말리던 모양인지 아실리가 침대 발치에서 포옥 한숨을 쉬었고, 포이는 아예 제이든의 베개 위에 올라와서 멱살을, 아니 목 부분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우리 포이 왜?”
“포잉, 포잉!”
포이는 제이든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짧은 앞발로 창밖을 가리켰다.
“아하, 라벤더베리가 다 익었구나.”
어느새 라벤더베리 열매들이 보라색으로 잘 익어서 마치 보라색 꽃이 환하게 핀 것 같았다.
“정말 예쁘다. 우와, 냄새 죽인다.”
창문을 열자 라벤더베리의 새큼달큼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화르르 밀려왔다.
“진짜 맛있겠다. 우리 라벤더베리 따러 가자.”
“포잉, 포잉.”
토끼는 좋아서 마치 작은 고무공처럼 퐁퐁 튀어다니며 제이든이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깡충깡충 뛰어나가는데 얼마나 빠른지.
“천천히 가 포이야, 아니 뭐 저렇게 빨라.”
-토끼니까 그렇지. 원래 빠른 애야.
제이든의 옆에서 걷는 아실리는 느릿느릿 살랑살랑 걷는 것 같아도 눈은 포이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집에서 이십여 미터 정도의 풀밭을 지나면 숲이 시작되는데 라벤더베리 나무들은 그 도입부에 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포이는 나무 밑에서 공처럼 퐁퐁 튀는 중이었다. 앞발을 몸 아래로 내리고 뒷발을 양쪽으로 펼친 채 뛰어오르는 토끼 특유의 자세가 만화영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귀엽다.
“와, 향기가 진짜!”
숲에 가까워질수록 진한 향기가 주변에 가득해 저절로 침이 마구 고인다.
제이든은 바구니를 놓고 장갑을 꼈다.
라벤더베리는 키가 큰 나무가 아니라 대부분 다 손으로 따는 게 가능하고 손이 안 닿는 높은 가지에 열린 것은 야생동물이나 새가 먹을 수 있게 남겨 둔다.
이미 향기를 맡고 온 작은 새들이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고 까치도 두어 마리 있었다.
작은 자두만 한 크기에 자두보다는 조금 단단한 라벤더베리를 쥐고 꼭지와 가지가 연결된 부분을 똑 꺾으면 꼭지까지 깨끗이 잘 떨어진다.
제이든은 과일이나 나뭇가지가 상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열매를 땄다.
물 한 번 거름 한 번 준 적 없는데도 산의 바람과 비, 햇빛만으로 이렇게 맛있는 과일을 내주다니 정말 고마운 나무다.
과수원에서 기른 라벤더베리를 청과물 가게에서 사 먹어 본 적이 있는데, 크기는 야생 라벤더베리보다 크고, 더 달고 부드럽지만 야생 라벤더베리 특유의 새콤하면서 풋풋한 맛이 없었다.
.야생 열매는 야생 열매만의 독특한 풍미가 있다.
“포잉, 포잉!”
포이가 팔짝팔짝 뛰면서 제이든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눈이 반짝반짝하고 코가 발름발름하는 게 금방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겠다.
“알았어. 조금만 먼저 줄게.”
제이든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라벤더베리 한 알을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농약도 안 치고 깨끗한 산에서 난 거니까 안 씻어도 괜찮겠지.
한 입 먼저 깨물어 보니 달콤한 과육이 입안에 가득 찬다.
“피잉?”
포이가 황당한 듯 제이든을 쳐다봤다. 왜 너만 먹느냐는 얼굴이다.
“너 하나 다 주면 너무 클까 봐.”
제이든은 반쪽 남은 라벤더베리를 잎새에 받쳐서 포이에게 주고 아실리에게도 하나 주었다.
아실리는 원래 라벤더베리를 좋아한다. 아는 맛이라 느긋하게 아껴 가며 맛을 보는 아실리와 달리 한 입 덥석 물어 본 포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포잇!”
한 번 기쁨의 탄성을 내지른 포이는 작은 앞발로 라벤더베리 반쪽을 붙잡고 냠냠냠 먹기 시작했다.
과육이 쪽쪽쪽 포이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토끼가 뭘 먹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자, 한 바구니 가득 땄으니까 우리가 먹을 건 충분해. 이제 들어갈까?”
포이는 도리도리 머리를 젓더니 깡충깡충 나무 주위를 돌았다. 조금 더 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럼 여기서 조금 더 놀아. 멀리 가면 안 된다.”
제이든이 나무 줄기에 비스듬히 기대앉자 아실리도 그의 옆에 와 앞발에 턱을 고이며 엎드렸다.
포이는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풀을 씹어 보기도 하고 새를 따라 뛰기도 하면서 놀았다.
아직 한낮이 되기 전이라 햇살도 강하지 않고 가을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평화로운 날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단 말야.”
라벤더베리를 깨물던 제이든이 입을 열자 아실리가 턱을 고인 채 눈만 위쪽으로 떴다.
-어제 딕 노인의 말 때문에 그러지?
“응.”
노인이 잘 모르고 한 말일 수도 있지만 플로렌스 부인이 그 거울을 다시 봤다고 한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이따가 마을에 한 번 더 가 봐야겠어. 오늘은 가게 연다고 했으니까.”
포이가 갑자기 끼익 비명을 지르며 뛰어와서 아실리 뒤에 숨었다.
까치 두어 마리가 깟깟거리며 포이 뒤를 쫓아왔다.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깡충거리며 풀밭 위를 뛰어오는 게 아기 토끼라고 상당히 얕본 모양이다.
“저리 가, 이 까치 녀석들아. 어쭈? 우리 포이 털 뽑혔네?”
등에 두어 군데 털 뽑힌 자리가 있었다.
까치 녀석들이 뽑아 놓은 건가? 내 이놈의 까치들을!
겁 없는 까치들이 겅중거리며 바로 앞까지 와서 깟깟거리자 아실리가 일어나서 사납게 하악질을 했다.
.깜짝 놀란 까치들이 푸르르 날아가고 포이가 빼꼼 머리를 내밀더니 아실리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퐁퐁 뛰었다.
내가 쫓아 줄 걸……, 제이든은 은근히 아쉬워하면서 라벤더베리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실리와 포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락가락하면서 제이든을 따라왔다.
* * *
“맞아요, 내가 그 거울을 또 봤지 뭐예요. 몇 년 되긴 했지만 흔한 물건도 아니고, 그때 딸아이 혼수로 마련해 둘까 하고 꼼꼼히 봤던 물건인 데다 감정사 총각이 너무 열심히 말리는 바람에 더 기억에 남았던 거울이거든.”
플로렌스 부인은 찾아간 제이든을 빵집 안쪽으로 들이고 차를 내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친척의 장례식이 있었다더니 우울한 모양이었다.
“가내에 슬픈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딕 아저씨 말씀을 들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아니야, 그렇잖아도 감정사 총각 오면 의논 좀 하고 싶었는데 잘 왔어요.”
그녀는 아실리에게는 계란과자, 포이에게는 말린 당근 잎을 주고는 아예 빵집 문을 닫고 ‘외출 중’ 표지판을 걸어놓은 뒤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 몫의 찻잔을 앞에 놓고 앉은 플로렌스 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남편네 본가가 산 아래 레이크빌에 있어요. 나도 시집가서 처음 몇 년은 레이크빌에 살았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빵집을 물려받게 돼서 다시 돌아왔지만.”
“예.”
“반년쯤 전에 우리 시누이, 그러니까 남편의 누나 집에 잔치가 있어서 일 좀 도와주러 갔는데 안방 화장대에 그때 그 거울이 떡하니 놓여 있지 않겠어요?”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때 그 거울이더라고요. 시누이한테 넌지시 물어봤더니 2년쯤 전에 그 골동품 마차 끌고 다니는 상인한테 샀다 그러잖아. 감정사 총각한테 안 좋은 물건이라고 들은 게 생각나서 찜찜하긴 했지만 이미 산 물건인데 괜히 안 좋은 소리 하기도 뭣하고 시누이네 집에도 별일 없어 보여서…….”
“…….”
“최근 몇 년 동안 시누이네 장사도 잘 되고 다 괜찮았거든요. 그날 잔치도 그 집 아들이 좋은 색시 만나 혼인하는 거였는데, 좋은 날 괜히 재수없는 소리 한다는 말이나 들을까 싶어 그냥 왔거든. 그담에도 두어 번 생각은 했는데 살기 바쁘니까 그냥 잊어버렸죠. 그때는 감정사 총각도 통 안 오고.”
한숨을 쉬는 그녀에게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시누이 댁에 무슨 일이 있나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플로렌스 부인의 눈이 갑자기 그렁그렁해졌다.
“어, 어제 장례 치른 게 그 시누이예요. 우리 남편이랑 애들은 아직 거기 있어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작년부터 시름시름 아팠다는데 말을 안 해서 몰랐어요. 얼마 전부터 급격히 병세가 나빠지더니 며칠 사이에 거짓말처럼 가버렸다고……. 좋은 형님이었는데, 나랑도 마음이 잘 맞았고.”
제이든은 나지막이 조의를 표했고 플로렌스 부인은 다시 말했다.
“혹시 시누이가 아팠던 게 그 거울 때문일까요? 내가 미리 말을 해 줬으면 괜찮았을까 싶어서 너무 마음에 걸리네요.”
“꼭 그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제이든은 5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때는 아직 감정사가 되기 전이라 골동품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막연한 기운밖에 느낄 수 없었지만 동방에서 왔다는 그 골동 거울에서는 확실히 탁하고 안 좋은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아실리도 그 거울이 안 좋다고 했었지.
비슷한 거울 그림을 책에서 봤는데 소유자가 줄줄이 병사했다고 했던가.
플로렌스 부인 때문에 말로 물어보지는 못하고 아실리를 힐끔 보았더니 계란과자를 먹으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게 다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지랖이 또 발동한 제이든이 그 거울을 한 번 보러 가야 하나 궁리하고 있는데 플로렌스 부인이 제이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감정사 총각, 그 거울 좀 봐줄 수 있을까요? 그게 아직도 그 집에 있거든. 아주 착하고 참한 조카딸도 있는데 그런 물건이 집에 있으니 너무 불안해요. 감정사 자격증도 딴 지 꽤 됐다 그랬죠? 내가 무턱대고 그 거울 안 좋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자격증 있는 감정사가 말하면 괜찮지 않겠어요?”
“말씀은 해 보셨어요?”
그녀는 또 한숨을 쉬었다.
“실은 유품 정리할 때 넌지시 떠봤는데 우리 조카딸이 그 거울을 아주 좋아하더라고. 엄마 유품이라고 하면서 아끼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안 좋은 소리는 못 했어요. 그냥 아는 감정사가 있으니 한번 보이고 감정이나 받아보자고 그랬지.”
“잘하셨어요. 제가 일 때문에 또 멀리 갈 예정이었는데 오늘 못 만나뵈었으면 그냥 떠날 뻔했네요.”
“그럼 내가 그 집에 얘기해 놓을 테니까 나랑 같이 가요.”
플로렌스 부인은 즉시 우편국으로 달려가더니 레이크빌에 비둘기를 날렸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한 시간 만에 답신이 돌아왔고 다음 날 점심때 레이크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집에 돌아온 제이든은 참고가 될 만한 책을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거울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적 상징물이나 애정의 증표로도 많이 쓰이지만 저주의 도구로도 심심찮게 쓰이는 물건이라 자료가 적지 않았다.
“아실리, 그때 네가 그 거울 그림을 책에서 봤다고 했잖아?”
-응, 근데 정확히 어느 책에서 봤는지 모르겠어.
아실리는 미안한 듯 머리를 낮추면서 앞발로 코를 문질렀다. 웬만한 자료는 사전처럼 기억하고 있는 아실리인데 이번엔 정확한 책이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자료를 좀 봐 놓고 내일 실물을 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그나저나 플로렌스 부인 정말 눈썰미 좋으시다. 나는 그 거울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때는 제이든이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었잖아. 감정 공부도 하기 전이고. 그거 탁한 기운이 돈다는 거 알아본 것만 해도 대단하지.
책을 챙기던 제이든이 머리를 갸웃했다. 아실리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포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포이는 어디 갔어?”
-쉬 마렵다고 하던데.
거실 한쪽에 마련해 준 토끼용 배변판을 쳐다봤지만 포이는 없었다.
“어디 갔지?”
그때 포이가 그 옆의 고양이용 모래 화장실에서 톡 튀어나왔다.
“아니, 포이! 고양이 화장실을 쓴 거야?”
“포잇!”
포이는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로 제이든과 아실리를 쳐다보았다.
#작가의 말
사진의 토끼는 예전에 누가 장째로 길에 내다버린 걸 구조해 와서 입양갈 때까지 임시보호했던 아이인데요.
임보하는 동안 우리 집 고양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사이좋게 지내더니 모래 화장실 쓰는 걸 배웠지 뭡니까.
토끼가 고양이 화장실 쓰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