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36화 (3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6화

13. 다시 보는 거울(1)

아니 우리 포이,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하고 구석에 숨어 있기만 하더니 언제 이렇게 된 거야?

제이든은 포이를 보면서 서울에 있는 조카가 떠올랐다. 조카가 두 살쯤 됐을 때부터 사람만 보면 아장아장 현관에 걸어가 삑삑이 신발을 집어들고 밖에 나가자고 ‘어야, 어야,’ 하면서 현관문을 가리키곤 했다.

‘우리 포이가 딱 그 짝이네. 한눈 팔면 사고 치는 것도 비슷하고.’

* * *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마을에 나온 제이든은 은행에 들러 일을 본 뒤 우편국으로 향했다.

그가 처음에 새 가게인 줄 알았던 아룬빌의 우편국은 우편집배조(郵便集配鳥)들의 공간을 앞뜰과 뒤뜰로 나누어 놓았다. 뒤쪽의 조용한 공간에는 은퇴한 집배조들이 살고 현역들의 공간은 앞쪽 정원에 있다.

지붕이 있는 넓은 새장이 마련되어 있지만 새들이 정원에 나와 놀 수 있도록 낮에는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집배조들이 놀라지 않도록 개나 고양이는 따로 대기실에 격리하게 되어 있었다.

“아실리 왔구나. 오랜만인데 미안, 아실리는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걸 알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 대기실에서 기다려. 오늘은 깜찍한 토끼 친구도 있네?”

우편국 직원 미란다는 동물을 좋아하는 아가씨라 아실리와 포이를 보고 반색을 했다.

“제이든 씨는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베로데인에 두 통, 세렌토에 한 통, 에테노리움에 한 통, 그리고 사서함 사용할게요.”

“베로데인 직통 비둘기 두 마리, 세렌토 직통 까마귀 한 마리, 에테노리움은 직통이 없습니다. 베로데인까지 비둘기를 보내시고 베로데인에서 매로 교체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이든은 우선 우편국 한쪽에 마련된 칸막이가 있는 책상에서 우편물을 작성했다.

.집배조의 다리에 부착하는 우편통은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얇고 특수한 종이를 돌돌 말아서 넣는데, 일반 글씨로 쓴다면 내용을 얼마 적지 못한다.

우편국에 비치된 타자기는 일반 글자로 타이핑한 내용을 우편통용 종이에 점자로 바꿔 출력해 주는데 그냥 보면 점만 줄줄줄 찍힌 것 같지만 역시 우편국 판독기로 판독하면 내용을 읽을 수 있고 상당히 많은 내용을 적어넣을 수 있었다.

대부분 의뢰 답변서인 집배조용 우편물을 작성해서 미란다에게 전한 뒤 사서함실에 입실했다.

델리움 우편국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지구본처럼 생긴 영상구에 손을 대고 작동을 시작했다.

.제이든에게 오는 모든 서신은 집배조가 배달한 것도 다 사서함에 등록되므로 영상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확인이 가능하지만 집배조를 거치지 않고 영상구를 사용해 서신을 보내려면 상대가 사서함 사용자라야 가능했다.

제이든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만 해도 아룬빌에는 영상사서함이 없었는데 작년에 드디어 이 마을 우편국에도 영상사서함이라는 문명의 이기-마법의 이기가 맞으려나-가 들어왔다.

.아직 사용하는 사람은 제이든밖에 없는 것 같지만.

“어디 보자. 이 주소가 맞나.”

제이든은 니콜레타가 알려 준 사서함 주소를 확인한 뒤 그림 몇 장을 송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매개체는 아무래도 그와 함께 넘어온 해송박물관 유물들 중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해송박물관의 유물 중 어떤 것이 몇 점이나 이곳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기억나는 대로 해송박물관 소장 유물들을 자세히 그려 놓고 친분 있는 박물관이나 골동품점 등 관련 계통 사람들에게 보내고 혹시 비슷한 유물을 보게 되면 알려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번에 니콜레타의 골동품점을 알게 되었으니 니콜레타에게도 그림을 보내 놓았다.

우편 및 이메일-영상사서함은 물론 이메일이 아니지만 기능이 비슷해서 제이든은 혼자 이메일이라고 부르고 있다-업무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와 보니 포이는 유리창에 붙어서 대기실 밖 정원의 새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배조들은 잘 훈련된 새들이라 우편국의 정원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정원 안에서 노는데, 우편국 밖에서 커다란 회색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오더니 대기실 창문 바로 앞, 포이의 코앞에 내려앉았다.

포이는 깜짝 놀라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창문에 코를 붙이고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비둘기도 포이가 신기한지 창문 앞에서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새 특유의 동작으로 기우뚱거리며 구구 소리를 내었다. 다리에 빨갛고 조그만 우편통을 달고 있는 게 집배조인데.

“티나, 사무실로 바로 들어와야지 왜 이쪽으로 왔어?”

미란다가 제이든을 배웅하러 나왔다가 비둘기를 부르자 비둘기는 구구구 울면서 미란다에게 날아가 팔에 앉았다.

“대기실에 고양이랑 토끼가 보이니까 신기했나 보네요.”

비둘기의 다리에서 우편통을 벗긴 미란다가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고생했어 티나, 가서 물이랑 모이 먹고 좀 쉬어.”

구구 대답한 비둘기가 정원의 비둘기장 쪽으로 날아가서 다른 비둘기들과 목을 비비며 인사를 하고 물을 먹기 시작했다.

“미란다 씨, 수고하세요. 자, 그럼 우리는 빵집에 가 볼까?”

제이든이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미란다가 불렀다.

“잠시만요!”

“예?”

미란다는 티나의 다리에 달려 있던 손가락만 한 우편통에서 방금 꺼낸 기다란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제이든 씨한테 왔는데요?”

“아 정말요?”

“판독해서 사서함에 넣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출력 가능한가요?”

“그럼요. 금방 해드릴게요.”

잠시 후 미란다는 출력한 종이 두어 장을 제이든에게 건네주었다.

-어디서 온 거야?

아실리가 제이든의 다리에 꼬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브리오 미술관 학예사한테서 왔네. 동방 유물 특이한 거 보면 알려달라고 내가 부탁해 놨었잖아. 처음 보는 유물이 하나 나왔대.”

브리오 미술관 학예사와는 예전에 감정 일 관련으로 만난 일이 있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어서 해송박물관의 유물 외에도 내력을 알 수 없고 처음 보는 동방 유물이 나타나면 알려 달라고 했는데 이번에 낯선 유물을 보았다고 연락한 것이다.

“길을 조금 돌아가기는 하지만 브리오에 들러 가면 좋겠다. 서화라는데 이쪽 세계는 서화가 그렇게 흔하지 않잖아. 어쩌면 내가 찾는 물건일지도 몰라.”

-그러지 뭐. 우리가 날짜 정해 놓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삐이잉!”

제이든과 아실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포이가 볼을 부풀리면서 제이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포이 잘 모르는 얘기만 해서 삐졌어? 빵집 들르고 청과물 가게 가서 채소도 좀 사자.”

빵집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제이든에게 누군가 길 저편에서 큰소리를 쳤다.

“감정사 총각, 마침 잘 만났네, 거기 좀 기다려!”

“딕 아저씨 아니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일전에 장미목 파이프 건으로 이웃집 제프 노인과 말다툼을 했다던 딕 노인이다.

연배는 제프 노인과 같은데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화내기 때문에 꼭 아저씨라고 불러야 한다.

빵집 플로렌스 부인의 삼촌뻘 되는 친척이기도 한데 사람 좋고 경우 바른 플로렌스와는 달리 좀 심술맞고 말이 많아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데가 있는 노인이었다.

급히 길을 건너온 딕 노인은 헐떡거리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숨 좀 고르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제이든이 그렇게 말해도 성질 급한 노인은 숨도 가라앉기 전에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 길이여?”

“빵집 가는 중인데요.”

“그럼 가도 소용없어. 오늘 가게 닫았거든.”

“오늘 휴일도 아닌데 닫았어요?”

“산 아래 레이크빌에 친척집 초상이 나서 장례식 갔어. 가족들 다. 내일 올 거야.”

“아, 그럼 오늘 빵은 못 사겠네요.”

딕 노인은 제이든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감정 부탁할 게 있어.”

“감정이요?”

“그렇지.”

“어떤 물건인데요?”

“꿈이야.”

“예?”

“꿈이라니까. 내가 꿈을 꿨는데,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모르겠어. 횡재할 꿈이라는 사람도 있고 죽을 꿈이라는 놈도 있더라니까.”

제이든은 난감해서 입맛을 다셨다.

“할아버지, 아니, 아저씨, 저는 오래된 물건 감정을 주로 해요. 그림이나 글씨도 감정하고 유물도 감정하고. 그렇지만 꿈 해몽은 못 하는데요.”

“왜 못 해? 물건 보기만 하고 사람한테 좋은지 안 좋은지도 안다면서?”

“예?”

“플로렌스가 그러던데? 전에 골동 거울인가 뭔가 사려고 했는데 자네가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물건이라고 말려서 안 샀다고.”

“아……, 그런 일이 있기는 했었죠.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어떻게 아세요?”

“얼마 전에 플로렌스가 그 얘길 했거든. 그 거울을 다시 봤다고. 근데 자네 말이 정말 맞는 거 같다 그러더라고. 그때는 감정사도 아니었는데 정말 용하다고.”

“…….”

“걔가 원래 눈썰미가 좋거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유심히 본 거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니 같은 물건이 맞을 거야. 그 얘기 하면서 왠지 얼굴이 좀 안 좋던데.”

제이든이 잠시 생각에 잠긴 걸 보고 딕 노인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그렇고 내 꿈 좀 감정해 달라니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니 꿈 해몽이랑 감정은 다른 건데…….”

“달라 봐야 거기서 거기 아녀. 아무튼 배운 사람이니 우리보단 낫겠지. 한번 듣고 생각 좀 해 봐.”

무작정 떼를 쓰는 딕 노인을 보며 제이든이 난감해하는데 아실리가 꼬리로 제이든의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야아옹, 냐옹.”

-해몽 그까짓 거, 내가 해 줄게. 얼른 하고 가자. 포이 터지겠다옹.

어깨 위의 포이가 양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린 채 콧김을 퐁퐁 내뿜고 있었다.

* * *

“그렇지, 그렇지, 내가 좋은 꿈일 줄 알았어. 테오 자식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쁜 꿈이니 몸조심하라고 악담을 했단 말이지.”

술통에 빠져 죽는 꿈이라 어지간히 마음이 불안했던지 딕 노인은 목청이 세 배는 커졌다.

“진짜 좋은 꿈 맞아?”

아실리가 시키는 대로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없는 제이든이 살짝 아실리에게 물었다.

어깨에서 내려온 포이를 그루밍하며 달래 주고 있던 아실리가 새침하게 냐옹거리며 대답했다.

-개꿈이야. 그래도 물에 빠져 죽는 꿈은 원래 길몽이라는 말이 있어서 좋게 얘기했으니까 술이나 조심하라고 그래.

아저씨, 우리 고양이가 그러는데 약주는 좀 줄이시는 게…….

“그런데 자네도 참 별종이네. 고양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웬 토끼까지 달고 다녀? 집도 못 지키고 쥐도 못 잡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뭐하러 키우나?”

그러면서도 좋은 해몽을 들어 기분이 괜찮은지 딕 노인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당근 조각을 꺼내 던져 주었다.

“말먹이하고 남은 게 있었네. 옛다!”

먹보 토끼는 당근을 보고 잠깐 눈빛이 흔들린 것 같았지만 조그만 입을 꼭 다물더니 뒷발로 바닥을 탕 구르며 돌아앉았다.

짤막한 꼬리가 팽그르르 흔들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뾰로통한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태도였다.

-안 먹어.

그래, 우리 포이는 자존심이 있는 토끼라고.

제이든은 얼른 포이를 안아 올리고 청과물 가게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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