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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35화 (3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5화

12. 용의 눈(2)

제이든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실리는 감탄하는 얼굴로 콧등을 제이든의 뺨에 비볐다.

-대단해, 제이든, 혼자서 용의 눈과 에트루리안의 서를 연결하다니! 역시 그 책이 유물의 비밀을 풀기 시작하는 열쇠였나 봐.

“그렇지? 아직은 몇 글자 못 읽었지만 자꾸 연습하면 더 많이 읽게 되지 않을까?”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제이든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워 포이를 잡고 위로 치켜올려 비행기를 태우듯 움직였다.

아기 토끼가 좋다고 꺄르륵거리는 걸 보면서 아실리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음엔 혼자 시도하지 마. 원래 이렇게 유물의 내력이 막 보이기 시작할 때가 위험해.

은회색 고양이는 앞발로 수염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살짝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니콜레타 님도 제이든한테 유물에 먹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잖아. 제이든은 워낙 유물과 감정이입하는 정도가 강해서, 감정사로는 좋은 능력이지만 조금 위험하기도 해.

“조심할게, 걱정 마. 이것 봐, 포이가 비행기 놀이 좋아한다. 아실리도 한 번 태워 줄까?”

-아니, 됐어. 고양이는 바닥에서 네 발이 다 떨어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아실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이든이 포이에게 비행기를 태워 주는 걸 보다가 말했다.

-애기 떨어뜨릴라. 고양이는 집어던져도 똑바로 착지할 수 있지만 토끼는 아마 못 할걸? 조심해.

아실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건성으로 듣지 말고. 지금 카이엔에 1급 감정사가 몇 명 있는지 알아?

“그야 세 명이지. 다들 하도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원래는 네 명이 될 뻔했어.

“?”

제이든은 짧은 팔다리를 한껏 공중에 펼친 채 꺄륵거리는 포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아실리를 바라봤다.

-십여 년 전에 오레스 아켈리오라고 촉망받는 감정사가 있었어. 아카데미 때도 우수했지만 졸업 후 1급 감정사 칼리스타 클론의 제자로 들어간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 2급 감정사가 된 후 발전이 빠르고 유물과의 연대감이 좋아서 대륙의 네 번째 1급 감정사가 탄생하는 거 아니냐고 다들 기대했는데.

아실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랬는데?”

-유물의 내력을 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진 건지, 환각에 너무 집착한 건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하다가 어느 날 환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식물인간처럼 잠에 빠진 채 깨어나지 못해서 마탑에서 관리하는 보호 시설에 들어갔어. 8년쯤 전 일인데 아직도 자고 있을 거야. 칼리스타 클론이 제자를 깨울 방법을 찾느라 온 세계를 헤매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 해결책을 찾았다는 말은 못 들었어.

“…….”

제이든은 지난번에 ‘해변의 기수’의 내력을 보다가 자신도 환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던 일을 기억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세시온 같은 천재도 2급에서 1급으로 넘어가는 단계일 때 유물에 먹힐 뻔한 적이 두어 번 있었는걸. 오레스 아켈리오 그 사람도 혼자 연습하다 그랬대. 제이든, 유물의 내력을 보고 나오고 하는 걸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혼자 하지 마. 나랑 꼭 같이해. 이상하면 옆에서 깨워 줘야 하니까.

고양이의 초록색 눈동자에 걱정이 담긴 것을 보고 제이든은 마음이 뭉클해져서 아실리를 껴안았다.

“그래, 조심할게.”

아실리도 다정하게 제이든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볐다.

“포이잉?”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포이가 다가오더니 제이든과 아실리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래, 그래, 너도 안아 줄게.”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한꺼번에 끌어안고 털을 북북 긁어 주었다. 가슴이 절로 포근해졌다.

* * *

-한 번 더 설명해 봐.

“그러니까 황무지야. 멀리 산이 보이니까 사막은 아닌데 황무지였고 바람이 많이 불었어. 말을 탄 사람들이 있었고 맨 앞에 선 지도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할 때 얼굴이 보였는데 금빛 눈이었어.”

제이든은 그 후 며칠 동안 아실리의 입회하에 용의 눈을 통해 에트루리안의 서를 보는 것을 몇 번 시도해 보았다.

책의 다른 페이지는 열리지 않았고 언제나 용의 눈 그림이 있는 부분만 열렸는데, 글자는 더 읽을 수 없었지만 거울 속에 비쳤던 황무지 장면은 조금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장면에 대해 아실리에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 사람들 옷차림은 어땠어?

“기다란 두건을 머리에서부터 얼굴까지 두르고, 옷차림은…… 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려서 보여 줄게.”

펜과 스케치북을 가져온 제이든이 재빨리 거울 속에서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자 봐, 이런 장면이었어.”

그림을 들여다 본 아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귀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잘 그렸당, 특징이 정확하게 살아 있어.

“어떤 장면인지 알겠어?”

-응, 잠깐만 있어 봐.

잠시 수염을 만지면서 눈을 감고 있던 아실리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머리를 들었다.

-아래층 거실 서가에 ‘서방복식문화사전’이라는 책이 있어. 내려가서 그거 잠깐만 보자.

제이든이 ‘서방복식문화사전’이라는 두꺼운 책을 꺼내 펼치자 아실리가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동방 사람이 편찬했기 때문에 제목이 서방복식문화사전인데 카이엔에서 만든 책보다 더 자세하게 잘 만들었어. 앗, 넘어갔다.

아실리는 넘어가 버린 책장을 다시 넘기려고 발톱을 책장 밑으로 살짝 밀어넣으면서 말했다.

-고양이 발은 이런 작업엔 좀 불편해. 발톱을 세우면 책장 넘기긴 좋지만 잘못하면 종이가 찢어지고, 발톱을 발 안으로 집어넣으면 책장이 잘 안 넘어간단 말야.

“삐잉?”

옆에 붙어앉아 있던 포이가 동글동글한 자기 앞발을 척 내밀어 보였다.

제이든은 또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 발은 더 안 되지. 고양이 발은 발톱을 자유롭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고, 문도 열 수 있고 꽤나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지만 토끼 발은…….

-웃지 마, 애기 자존심 상해.

아실리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기특하다는 듯 포이를 한 번 핥아 준 뒤 펼쳐진 책장을 제이든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봐, 맞지? 제이든이 그린 그림이랑 똑같잖아.

옛 에테노른의 병사들, 북부의 다하르와 서부의 엘데온이 아직 왕국을 이루기 전 북서부의 황무지까지 진출해 괴물과 마수들을 물리치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바탕을 조성했다는 에트루리안의 병사들, 그들의 여행복과 전투복 등의 그림이 나와 있었다.

-아주 오래된 무덤의 벽화에 남아 있는 걸 기록했다는데, 에트루리안의 지휘 아래 북서부에 원정 간 병사들의 옷이라고 해. 그 벽화가 상상화라는 말도 있었는데 제이든이 본 거랑 옷이 같은 거 보니 진짜였네.

“그러네.”

제이든도 머리를 끄덕였다. 북서부의 환경 때문에 변형했는지 그 원정군의 옷은 일반적인 에테노른의 군복과는 달랐다.

-선두의 지휘자 눈이 금빛이었다고 했지?

“응.”

-에트루리안의 눈이 금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렇다면 제이든이 본 것은 에트루리안의 북서부 원정 때의 장면이 맞을 것이다.

“나한테 왜 그걸 보여주는 걸까? 그 책에는 많은 역사가 있을 텐데 딱 그 부분만 보여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텐데.”

제이든과 아실리가 턱을 고이고 앉아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동안 심심해진 포이는 거실 안을 돌아다니며 돌아다녔다. 창문 밑에서 폴짝폴짝, 책장 앞에서도 깡충깡충, 주방 찬장 앞에서도 뒤뚱뒤뚱.

쿠당탕!

“포이, 괜찮아? 안 다쳤어?”

폴짝 뛰어 책장 선반에 매달렸던 포이가 중심을 잃고 떨어지면서 커다란 책 한 권이 같이 떨어졌다. 포이는 한 바퀴 뒷구르기를 한 채 놀란 얼굴로 펼쳐진 책 위에 철푸덕 앉아 있었다.

“삐이…….”

혼날 거라 생각했는지 귀가 양쪽으로 축 처지면서 동그란 눈이 울먹울먹해진다.

“괜찮아, 괜찮아. 다음부터 조심해. 이렇게 큰 책이 머리에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포이가 떨어뜨린 책은 가죽 장정이 되어 있는 지도책으로 크기도 크기지만 금속 테두리 장식까지 되어 있어 무겁고 단단했다.

잘못해서 머리나 목에 맞았다간 아기 토끼 하나쯤은 저 세상으로 보낼 수도 있을 흉기인데, 큰일날 뻔했네.

제이든이 포이를 안아 올려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보는 동안 아실리가 포이가 떨어뜨려 깔고 앉았던 책에 눈길을 주었다.

-제이든, 이것 좀 봐.

고양이는 앞발로 펼쳐진 책장을 짚었다.

-북서부, 레타논 영지 지도인데.

“정말? 우연일까?”

레타논 영지는 옛 다하르와 엘데온 왕국이 겹쳐지는 국경 부분, 천 년 전 영웅 에트루리안의 원정 이전에는 괴물과 마수들만이 들끓었다는 바로 그곳이다.

용의 눈과 에트루리안의 서가 제이든에게 보여 준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고.

아실리가 초록색 눈을 제이든에게 돌렸다.

-이거 아무래도 거기.

“아무래도 거길 가 봐야 하는 걸까?”

제이든과 아실리가 동시에 말했다.

용의 눈과, 에트루리안의 서와, 포에니 토끼가 동시에 같은 곳을 보여주다니.

이거야말로 그곳에 가 보라는 운명적 계시가 아닐까?

“포이가 알고 한 건 아니겠지만.”

-포이는 포에니 토끼잖아. 우연이라도 반려인의 운에 관여하는 아이니까 자기도 모르게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려준 걸지도 몰라.

“포잉?”

포이는 천진한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이든과 아실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지도책을 들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다음 목적지를 레타논으로 잡고 가는 길을 좀 살펴보자. 의뢰는 레타논 가는 길에 처리할 수 있는 의뢰만 받고.”

급하게 가야 하는 곳은 아니니까 가는 길에 의뢰도 처리하면서 가야지.

“난 레타논은 안 가 봤는데, 아실리, 가 본 적 있어?”

-응. 두 번 가 봤어.

“얼마나 걸릴까?”

-한 달 정도 잡고 가면 될 거 같아. 도보를 줄이고 말이나 마차를 많이 쓰면 더 빨리도 갈 수 있고.

전에는 아실리와 둘이 다녔지만 이제 포이도 데려가야 한다.

제이든은 포이를 보면서 뭔가 더 준비해야 하는 게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제이든, 언제 출발할 생각이야?

“이삼일만 더 있다 출발하자.”

창밖을 바라보던 제이든이 아실리를 돌아보며 웃었다.

-우리 포이 라벤더베리 맛은 보여 주고 가야지. 이제 거의 다 익었는데.

고운 연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라벤더베리 나무들이 창 너머로 보였다.

라벤더베리 소리에 포이가 팔짝 뛰며 앞발을 손뼉치듯 마주쳤다. 코가 또 발름발름 움직이면서 침을 꼴깍 삼킨다.

“긴 여행이 될지도 모르니까 마을에 좀 다녀와야겠어. 은행 일도 좀 보고 우편국 가서 의뢰 답변도 보내고 필요한 것도 좀 사고.”

제이든은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나 혼자 다녀올게. 아실리는 포이 데리고 집에서 쉬고 있어.”

“포잉?”

아실리는 알았다는 듯 야옹 대답을 하고 길게 몸을 펴면서 소파에 드러누웠는데 포이는 뒷발로 발딱 일어서더니 당황한 얼굴로 제이든과 아실리를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도리도리 굴리던 포이가 아실리를 잡아당기면서 뒷발을 바닥에 통통 쳤다.

“포오잉…….”

바닥에 드러누웠던 아실리가 앞발로 눈을 가리면서 돌아누웠다. 포이는 포기하지 않고 아실리의 등을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린다.

“포이 왜 그래?”

아실리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더니 체념한 듯 야아웅 울었다.

-마을 같이 가자고 그러는 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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