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4화
12. 용의 눈(1)
광대한 서재 안은 고요한 책의 바다 같았다.
제이든이 걸어가는 걸음마다 양쪽 서가에 줄지어 선 책이 소리 없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책의 바다.
아홉 점의 전설적 유물이 진열된 서가는 그 바다 속에서 보물섬처럼 떠올랐다.
에트루리안의 서처럼 누가 썼는지, 누가 읽었는지 대략의 전설이라도 전해지는 유물도 있지만 단지 이름만 전해질 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전혀 정보가 없는 유물들도 있었다.
용의 눈도 그러했다. 단지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어떤 정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뒤로 물러선 채 전체 서가를 지켜보던 제이든이 맨 위쪽 첫 칸부터 하나씩 손을 대어 보았다.
용의 눈을 포함한 모든 유물 앞에서 보이지 않는 벽이 그의 손을 가로막았다. 마지막 에트루리안의 서만이 벽 없이 그의 손을 허락했다.
“지난번엔 어떻게 용의 눈을 만질 수 있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제이든이 책을 쓰다듬다가 다시금 용의 눈을 향해 손을 올렸다.
“아?”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용의 눈에 손이 닿았다.
제이든은 책을 보고, 다시 용의 눈을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에트루리안의 서를 만진 후에 용의 눈에 손을 대면 벽이 사라지는구나.
아마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벽이 생기는 거고.
다른 것도 가능할까? 제이든은 책을 만진 후 다른 유물에도 손을 뻗어 보았지만 벽이 사라지는 것은 용의 눈 하나뿐이었다.
“혹시 꺼낼 수도 있을까?”
그는 벽이 사라지기 전에 조심스럽게 용의 눈을 꺼내 보았다.
진열된 모습은 5년 동안 보아 왔지만 꺼내 보는 것은 처음이다.
용의 눈을 꺼내 보자 왜 이 거울이 용의 눈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 거울의 형태라면 사각이나 원형이지만 이 거울은 특이하게도 타원형에 양쪽 끝이 갸름하게 빠지는 아몬드형으로 만들어졌다.
.중앙 부분의 둥근 면을 남기고 갸름한 양쪽 가장자리에 세공이 들어가 있어서 마치 신화 속의 용이나 봉황의 눈처럼 보였다.
유리 거울이 나오기 전 사용된 청동제 동경(銅鏡)으로 크기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이며 손잡이가 없었다.
.몸체를 감싸고 있는 테두리가 몸체보다 조금 두꺼웠으며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덩굴 모양으로 이루어져 손잡이 대신 잡을 수 있는 형태였다.
옛 동경 중 서방 대륙의 거울은 손잡이가 있고 동방 대륙 쪽의 것은 손잡이가 없으니 이 거울은 동방 대륙에서 건너온 물건이라 볼 수 있는데 형태나 세공이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고 독창적이어서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거울을 들어 보자 흐릿하게 상이 맺힐 뿐 사물이 제대로 비치지는 않는 게 닦는다 해도 거울의 용도로 쓸 수는 없을 듯했다.
원래 이런 옛 동경은 얼굴을 비춰 보는 용도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물 또는 주술 도구 등으로 사용되는 일이 많았고 이 동경 역시 그런 용도로 제작된 걸로 보였다.
손잡이가 없는 동방 대륙의 옛 동경은 대부분 뒤쪽에 꼭지가 몇 개 있고 시대별 특성을 지닌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어 여러꼭지거울이라고 부르는 형태가 많다.
거울을 뒤집어 본 제이든은 흠칫 놀랐다. 당연히 거울의 뒷판이 있을 거라 생각한 면에 또 하나의 거울이 있었다. 아무 장식이 없는 중앙의 둥근 부분이 마치 눈동자처럼 제이든과 눈을 마주쳤다.
“양면 청동 거울은 처음 보는데……, 어?”
거울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던 제이든은 거울의 테두리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울을 눈 모양이라 본다면 눈머리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눈꼬리까지 가늘게 나전 장식이 되어 있는데 가장 첫 번째의 작은 조각이 조개가 아니었다.
“이거 에트루리안의 서 표지에 있는 것과 똑같잖아?”
제이든은 거울을 에트루리안의 서 옆에 가져다 대고 비교해 보았다.
“맞아, 똑같네.”
거울에 붙은 첫 번째 조각은 책 표지 제목 앞에 붙어 있는 꽃잎 모양 조각과 똑같았다.
재질을 알 수 없지만 같은 것임에는 분명했다.
“이게 뭐지? 진주 조개 같지만 조개는 분명히 아닌데.”
표면을 살짝 문질러 보자 은은한 광채가 나더니…… 점점 빛무리가 크게 번졌다.
“어어?”
제이든이 놀라고 있는 동안에 손에 있는 거울과 호응하듯 서가에 놓여 있는 책이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장식무늬 조각에서 시작된 빛은 마치 서로 이끌리듯 가까워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실처럼 책과 거울 사이에서 두 개의 빛무리가 서로 이어지더니 딸칵, 책의 죔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표지가 서서히 떠오르듯 위로 열렸다. 그리고 속표지가 천천히 넘어가고 책장이 물결치듯 파르륵 넘어가다가 한 군데서 정지했다.
제이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가까이 가서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았다.
읽을 수는 없지만 우아한 글씨체가 페이지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활자로 찍어낸 것처럼 정묘하지만 이건 찍어낸 게 아니고 누군가 직접 적은 필사본이다.
책의 아래쪽 귀퉁이에 그림이 실려 있었다. 역시 재질을 알 수 없는 안료로 정밀하게 그려진 그림은 바로 ‘용의 눈’, 제이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울이었다.
읽고 싶다. 천 년 동안 아무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이 책의 내력을 보고 싶다.
간절한 열망이 제이든의 마음에서 솟아올랐다.
이 정도의 유물이라면 내게 자신의 내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는 한껏 안력을 돋워 펼쳐진 책장에 집중했으나 그가 기다리는 환각은 찾아오지 않았다.
역시 이렇게 쉽게는 안 되는 건가?
제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들고 너무 힘을 주어서 뻐근해진 눈을 비볐을 때 용의 눈에서 뻗어나와 책과 이어진 빛무리가 그를 유혹하듯 흔들렸다.
제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거울을 들어 책을 비춰 보았다. 용의 눈이 서서히 유리처럼 투명해지더니 그 눈을 통해 책장의 글씨가 보였다.
“백룡의…… 눈.”
돋보기처럼 거울을 통해 보는 글씨가 아른아른 제이든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실제로 읽을 수 있다기보다는 마치 뜻이 눈 속으로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거와…… 미래를 보여 주는…….”
글씨의 뒤쪽으로 금빛 모래가 휘날리는 황무지의 정경이 잠시 떠올랐다.
.모래바람을 막으려는 듯 머리부터 얼굴까지 두건을 두른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선두에 선 사람이 제이든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싶었는데 거울의 상이 흐려졌다.
빛무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잠깐 몇 자 보였던 글자도 다시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리 비추고 저리 비춰 봐도 다시 보이지 않았다.
책이 혼자서 후루룩 덮이더니 죔쇠가 다시 채워졌고 거울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것처럼 몸을 떨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와! 와! 와!”
용의 눈을 제자리에 돌려 놓자 즉시 보이지 않는 막이 생겼다.
제이든은 어린 소년처럼 탄성을 토하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에트루리안의 서를 읽었어. 몇 글자 안 되지만 읽었다고.
한참 만에야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유물들을 쭉 둘러보았다.
에트루리안의 서와 용의 눈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구나. 얼마나 많은 비밀이 이 유물들 안에 숨어 있는 걸까. 좋아, 앞으로 더 많은 비밀을 캐낼 수 있을 거야. 다음에는 좀 더 읽고 말 거야.
* * *
서재를 나와 책과 거울에 대해 얼른 아실리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침실을 들여다보니 잠자고 있는 아실리의 옆구리가 비어 있다. 포이는 어디 갔지?
이층을 둘러보아도 포이가 없다.
아래층을 찾아보려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래층에서 조그맣고 하얀 솜뭉치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아기 토끼는 엎드려서 거실 소파 밑을 들여다보고, 다시 폴짝폴짝 뛰어가 주방을 들여다보고, 창밖도 보고 싶은지 거실 창틀 위로 뛰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힘이 달리는지 몇 번 폴짝폴짝 뛰어도 창틀까지 닿지 못하자 시무룩하게 귀가 처진 채 다시 여기저기를 기웃기웃했다.
뭘 찾는 거 같은데?
찾다 지쳤는지 양쪽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주방 입구 쪽에 두 다리를 뻗고 앉은 포이가 안쓰러워진 제이든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포이를 불렀다.
“포이, 뭘 찾니? 도와 줄까?”
“피잇?”
포이가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팔짝 뛰어오르더니 제이든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도도도 달려온 포이가 제이든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꼭 매달린다.
“삐이이…….”
어리광이 가득한 소리를 내면서 토끼가 제이든의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붙였다.
“혹시 나 찾은 거야?”
“포이잉.”
작은 머리가 까딱이면서 귀가 같이 흔들렸다.
귀여워라, 자고 일어나니 내가 없어져서 찾아다녔나 봐. 마음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소파 밑도 들여다보고 책장 뒤도 보고 했어? 혹시 나 그런 데 들어갔을까 해서?”
제이든이 포이를 안아 올려 얼굴을 비비자 포이는 피이이 소리를 내면서 앞발로 제이든의 얼굴을 밀었다.
흠, 아직 이 정도 스킨쉽까진 허락해 주지 않는구나.
그래도 포이가 먼저 달려와서 다리에 매달렸다는 것만으로 흠뻑 기분이 좋아진 제이든은 포이를 안고 침실로 돌아갔다.
-둘이 어디 갔다 와?
잠에서 덜 깬 아실리가 앞발을 쭉 뻗으면서 아직 몽롱한 눈으로 물었다.
“실리, 나 서재에 가 있었는데 포이가 나 찾아다녔나 봐. 보자마자 달려와서 안겼어. 처음이야, 먼저 와서 안긴 거.”
엄밀히 말하면 안긴 건 아니고 다리에 매달린 거지만.
-팔불출 초보 아빠 같아. 제이든.
포이를 안고 둥기둥기 흔드는 제이든을 보면서 아실리가 생글 웃었다.
포이는 수줍은 듯이 바둥거리며 제이든의 품에서 빠져나가더니 아실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폭 묻었다.
강아지나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이 동물을 자식 취급하면서 스스로 엄마라거나 아빠라고 부르는 마음을 잘 몰랐었는데 이래서 그러는 거구나. 어이구 내 새끼.
결혼도 안 한 스물여섯 살짜리 총각은 아빠미소를 가득 지은 채 포이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실리는 제이든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고, 처음부터 아실리가 제이든을 돌보는 입장이어서 자식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고 형제자매 같은 느낌이었다. 오히려 아실리가 누나 같을 때가 많았달까.
그런데 포이는 없던 부성애도 바닥까지 다 끌어낼 것 같다. 제이든은 아실리에게 얼굴을 묻고 숨어 있는 포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다가 혹시라도 아실리가 섭섭할까 얼른 아실리의 머리와 목도 긁어 주었다.
-제이든, 얼굴이 빨개. 많이 흥분한 거 같은데 설마 포이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아니, 아니야.”
물론 포이가 내가 없어진 줄 알고 찾아다닌 것도 감동이긴 하지만.
제이든은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가슴을 쓸어내린 후 입을 열었다.
“실리, 내가 서재에서 뭘 찾아냈는지 알아? 에트루리안의 서와 용의 눈 사이에 밀접한 유대관계가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