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3화
11. 미식가 고양이와 먹보 토끼(2)
“포이 피곤하지 않아? 나 혼자 후딱 나가서 사오고 아실리랑 포이는 집에서 기다리면 어때?”
“피잇!”
포이가 귀를 뒤로 접으면서 뾰로통한 얼굴로 뒷발을 탕 굴렀다.
포에니 토끼는 지능이 높아서 말은 못 해도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다더니 정말 그렇다.
포이가 원래 모습 그대로 보인다면 함부로 밖에 데리고 나가기 어려웠겠지만 니콜레타의 환영 마법 덕분에 다른 사람에겐 일반 토끼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니 데리고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제이든은 나갈 준비를 하고 니콜레타에게 받은 초록색 배낭을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걸쳐 메었다. 이거만 있으면 잔뜩 장을 봐도 무겁지 않고 양손도 자유로우니 안심이다.
무려 전대 마탑주가 선물해 준 마법 배낭을 장바구니로 쓴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니콜레타 님, 죄송합니다.
“포이는…… 몸줄이라도 해야 하나?”
아실리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지만 포이는 처음 데리고 나가 보는 거라서 그냥 나가도 될지 좀 걱정이 되었다.
아직 아기인 데다 겁이 많은데, 마을에서 뭔가에 놀라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지구였다면 고양이건 토끼건 모두 이동장에 넣어야겠지만 카이엔 사람들은 사나운 동물이 아니라면 이동장이나 몸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포이야, 마을에 가면 절대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알겠지? 아실리나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해.”
포이가 앞발을 모으고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큰 귀도 머리와 함께 까딱거렸다.
* * *
“아유, 오랜만이에요. 감정사 총각. 야옹이도 안녕!”
아룬빌 마을, 단골 빵집의 플로렌스 부인이 반색을 하며 제이든을 맞았다.
“너무 오래 안 와서 무슨 일 있나 했어요.”
“일 때문에 먼 지방에 갔었어요. 아줌마네 빵 냄새는 언제나 끝내주네요.”
“그런데 웬 토끼를 데리고 왔네?”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던 포이는 낯선 사람이 자신을 보자 귀로 얼굴을 가리면서 제이든의 머리 뒤로 얼굴을 숨겼다.
“낯가림을 하나 봐. 너무 귀엽다.”
“엄마 잃은 아기 토끼라서 키우게 됐어요.”
“그랬구나, 복 받을 거예요. 자, 우리 야옹이, 이거 좋아하지? 언제 오나 하고 아줌마가 맨날 구워 놨단다.”
“미야옹.”
아실리가 다정하게 플로렌스의 손에 머리를 비빈 후 계란과자를 받아먹었다.
“맛있지? 어쩐지 오늘은 네가 올 거 같아서 다른 날보다 많이 구웠는데 잘 됐구나. 크림도 많이 넣었단다.”
제이든의 어깨에 앉은 채 아실리와 플로렌스를 바라보고 있던 포이가 제이든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울었다.
“포오이잉…….”
포이가 우는 소리를 들은 플로렌스가 머리를 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귀엽네요. 아가 토끼도 뭔가 먹고 싶구나? 그런데 어쩌지? 여기는 빵집이라 토끼 줄 만한 게 없네. 아, 잠깐만.”
빵집 안에 들어갔던 플로렌스는 그릇에 건초를 좀 담아 나왔다.
“이거 당근 케익 만들고 남은 당근 잎이란다. 잎도 연하고 향도 괜찮아서 신제품 만들 때 허브 대신 써볼 수 있을까 하고 말려 뒀는데 먹어 볼래?”
“포잇, 포잇!”
포이는 좋아하면서 앞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제이든이 아실리 옆에 포이를 내려 주고 그릇을 앞에 놓자 포이는 즐겁게 먹기 시작했다. 전에 당근 조각을 줬을 때보다 말린 당근 잎을 더 맛있게 먹는다.
“야옹이 줄 계란과자 만들 때 당근 잎도 말려야겠네.”
잘 먹는 두 마리를 보면서 플로렌스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빵집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봉지에 소시지 빵을 몇 개 담아 나왔다.
“감정사 총각은 이걸 좋아하지? 덤으로 줄 테니 가져가요.”
“아직 빵도 안 샀는데 왜 덤이 먼저 나와요?”
“오랜만에 왔으니까 선물이야.”
“너무 퍼주셔서 빵집 망하겠어요.”
“나 안 망하게 자주 와요. 고양이랑 토끼도 꼭 데리고 오고.”
이 빵집은 언제 와도 기분이 좋다.
제이든은 빵과 계란과자를 넉넉히 샀다. 아주머니는 인심 좋게 말린 당근 잎도 큰 봉지에 가득 채워주었다.
“아가 토끼 처음 만난 선물이야.”
“포잇!”
다시 제이든의 어깨에 올라탄 포이는 귓전에 대고 기분 좋게 골골거렸다.
입에 맞는 걸 먹어서 기분이 좋구나. 그런데 토끼도 골골거리나? 골골송은 고양이만 부르는 게 아니었던가?
제이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선 가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루크 아저씨.”
“오, 제이. 오랜만이네. 그동안 왜 그렇게 소식이 없었어? 아니 어깨 위에 그건 뭔가? 웬 토끼야?”
“엄마 잃은 아기 토끼라 거두기로 했어요.”
“고양이랑 같이 키워도 괜찮을까? 고양이가 잡아먹지 않으려나?”
“캬아옹!”
아실리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날카롭게 울었고 루크는 킬킬 웃었다.
“그래, 미안하다. 얘는 꼭 사람 같다니까.”
“생선 몇 마리 살까 하는데 뭐가 좋아요?”
“마침 잘 왔어. 오늘 제일 물 좋은 건 이거지, 이거.”
루크가 보여 준 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전어였다.
“가을 전어 맛있는 건 알지? 이번에 들여온 놈들은 특히 실해.”
“우아, 맛있겠어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
“엉? 며느리가 왜 집을 나가?”
“아니, 그냥, 제 고향에 있는 속담이에요. 가을 전어가 그만큼 맛있다고요.”
“며느리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을 전어는 정말 맛있지.”
“얼마예요?”
“키로당 15실버, 제이 오랜만에 왔으니까 키로당 13실버에 줄게.”
카이엔에도 전어가 있다.
그리고 여기도 역시 전어는 가을 전어를 제일로 쳐 준다.
아실리는 탐스럽게 기름이 오른 전어를 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포이는 생선에는 관심이 없는지 제이든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머리가 좀 간지러웠지만 제이든은 꾹 참았다. 포이는 그동안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제이든에게 먼저 와서 안기거나 무릎에 앉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제이든이 안아 주거나 쓰다듬어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먼저 와 주지 않는 게 좀 아쉬웠는데 머리카락이라도 포이 스스로 만지는 게 대견하다 싶었다.
전어도 몇 마리 사고, 혹시 몰라 개 사료며 고양이 간식 등을 파는 가게에 가보니 다행히 알팔파도 있어서 알팔파 건초도 좀 샀다.
이미 5년째 드나들고 있는 마을이다 보니 다들 제이든과 친숙하다.
산골 마을이라 제이든이 산속에 살며 수련하고 있는 감정사라는 건 알지만 얼마나 유명한 감정사인지는 모른다. 직업 때문에 큰 도시로 자주 출장 나간다는 걸 알 뿐.
장날에 가끔 마차에 물건을 싣고 오는 방물장수 수준의 상인 외에는 골동품점 같은 가게가 없어서 제이든 로스라는 이름값을 모르기도 하고.
“감정사 총각, 잠깐만 이리 와 볼 텨?”
“예, 왜 그러세요, 제프 할아버지?”
“이거 장미목인지 아닌지 좀 봐 줘, 작년에 내가 살 때 장미목이라고 샀는데 옆집 딕 노인이 자꾸 아니라고 우기잖어.”
노인이 내민 것은 담배 파이프였다.
도시에 나가면 박물관이나 귀족 가문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돈을 싸들고 오는 2급 감정사는 파이프를 받아들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장미목이 맞아요. 할아버지. 나무도 좋고 모양도 잘 빠졌네요. 얼마 주고 사셨어요?”
“30실버, 33실버 달라는 거 좀 깎았어.”
“30실버요? 잘 사셨네요. 좋은 물건인데요. 파이프는 좋지만 담배는 좀 줄이세요.”
“그려, 그려. 자, 이거 감정료여.”
“아니 무슨 감정료예요. 파이프 하나 봐 드렸는데.”
“그래도 가져가. 직업인데 공짜로 일 시키면 되나.”
제이든은 제프 노인이 쥐여준 코퍼 동전 몇 개를 받아들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마을 밖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면 이런 재미가 있다. 물론 산골 마을이라고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만.
* * *
“마법 배낭 덕분에 장을 편하게 봤다. 많이 샀네.”
주방 탁자 위에 장 본 것을 풀어놓은 제이든은 물건을 정리한 후 손을 씻었다.
“자, 오랜만에 밥 한번 해 먹어 보자.”
아실리와 포이가 주방 문간에 앉은 채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제이든은 먼저 쌀을 씻어 냄비밥을 안쳤다.
이 주방에 가스불은 없지만 화염의 마석으로 작동하는 화덕이 있다.
.처음에는 마석 불조절을 잘못해서 주방을 태워먹을 뻔하는 바람에 아실리에게 구박을 받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화염의 마석 사용도 능수능란해졌다.
“이제 전어를 구워 볼까?”
기름이 잘 오른 전어는 지구의 전어보다 조금 크기가 크고 색이 더 선명한 것 외에는 다른 게 없었다. 은백색의 배와 초록색 등이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 아주 신선해 보였다.
생선 가게 루크가 이미 기본 손질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냥 씻어서 굽기만 하면 된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키친타올로 물기를 제거한 후 간이 잘 배라고 사선으로 칼집을 내었다. 두 마리는 소금을 살짝 뿌려서 잠시 재워두고 한 마리는 소금 없이 먼저 구웠다.
-내 거지?
아실리가 제이든의 옆에 와서 살랑살랑 맴을 돌았다.
프라이팬에서 구워지는 전어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향도 카이엔 전어가 조금 더 강한 것 같았다. 문간에 서 있던 포이가 깡충거리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오더니 코를 발름발름했다.
“냄새 많이 나지? 포이는 아마 싫어할지도 모르겠네.”
“피잇.”
포이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실리 줄 것을 먼저 구워 놓고 식히는 동안에 소금 뿌려 재워 놓았던 전어를 마저 구웠다. 기름이 자르르 배어나오는 전어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에 제이든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자, 밥 다 됐다. 먹자.”
윤기가 자르르하게 잘 지어진 쌀밥과 전어구이, 싱싱한 채소 몇 가지, 이거면 제이든의 오늘 밥상은 충분하다.
“김치만 있으면 딱인데.”
웬만한 요리는 다 해낼 수 있는데 김치는 재료가 달라서 그런지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한국에서 먹던 김치 맛이 나질 않아서 늘 아쉬웠다.
“아실리는 요거.”
간을 하지 않고 구워서 적당히 식힌 전어 한 토막을 아실리의 접시에 담아 주고 포이에게는 말린 당근 잎과 알팔파를 주었다. 포이가 좋아하는 사과도 한 조각 얇게 잘라서 담아 주고.
“자, 먹자!”
잠시 셋 다 아무 말 없이 먹는 데 집중했다.
“어흑,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야!”
카이엔 음식도 나쁘지 않지만 몇 달이나 카이엔 음식만 먹다가 갓 지은 쌀밥을 먹으니 맨밥도 꿀맛인데 거기다 전어구이까지 있으니 너무 맛있다. 김치만 있으면 만점인데.
“맛있지, 얘들아?”
-응. 생선이 아주 좋다옹.
“포이포잉.”
아실리와 포이도 아주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실리는 계란과자, 제이든과 포이는 사과로 후식까지 먹고 나니 아실리와 포이는 또 졸린 모양이었다.
“포이이.”
포이가 눈을 꿈벅거리더니 많이 먹어 동그랗게 부푼 배를 앞발로 끌어안은 채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우린 한숨 잘게.
아실리가 어미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를 옮길 때처럼 포이의 뒷 목덜미를 물고 이층 침실로 향했다. 포이가 봉제인형처럼 아실리의 입에 달랑달랑 매달린 채 졸면서 계단을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보며 웃던 제이든은 혼자 서재로 향했다.
에트루리안의 서와 용의 눈을 다시 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