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2화
11. 미식가 고양이와 먹보 토끼(1)
은빛과 보랏빛의 안개가 제이든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서서히 청색과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벌써 집에 가까워졌나 봐. 이 포탈 속도도 빠르고 이동감도 좋다. 니콜레타 님이 정말 실력자네.”
-마탑주를 아무나 하겠어. 사람 좋은 할머니처럼 보여도 한때 은창의 마녀라는 별명을 얻었던 마법 전사인걸.
아실리는 앞발로 코를 문지르면서 아련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는 참 예쁘셨는데.
청색과 갈색의 안개가 짙어졌다.
개인적으로 제작한 사설 포탈은 제작자의 성향을 많이 반영한다. 니콜레타의 포탈은 그녀의 취향대로 은빛과 보랏빛이 강조되었고 세시온 다미에르의 포탈은 그의 성향에 맞춰 청색과 갈색 안개로 이루어졌다.
“저번에 공용 포탈 썼을 때는 멀미가 나서 힘들었는데 이 포탈은 참 편안하네.”
공간의 흔들림이 서서히 약해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멈춰섰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점점 옅어지다가 모두 사라지고 시야가 깨끗해졌다. 책이 가득찬 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시온의 포탈은 서재 한쪽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었다.
-집이다, 집이다옹.
아실리가 길게 기지개를 켜며 포탈 밖으로 걸어나오더니 서재 바닥에서 기분좋게 뒹굴었다. 집에 돌아와서 기쁜 모양이구나.
사실 이 집은 제이든의 집이라기보다는 아실리의 집이다. 제이든도 이제 차원을 건너온 지가 벌써 5년 차라 제법 자기 집처럼 정이 들었지만 당연히 아실리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아실리는 제이든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긴 세월을 이 집에서 살아왔으니까.
“먼저 에트루리안의 서를 제자리에 놓고 그담에 씻고 한숨 자자.”
제이든은 배낭에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꺼냈다.
투명한 마법 보호막에 싸인 책을 들고 서재의 가장 안쪽 서가를 향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에 늘어선 서가와 벽의 그림, 층층이 쌓인 책 등을 두리번거리던 포이는 아실리가 제이든의 뒤를 따라가자 화들짝 놀라면서 아실리를 놓칠세라 깡충깡충 뒤를 따랐다.
서재 가장 안쪽까지 들어온 제이든이 안쪽에서 세 번째 서가의 아래쪽 두 번째 선반에 있는 책 한 권을 손으로 눌렀다.
서가가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반대쪽의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위로부터 네 단의 선반이 있는 서가, 한 단마다 세 개의 칸이 나눠져 있고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위쪽에서부터 여덟 칸은 이미 범상치 않아 보이는 유물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세시온이 찾아 놓은 유물들이었다.
제이든은 세 번째 단의 마지막 칸 받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에트루리안의 서를 올려놓았다. 사각의 받침대는 책을 올려놓자 마치 꺼져 있던 불이 켜지듯 빛나면서 아름다운 청색으로 물들었다.
.원래부터 책이 받침대와 함께 제작되기라도 한 듯이 꼭 맞게 자리를 잡으면서 은은하게 빛나던 청색 빛무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이 책도 못 만지게 되나?”
세시온이 먼저 찾아 둔 여덟 개의 유물은 제이든이 만질 수 없었다.
유물이 놓인 칸마다 투명한 보호막이 있어서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손이 통과하지 않았다.
제이든은 시험삼아 책 바로 옆 칸에 놓여 있는 은 술잔의 칸에 손을 가까이해 보았다. 말은 술잔이라고 하지만 성인 남자의 손만큼이나 크고 사람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세공이 된 은잔이다.
.지금은 사라진 옛 난쟁이 종족, 대장장이로 유명한 그들 중에서도 이름난 명인이 만들었다는 ‘노을의 성배’였다.
성배가 들어 있는 칸에 제이든이 손을 가져다 대자 보이지 않는 벽이 그의 손길을 막았다.
“역시 안 되네.”
이번엔 에트루리안의 서를 살짝 만져 보았다. 다른 유물과 달리 그의 손을 막아서는 벽이 없다. 책 위에 손을 얹자 표지의 자개 장식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어떻게 생각해? 아실리? 내가 찾아 온 유물이라서 이것만 만질 수 있는 걸까?”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와 유물 서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제이든이 찾아 온 유물이니까 만질 수도 있고 펴 볼 수도 있는 걸지도.
“펴 봐도 읽지는 못하지만.”
제이든은 뒤로 물러서서 서가 전체를 한 번 훑어보았다.
아홉 점의 전설적인 유물이 자리한 서가는 그 자체로 어떤 보물창고보다도 진귀하고 아름다웠다.
“어떤 박물관에도 이만큼 훌륭한 콜렉션은 없을 거야.”
홀린 듯한 눈으로 유물들을 차례차례 보고 난 제이든이 그만 서가를 닫으려고 다시 가까이 갔을 때였다.
“냐아옹!”
-저것 좀 봐.
아실리가 한쪽 앞발을 들어 서가의 위쪽을 가리켰다.
“어?”
맨 윗칸 가운데에 있는 유물, ‘용의 눈’이라는 별명이 있는 거울이 은은한 녹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거울은 갑자기 왜 빛나는 거지?”
제이든이 손을 들어 올려 용의 눈을 가리고 있을 보이지 않는 벽을 톡톡 건드렸는데 갑자기 서가 안으로 손이 쑥 들어갔다.
“으앗!”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면서 손을 탈탈 털었다.
“아실리! 여기 손이 들어갔어!”
아실리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들어갔지? 한 번 더 해봐.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넣어 보았다.
역시 손이 들어간다. 여태까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거울 표면에 손이 닿았다.
혹시 해서 다른 유물들도 만져 보려고 시도했으나 거울을 뺀 일곱 가지 유물은 역시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만져 볼 수 없었다.
“이상하네, 왜 저거 하나만 만질 수 있게 됐지? 책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서가 앞을 빙글빙글 돌던 제이든이 거울을 다시 만져 보려고 하는데 어느새 다시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 이상하네. 왜 지금은 또 벽이 생겼어?”
-저기, 제이든.
아실리가 그를 불렀다.
-나중에 천천히 하고 일단 포이를 재워야 할 거 같아.
돌아보니 포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동그란 몸통 위에 얹힌 동그란 머리가 흔들리는 오뚜기처럼 꾸벅거리는 중에 기다란 귀가 둘 다 앞으로 늘어져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아실리도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나도 자야 돼. 고양이가 이렇게 오래 깨어 있으면 힘들어서 못 버텨.
“그래, 그만 방으로 가자.”
책과 거울의 비밀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제이든은 포이를 안고 서재 입구로 향했다. 아이고, 멀기도 해라.
서재 입구 쪽 벽에 걸린 ‘해변의 기수’ 앞에서 잠시 멈췄던 제이든은 다시 문을 향했다.
경황이 없어서 저 그림은 결국 못 샀네. 언젠가 또 기회가 있겠지.
경매장에서 이노시카가 낙찰받은 ‘해변의 기수’는 그녀가 가져갔지만 골동품점의 ‘해변의 기수’는 사고 싶었는데, 글로비스를 떠나기 전 짬을 내어 연락해 봤을 때 이미 판매되었다는 말을 들어 아쉬웠다.
그러나 제이든은 언젠가 키타이너의 그림을 꼭 다시 만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끝없는 서가 사이를 통과해 서재 문 밖으로 나올 때쯤 포이는 이미 깊이 잠들어서 도롱도롱 코를 고는 중이었다.
.침대 발치에 포이를 내려놓고 욕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오니 아실리와 포이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동그랗게 몸을 만 고양이에게 작은 토끼가 안기듯이 감싸여 잠든 모습은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포이의 기다란 귀가 아실리의 목덜미 위에 늘어져 있고 조그만 앞발로는 아실리의 꼬리를 꼭 끌어안은 채였다.
‘영상구, 영상구.’
제이든은 허둥지둥 예전 감정 공부 초기에 유물 기록용으로 사 놓았던 영상구를 찾았다. 크기랑 무게가 좀 있는 물건이라 짐 된다고 안 가지고 다니게 됐었는데.
기록이 필요하면 그림으로 그리거나 가까운 마법물품 대여소를 찾아 대여하거나 했는데, 이럴 때 쓰네.
잠든 아실리와 포이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고 난 제이든은 흡족하게 영상구를 침대 옆에 놓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좀 비싸더라도 해상도 높은 영상구 하나 사야지. 저거 사고 몇 년 지났으니까 요즘은 크기도 좀 작아지지 않았을까?’
발목 부근에 아실리와 포이의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몸이 닿는 게 기분이 좋다.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와서 제이든도 어느새 깊이 잠이 들었다.
* * *
“냐옹.”
“포잉?”
“미야옹.”
“포잇!”
뭔가 냥퐁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제이든이 눈을 비볐다.
침대 위에 아무도 없고 혼자 누워 자고 있었다. 요 꼬맹이들은 벌써 깼나?
머리를 들어 보니 창가에 고양이와 토끼가 앉아 있었다. 오동통한 뒤태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으니 더 귀엽다.
잠들 때는 늦은 저녁이었는데 길게 잤는지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포이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창틀에 대고 앉은 채 앞발로 창밖을 향해 손짓발짓을 하고 있는데 아실리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다.
“왜 그래?”
가까이 가자 아실리가 바깥쪽 숲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저거 따러 가자고 그러는 거야.
포이가 동글동글한 눈을 반짝이며 제이든에게도 손짓을 했다. 귀가 쫑긋하게 위로 서서 약간 뒤로 젖혀진 게 몹시 집중한 모습이다.
집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나무 몇 그루에 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아하, 어느새 라벤더베리가 빨갛게 익었네.”
바람에 향기도 살짝 풍겨오는 것 같다. 제이든도 저절로 입에서 신맛이 나면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포잇!”
포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릴 기세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안 돼, 안 돼, 저거 아직 덜 익은 거야. 지금 먹으면 좀 시어. 색깔 보니까 일주일 정도면 연보라색으로 변하겠다. 그때 먹어야 젤 맛있어.”
라벤더베리는 이름은 베리지만 자두 정도의 크기인데 다른 베리류와 달리 늦여름에 아주 작은 구슬 모양으로 열린다.
.그 후 가을 내내 커지면서 익어가다가 늦가을에 완전히 익는다. 카이엔에서도 중부 지방에 가장 많이 나고, 북부와 동부, 서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남부의 더운 지방에서는 나지 않는다.
잘 익은 라벤더베리는 새콤달콤한 맛과 향기가 일품이다.
딸기와 자두의 중간쯤 되는 맛인데 독특한 단맛이 아주 감칠맛이 있다. 제이든이 카이엔에 온 후 먹어본 카이엔의 먹거리 중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맛이었다.
“포이는 아직 아기라서 저런 거 먹어본 적이 없을 텐데 본능적으로 맛있는 걸 아는 모양이네. 아직 조금 덜 익긴 했는데 몇 개만 따 줘 볼까?”
-안 돼, 아기한테 덜 익은 거 먹이면 배탈 나.
새들은 좀 덜 익은 것도 맛있는지 와서 쪼아 먹곤 하던데, 미식가인 아실리는 잘 익은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포이야, 아실리가 안 된대. 아직 좀 더 있어야 해.”
“피잇!”
포이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더니 뒷발로 창틀을 탕 굴렀다.
귀가 양쪽으로 비행기 날개처럼 뻗었다. 고양이 반려인들이 전문용어로 ‘마징가 귀’라고 하는 모양새다.
.고양이도 심기가 불편하면 귀를 이렇게 양쪽으로 뻗는데 포에니 토끼도 그러는구나. 귀가 긴데 빳빳하게 마징가 귀를 하니까 정말 비행기 프로펠러처럼 보였다.
“포이 뭔가 맛있는 걸 줘야 할 텐데 오랜만에 집에 와서 별로 먹을 게 없네. 우리 마을에 맛있는 거 사러 갈까? 포이 좋아하는 사과랑, 당근이랑, 알팔파랑…….”
“포잇!”
뺨에 먹이 채운 다람쥐처럼 볼따구니를 부풀리고 있던 포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양쪽으로 뻗어 있던 귀도 금방 위로 쫑긋 선다.
창틀에서 깡충 뛰어내려 문 쪽으로 총총총 달려간 포이가 이쪽을 돌아보며 빨리 나가자는 듯 폴짝폴짝 뛰었다.
“씻고 옷이나 제대로 입고 나가야지. 조금만 기다려.”
“냐아아…….”
길게 울음 끝을 빼면서 느릿느릿 포이 쪽으로 걸어가던 아실리가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나도 제철생선이랑 계란과자, 사줄 거지? 응?
“포잇, 포잇!”
미식가 고양이에 먹보 토끼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