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1화
10. 집으로
차를 다 따른 주전자가 다시 한번 뚜껑을 애교 있게 달칵거리고 바로 섰다.
카이엔 대륙으로 넘어온 후 여러 가지 마법을 봤지만 이렇게 자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물건을 볼 기회는 많지 않아서 제이든도 신기한 눈으로 주전자를 지켜보았다.
“자, 마셔 보렴, 얘가 차 맛을 꽤 잘 낸다.”
니콜레타가 손가락으로 찻주전자의 뚜껑을 살짝 쓰다듬고는 찻잔을 손에 들었다.
“예쁜 주전자인데 솜씨도 좋군요.”
제이든이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감탄하자 찻주전자는 기쁜 듯 주둥이에서 따뜻한 김을 폭 내뿜었다.
“렌 시대 주전자인 것 같은데 이렇게 움직이는 건 니콜레타 님의 마법 때문이지요? 어떤 유물이나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다. 아무 유물이나 이렇게 할 수는 없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무릎담요를 끌어 올린 니콜레타가 무릎을 콩콩 두드렸다.
“아주 오랜 기간을 살아온 명품은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자아를 갖게 된단다. 왜 우리가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유물들이 가끔 있지? 그렇게 이미 자아를 가진 명품에 내가 약간의 마법을 불어넣어서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도와주는 거지.”
약간의 마법이라고 했지만 결코 아무 마법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지.
기계처럼 일정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마법 물품은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마치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유물은 제이든도 본 기억이 없었다.
우아한 자태의 주전자는 제이든이 유심히 보자 약간 수줍은 듯이 몸을 비틀면서 제이든의 잔에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입사 장식은 보통 은입사가 많다. 청동이나 기타 금속에 은실로 무늬를 박아 넣는 기법인데, 이 주전자는 몸체가 은이고 거기에 가느다란 금사로 고풍스러운 덩굴무늬를 박아 넣은 보기 드문 금입사 주전자였다.
자칫하면 지나치게 화려해서 천박해 보일 수도 있는 은과 금의 조합인데 주전자 모양이 단순하고 금사를 과하게 쓰지 않아서 고상한 맛을 잃지 않았다.
“좋은 작품이네요. 렌 시대에 이런 공예 기법이 발달했었지만 그중에서도 탁월하게 좋은 작품이에요. 끌을 다룬 솜씨가 정말 섬세하고 금사도 처음부터 표면에 새겨져 나온 것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졌어요. 모양이 전통적인 동방풍이 아니고 카이엔 느낌이 좀 나는 게 양 대륙 무역이 성하던 시절 작품인 것 같아요.”
제이든은 잠깐 차를 음미한 뒤 말을 덧붙였다.
“그 자체로 국보급 예술품인데 차 맛도 일품이니 본업까지 훌륭하네요.”
주전자는 칭찬에 고맙다는 듯 가볍게 제이든 쪽으로 몸을 까딱해 보였고 그를 보고 있던 니콜레타가 웃었다.
“안 그래도 황립박물관에서 달라고 했었다만 얘가 싫어했어. 그냥 관상 대상이 되는 것보다 차 끓이고 누가 마셔 주고 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 그나저나 너 직업 잘 정했다. 감정사가 천직인 것 같구나.”
“원래는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누가 혹독하게 단련시키는 바람에 감정하는 게 버릇이 됐어요.”
“야아옹.”
발치에서 마리오와 함께 과자를 먹고 나서 포이와 함께 엎드려 있던 아실리가 머리를 들었다.
“자, 그럼 선물을 줄까?”
니콜레타의 말에 제이든은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녀의 선물이라니, 게다가 그 마녀는 전대 마탑주다. 뭔가 특이한 걸 주지 않을까?
“내 생각에 너한테 이게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데, 내가 재미있는 걸 보여주마. 내 모자가 어디 갔더라.”
그녀는 숙소에서 가지고 온 손가방을 뒤적뒤적하더니 별과 달이 그려진 보라색 고깔모자를 끄집어 내서 탁탁 털었다.
“포이야, 이리로 좀 올라올까?”
포이를 안아 올려서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니콜레타는 포이 위에 고깔모자를 덮었다.
“피잇?”
커다란 모자가 조그만 포이의 몸을 폭 덮으면서 영문을 모르고 동그란 눈을 도록도록 굴리던 포이의 모습이 모자 속으로 사라졌다.
“자아, 아센티오 에메루나 티오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지어다! 얏!”
그녀가 모자를 휙 벗기자 포이는 간데없고 웬 하얀 아기 고양이가 눈을 깜박깜박하고 있다가……, 엇! 고양이의 몸이 눈송이처럼 포스스 흩어지면서 하얀 강아지가 되었다가, 다시 흰 비둘기가 되었다가……, 비둘기의 몸을 감싼 흰 안개가 반짝거리더니 다시 포이로 돌아왔다.
“포이, 괜찮아? 놀라지 않았어?”
“포잉?”
제이든은 깜짝 놀라 포이를 안아들고 몸을 살폈는데 포이는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리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에잉, 재미 없었니?”
니콜레타는 그의 반응에 실망한 듯 시무룩하게 고깔모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애 몸이 막 바뀌는데 괜찮은 거예요? 우리 포이 놀라지도 않고 대담하네.”
“그야 괜찮지. 보기에만 바뀐 거야. 포이는 아무렇지도 않단다.”
제이든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해했다.
포이 자체에는 변화가 없는데 보는 사람에게만 고양이로도 보이고 강아지로도 보이는 일종의 환영 마법인 거였다.
“우리 아실리가 쓰는 거랑 비슷한 거로군요.”
“아실리가 쓰는 걸 내가 보진 못했다만 원리는 비슷할 거야. 다만 이 할머니가 사용하는 건 아주 완성도가 높은 거란다.”
그녀는 제이든이 안고 있던 포이를 무릎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자, 네가 보기에 포이가 어떤 것 같으냐?”
제이든은 포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그냥 포이인데요? 뭔가 바뀐 게 있나요?”
“너나 아실리한테는 그냥 포이로 보일 거다. 하지만 이제 다른 사람들이 포이를 볼 때 포에니 토끼 특유의 머리와 몸이 합쳐진 듯한 동그란 얼굴과 몸통이 보이지 않고 일반 토끼처럼 보일 거야. 고슴도치처럼 동그랗게 솟은 털도 일반 토끼털처럼 보일 거고.”
“아하.”
앞으로 포이를 데리고 여행을 할 일도 많을 텐데, 포이가 보통 토끼처럼 보인다니 포에니 토끼라서 겪는 위험이나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마력이 아주 높은 사람이나 사물의 진실을 꿰뚫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포이의 진짜 모습이 보이겠지만,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야. 이게 내 첫 번째 선물이란다.”
그녀는 끙 하고 몸을 일으켜서 가게 안쪽 선반을 뒤졌다.
“그리고, 보자, 이것도 너한테 꼭 필요할 거 같은데 어디로 갔나…… 아, 여기 있다. 여기! 어이쿠!”
선반에서 뭔가 털썩 떨어져서 먼지를 포르르 피워 올렸다.
잠시 콜록거리던 그녀가 사용감이 조금 있는 초록색 배낭 하나를 주워서 들고 왔다.
“이거다, 이거. 한 번 메어 보렴.”
자그마한 크기의 배낭은 등에도 멜 수 있고, 사선으로 조정 가능한 끈이 있어 몸 옆으로 비스듬하게 걸쳐 멜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네가 책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걸 보니 이런 게 필요하겠다 싶더라.”
니콜레타가 직접 배낭을 제이든의 몸에 걸쳐 주고는 앞쪽의 버클을 채워 주었다.
“이거 아까 손목에 걸친 연결 사슬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웬만해선 끊어지지 않고 안전해. 그리고 가볍지?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는 거라 꽉 채워도 가벼울 거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물건을 많이 넣진 못하겠네요.”
“작아 보이지? 어디 보자, 이걸 한 번 넣어볼까?”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기다란 장식용 램프를 손으로 흔들어 보았다.
“무게가 있어서 내가 들고 집어넣진 못하겠고, 에잇!”
배낭 입구를 아래쪽으로 해서 배낭을 집어든 그녀가 마치 모자를 씌우듯 배낭을 램프 위에 뒤집어씌웠다.
배낭이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작은 가로등만큼이나 기다랗던 램프가 마술처럼 배낭 안으로 사라졌다. 아니, 마술이 맞긴 하지.
“짜잔!”
그녀가 배낭을 집어들면서 꾸벅 절을 해 보였다.
제이든은 아까 포이가 변할 때보다 더 놀라서 그녀에게서 배낭을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배낭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간 거예요?”
“그 안에 있다. 안 보일 뿐이지. 꺼내고 싶은 걸 생각하면서 손을 넣으면 그게 나온단다.”
“아공간 주머니 같은 거예요?”
“아니다. 아공간 주머니가 그렇게 흔한 줄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보이는 크기의 열 배 정도의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배낭이란다. 그보다 더 많이 넣으면 안 들어간다.”
“열 배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정말 잘 쓰겠습니다. 저한테 정말 필요한 물건이에요.”
제이든은 배낭을 등에 메었다가 옆으로 비스듬히 메었다가 하면서 싱글벙글했고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니콜레타도 손자 보는 할머니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오래 넣어두지만 않는다면 산 것도 넣을 수 있다. 안쪽은 그냥 조용한 공간처럼 느껴질 거라서, 밖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거만 빼면 괜찮을 거다. 아실리, 어때? 한번 들어가 보겠니?”
“냐아옹.”
아실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포이를 잡아당겨 제 등 뒤로 보냈다.
“저 녀석 내가 포이를 넣어볼까 봐 숨기는 거 봐라.”
그녀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제이든을 향했다.
“자, 두 가지 선물은 다 줬고, 마지막으로 선물이라긴 좀 뭣하지만 편의 제공이랄까. 이리로 와 보렴.”
그녀를 따라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니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쪽으로 자그마한 복도가 있고 복도에 어울리는 자그마한 문이 세 개 있었다.
문마다 복잡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는데, 니콜레타는 세 번째 문을 열면서 말했다.
“이 나이가 되니 어디 좀 먼 길이라도 가려면 마차 타기도 그렇고, 공용 포탈 이용하러 역까지 가는 것도 힘들어서 말이다. 늙으니 자꾸 꾀가 나서 집에다 하나 설치했단다.”
방안의 바닥에는 가장자리를 별과 달 무늬로 장식한 둥근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보기 드문 사설 포탈인데 언뜻 보아도 최상급 포탈로 보였다.
마법에 큰 조예가 없는 제이든이 한눈에 알아보는 것은 숨겨진 계곡에도 다미에르가 설치해 둔 사설 포탈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 포탈의 디자인과 아주 비슷했다.
“이 포탈 디자인은 내가 젊었을 때 마탑주였던 스승님이 만드셨는데, 세시온 님도 그분께 포탈을 배웠으니 아마 비슷할 거다. 사용법은 알지?”
그녀는 잠시 옛날을 추억하는 듯하더니 손뼉을 쳤다.
“자, 이제 난 좀 쉬어야겠으니 어서 집에 가보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영상구의 좌표는 이거니까 기억해 두렴.”
제이든은 그녀에게 받은 배낭에 짐을 모두 넣고 포이를 안고 마법진 가운데 섰다. 아실리는 능숙하게 제이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간다.
지난번에 숨겨진 계곡에 들렀던 것은 삼 개월 전이었는데 그때는 일이 바빠 하루밖에 머물지 못했다. 지난 반년 내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번엔 며칠 푹 쉬다가 나와야지. 가능하면 에트루리안의 서도 좀 연구해 보고.
니콜레타가 시동어를 읊자 제이든의 눈 앞에 좌표를 지정할 수 있는 창이 떠올랐고 잠시 후 주변 공간이 사라지면서 은빛과 보랏빛이 섞인 안개가 제이든 일행을 감쌌다.
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기분이 들면서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안개 틈으로 어렴풋이 니콜레타와 마리오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