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30화
9. 포이의 선택
다시 방에 올라가 누운 니콜레타에게 수프를 가져다 주면서 제이든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포이가 엄마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어요.”
헤어짐이란 어쩔 수 없이 슬프고 아픈 거지만 그래도 포이가 마지막으로 본 엄마 토끼의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의 모습이어서 충격이 덜했을 것 같아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너희들도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이 수프는 네가 끓인 거니?”
“예.”
“솜씨가 좋구나. 유물 보는 눈썰미만 좋은 게 아니라 손맛도 괜찮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누나 밑에서 컸거든요. 집안일을 일찍 배운 편이죠. 우리 누나가 정말 요리를 잘하는데…….”
제이든이 말을 흐리자 니콜레타가 손을 내밀어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게다. 그때까지 씩씩하게 잘 지내야지. 용감한 젊은이니까, 그렇지?”
“제가 뭐 포이인가요?”
좀 전에 포이를 토닥일 때와 똑같은 말투에 제이든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나한테는 비슷비슷한 꼬마들이지.”
니콜레타도 웃으면서 수프를 몇 입 떠먹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바쁜 일 없으면 우리 가게에서 한동안 일 좀 거들면 어떻겠니? 재미있는 유물이 많으니 공부도 될 텐데.”
그녀는 주름 사이로 장난기 어린 눈을 반짝였다.
“가끔 이런 수프 좀 끓이는 것도 안 말린다. 한 솥 가득 끓여놔도 뭐라 안 할 건데.”
제이든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단은 집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트루리안의 서를 빨리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 하거든요. 백오십만 골드짜리 전설의 마법서잖아요. 무서워서 가지고 다니진 못하겠습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지. 돈으로 매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아직 수령은 안 했지?”
“예. 문관국에서 가져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습니다.”
“책을 받으면 세시온 님이 남기셨다는 집으로 가니?”
“예.”
“이동은 어떻게 할 거지? 포탈을 이용하나?”
“그럼요. 그거 들고 어떻게 도보나 마차로 가겠어요. 좀 비싸도 포탈을 써야죠. 델리움 시에 공용 포탈 큰 거 있어서 장거리도 가능하다더군요.”
공간이동 장치인 포탈 사용료가 비싸긴 하지만 이 책을 들고 도보나 마차로 산 넘고 물 건너며 숨겨진 계곡까지 가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혹시 도난이라도 당할까 하루 들고 있는 것도 가슴 떨리는 책을 안고 그렇게 갈 수는 없지.
“나도 가게에 돌아갈 거니까 떠나기 전에 우리 가게에 좀 들르렴. 내가 줄 게 있단다.”
* * *
문화재 관리국 직원 세 사람의 경호를 받으며 제이든에게 인도된 ‘에트루리안의 서’는 조그만 금고처럼 철통 보안을 갖춘 가방에 들어 있었다.
“로스 감정사님, 이 책을 어디다 보관하실 예정이신가요?”
“제가 수련하던 곳인데 보안이 철저한 비밀 장소가 있습니다. 어딘지는 밝힐 수 없지만 보안 문제에 관해서는 니콜레타 님이 보증해 주실 겁니다.”
“표지를 열고 속표지까지 보시는 데 성공하셨다고 하던데, 아시다시피 이 책은 예언서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읽어낼 수 있다면 제국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지요. 혹시라도 뭔가 읽으실 수 있게 되면 반드시 보고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레노아는 상사와 함께 밤의 경매 뒤처리를 한다고 했고 라파엘 역시 밀수품 관련 일을 돕는다고 했다.
이노시카와 그렉은 메이빌로 돌아갈 거니까 제이든도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면 되는데…….
“형님, 저 형님 따라가면 안 돼요?”
찰거머리처럼 매달리는 미누엘을 떼어내는 게 일이었다.
“저 사냥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기운도 팔팔하고 니콜레타 님 말씀대로 운도 좋으니 저 데려가시면 후회 안 하실 텐데.”
“뭐하러 날 따라오려고 그래?”
“이번에 진짜 특이한 경험을 많이 했잖아요. 형님 따라다니면 나날이 모험일 것 같은데요. 경험도 쌓고 일도 배우고, 저 유물에 대해서도 진짜 관심이 생겼어요.”
“미안한 말이지만 미누엘, 너 유물에 소질 없더라. 그 시간에 너 잘하는 다른 일을 하는 게 나아. 그리고 모험이라니! 이번 같은 일이 뭐 자주 있는 줄 알아?”
“아이 그러지 마시고 형님!”
“경험 쌓고 일 배우려면 나보다 네 진짜 형님 따라다니는 게 더 좋을걸?”
라파엘이야말로 경험도 많은 듯하고 일도 척척 잘하는 데다 매사에 여유가 있고 노련해 보였다. 제 형님 따라다니며 일 배우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제이든 씨만 괜찮다면 우리 미누엘 좀 데리고 다녀 보시지 그래요. 미누엘이 배울 게 많을 듯한데, 대신 제가 포이를 키워드리면 어떨지?”
정작 그 형님은 동생을 제이든에게 떠맡기고 포이를 데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토끼 수인의 유전자를 몰빵 받은 후손이라 그런지 토끼와 잘 통하는 게 제이든이 아실리와 이야기가 통하듯 포이와 말이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라파엘에게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저도 그새 포이랑 정이 들어서요. 그냥 제가 데리고 있고 싶은데요.”
제이든도 포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에게 하듯 무릎에까지 올라앉지는 않지만 이제 머리나 귀도 만지게 해 주는데……. 그래도 포이를 생각하면 라파엘이 나으려나 망설이는 중에 니콜레타가 조언했다.
“포이에게 정하게 해 보렴. 아직 아기지만 영리한 아이니까 누구와 함께 살고 싶은지 표현할 수 있을 거야.”
포이 입장에선 아무래도 토끼 수인을 선택하지 않을까?
제이든은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겸허하게 포이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포이의 마음이 중요하니까.
니콜레타가 포이를 거실 중앙에 앉히더니 맞은편에 양쪽으로 갈라 앉은 제이든과 라파엘을 가리켰다.
“자, 포이야, 이제 다들 헤어져야 한단다. 각자 할 일이 있거든. 포이는 누구랑 갈래? 제이든이랑 가겠니? 아니면 라파엘이랑 가련?”
거실 가운데 동그마니 앉은 포이는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뒷발로 일어나 앉은 채 앞발을 앞으로 모으고 코를 오물오물, 귀를 쫑긋쫑긋하면서 두리번 두리번 사람들을 돌아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흥미롭게 포이가 누구를 선택할지 지켜보고 있었다.
라파엘이 마치 큰 토끼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포이를 향해 눈을 맞추며 귀를 쫑긋거렸다. 뭔가 토끼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질 수 없지. 제이든도 포이에게 말을 걸었다.
“포이야, 내가 이름도 지어 줬잖아. 우리 이제 많이 친해졌지?”
포이는 새까만 눈으로 제이든을 쳐다보면서 분홍색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다시 라파엘을 쳐다보며 귀를 까딱까딱했다. 마음을 정하기 어려운 건가?
제자리에서 두어 번 뱅글뱅글 돌던 포이가 마침내 결심한 듯 발딱 일어서서 깡충깡충 뛰어왔다.
“응?”
포이는 제이든에게도 라파엘에게도 가지 않았다.
하얀 아기 토끼는 한쪽에 비켜앉아 구경하고 있던 아실리에게 달려가서 토실토실하고 하얀 앞발로 고양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 역시!”
라파엘이 일어나서 무릎을 털며 웃었다.
“역시 아실리에겐 당할 수 없군요!”
* * *
“그럼 다음에 봅시다.”
“니콜레타 님, 안녕히 가세요. 제이든 님, 혹시 이쪽으로 지나가실 일 있으심 메이빌에 꼭 들러 주세요. 아실리, 포이, 안녕.”
“제이든 형님, 절 버리지 마세요. 아야야, 형님. 토끼가 귀가 얼마나 중요한데 귀를 당겨요!”
“넌 토끼 수인 형질이 하나도 안 나타났는데 무슨 귀 타령이야.”
라파엘이 미누엘의 귀를 잡아당기자 미누엘은 그제서야 칭얼거리는 척 제이든에게 매달리던 걸 멈추고 제대로 인사를 했다.
“참, 레노아 양,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제이든이 레노아에게 물었다.
“그때 경매장에서 저한테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했잖아요. 그거 마법이에요? 어떻게 한 겁니까?”
“아아 그거요.”
레노아는 눈꼬리가 긴 눈을 살짝 접으면서 단발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법은 아니고 제 특기라고나 할지. 리카노스 섬에 동방 대륙에서 이주해 오신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분한테 체술을 배웠습니다. 성함은 모르고 유 노사라고만 하셨는데, 그분께 그 기술도 배웠지요. 전음이라고 하는 기술입니다.”
진짜로 전음입밀이었네. 제이든은 동방 대륙이 더 궁금해졌다.
숙소를 나온 제이든과 니콜레타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니콜레타의 골동품점으로 갔다.
골목 안까지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었기에 큰길에서 내린 후 니콜레타는 포이가 든 이동장을 들었고 제이든은 배낭을 메고 에트루리안의 서가 든 가방을 손에 들었다. 가방 손잡이와 손목에 끊어지지 않는 마법의 사슬로 연결까지 해 놓았는데도 왠지 불안해서 손잡이를 꽉 쥐었다.
-니콜레타 님도 계시니 너무 긴장하지 마.
제이든의 다리 옆에서 걷고 있던 아실리가 머리를 다리에 콩 부딪치며 말했고 제이든은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긴장되는 걸, 보통 물건이라야 말이지.”
“다 왔다. 얘들아.”
지난번에 미누엘과 함께 왔던 오래된 골동품점이 깊은 골목 안쪽에서 떠오르듯 모습을 드러냈다.
“야아옹!”
어디선가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니콜레타의 옷자락에 몸을 비볐다.
“그래, 걱정했지? 밥은 먹었어?”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혀 고양이를 쓰다듬어 준 니콜레타는 제이든을 돌아봤다.
“얘는 마리오라고 한단다. 우리 동네 길고양이인데 나와 친해져서 내 일을 도와주고 있지,”
“이 고양이도 뭔가 마법이 있나요?”
“아니다. 마리오는 영리하긴 하지만 그냥 일반 고양이란다.”
니콜레타는 웃었다.
“말했잖니? 마녀에게 검은 고양이가 없으면 뭔가 빠진 거 같거든. 내가 마녀답게 보이고 싶을 때나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마리오에게 부탁하면 내 곁에 있어 주지. 그리고 나는 마리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이라 밥만 먹고 잠은 다른 데서 잘 때가 많단다. 외출도 마음대로 하고. 가게 뒤쪽에 전용 출입구가 있거든.”
그녀는 손가락으로 제이든을 가리켰다.
“너 이번에 문관국의 객원 감정사가 됐잖니? 마리오는 말하자면 우리 가게 객원 고양이인 거지.”
“냐옹.”
“미야옹.”
인사를 나누듯 조심스럽게 코끝을 마주대 보던 마리오와 아실리가 차례로 야옹거렸다.
가게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유물과 골동품들 특유의 오래된 향기가 일행을 감쌌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 가게의 물건들은 다들 살아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일단 차를 한 잔 하고 선물을 주마. 너도 앉으렴.”
니콜레타는 포이를 이동장에서 꺼내 주고 오래된 의자에 앉더니 가게 안쪽을 향해 손뼉을 쳤다.
가게에 다른 직원이 있나?
제이든이 맞은편 의자에 엉거주춤 앉으면서 생각했다. 의자가 너무 낡아 보여서 앉으면 부서질까 조심스러웠다.
“뭘 하니? 얼른 안 나오고?”
잠시 후 니콜레타의 부름에 대답하듯 가게 안쪽에서 바퀴가 달린 자그마한 탁자가 돌돌돌 굴러나왔다.
딱 봐도 오래된 물건이고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고상한 작품이다. 그 위에 역시 예사롭지 않은 찻주전자와 찻잔, 우유 그릇과 과자 접시가 놓여 있었다.
아센토르 산 흑단나무 탁자 같은데 연식이 얼마쯤 되었으려나, 다기는 렌 시대 물건 같고…….
직업 의식이 발동한 제이든이 물건의 내력을 가늠해 보는 동안 갓 구워낸 비스킷과 쿠키의 맛있는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탁자가 혼자 굴러와서 니콜레타와 제이든 사이에 얌전하게 멈춰서자 니콜레타는 아래쪽 칸에 따로 담긴 고양이 과자 접시를 꺼내 아실리와 마리오에게 주고 당근 조각이 든 접시는 포이에게 주었다.
“자, 그럼.”
니콜레타는 뒤로 등을 기대면서 탁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섬세한 은제 금입사 찻주전자가 인사하듯 뚜껑을 한 번 달칵이더니 저 혼자 살짝 몸을 기울이고 기다란 주둥이로 찻잔에 우아하게 차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