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9화
8. 토끼발(13)
“아이고,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 그놈의 마법진 되돌리느라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은 수명을 홀랑 다 깎아먹었나 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고생하셨습니다.”
곡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끙끙거리는 니콜레타에게 라파엘과 레노아, 그리고 문화재 관리국에서 나왔다는 정장 입은 신사가 줄지어 머리를 숙였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제이든 일행이 묵고 있던 숙소를 통째로 빌리고 다른 사람들을 내보낸 바람에 숙소에는 제이든 일행과 관계자들만 남게 되었다. 니콜레타도 방을 하나 받아서 한잠 자고 깨어난 참이었다.
“은퇴했음 어디 산중에 가서 꼭꼭 숨어 은거할 것을, 소일 삼아 골동품이나 만지며 놀려고 했던 게 욕심이지, 욕심이야.”
“…….”
“그 운 좋은 빨간 머리 꼬마가 하필 우리 집을 찾아 들어오는 바람에.”
“덕분에 오랫동안 못 잡던 중부 밤의 경매 조직을 일망타진하지 않았습니까. 마탑 일원이면서 몰래 그놈들을 지원하던 마법사도 찾았고요.”
라파엘의 말에 니콜레타는 화가 나는지 손바닥으로 이불 위를 내리쳤다.
“내 그놈의 세르지오 녀석 잡기만 하면 가만히 안 둘 것이야.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밤의 경매를 위한 금고를 설계하다니. 그 아까운 재주를 그런 데다 쓰고, 아르카니오 출신 마법사의 수치야.”
“마탑에서 소환령을 내렸다니까 곧 심문을 받게 될 겁니다.”
“만들긴 또 쓸데없이 잘 만들어서 내가 아주 죽을 고생을 했잖니. 하마터면 못 돌아올 뻔했는데.”
“저기, 차 드세요.”
이노시카가 차를 끓여 와서 탁자에 내려놓으며 니콜레타에게 먼저 한 잔을 권했다.
“오, 고맙구나. 흠, 어디서 본 얼굴인데, 너 혹시 더글러스 톰슨네 아이 아니냐?”
“맞아요. 저희 할아버지를 아세요?”
“그래, 그래, 더글러스는 골동품 관련 일로 몇 번 만난 일이 있지. 네 어머니도 본 적이 있다. 북부에서 온 아가씨였지. 엄마를 꼭 닮았구나.”
그녀는 기특하다는 듯이 이노시카를 보며 표정이 온화해졌다.
“톰슨 골동품상 후계자가 나이는 어려도 쓸 만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대견하구나. 네 할아버지는 썩 괜찮은 골동품상이었지. 너도 소질이 있어 보이니 열심히 해라.”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이노시카는 좋아서 볼이 발개지면서 니콜레타에게 꾸벅꾸벅 몇 번이나 절을 했다.
니콜레타는 잠시 차를 마시느라 말을 끊었다가 문화재 관리국에서 나온 신사에게 입을 열었다.
“그 늑대 가면 썼던 놈 말이다. 팔을 못 쓰게 됐지?”
“예. 절단해야 한다더라고요.”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지은 대로 가는 법이지. 물건은 모두 회수했고?”
“예, 애써 주신 덕에 모두 잘 회수했습니다. 낙찰자가 가져간 물건도 다 회수했고 경매 관계자는 모두, 음, 한 명 빼고 모두 체포, 구금했고 응찰에 참여한 자들도 모두 신병 확보했습니다. 차후 심문을 거쳐 경중에 따라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는 살짝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한 명이 도주했는데 추적 중입니다.”
“그렇게 그물처럼 포위망을 쳤는데 빠져나간 놈이 있어?”
“이송 중에 탈주했는데……, 곧 잡혀올 겁니다.”
머리를 끄덕끄덕하던 니콜레타는 다시 차를 음미하다가 뒤쪽에 좀 물러서 있던 제이든에게 눈길을 주었다. 제이든의 발치에 동글동글한 솜뭉치들처럼 몰려 있는 아실리와 포이를 보던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거기 밤색 머리, 잠깐 나 좀 보자.”
제이든이 침대 옆으로 가까이 가자 아실리와 포이도 자석에 끌리듯이 하나는 살랑살랑, 하나는 깡충깡충 제이든의 뒤를 따라갔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을까?”
니콜레타의 말에 다들 방을 나가고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만 남았다.
제이든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콜레타는 아실리에게 눈을 옮겼다. 침대 아래쪽에 얌전히 발을 모으고 앉은 아실리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니콜레타가 말을 걸었다.
“흠……. 아무래도 낯이 익은 고양이인데, 나비야, 너 나 모르니?”
“냐옹!”
아실리는 눈을 반달처럼 접으면서 마치 웃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너 혹시 세시온 다미에르의 고양이 아니냐?”
“냥!”
바로 맞췄다는 듯이 아실리가 반갑게 울었고 니콜레타가 확인하듯 제이든을 바라보았기에 제이든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래, 너무 오랜만이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샐리? 실리?”
“아실리입니다.”
“맞아, 아실리, 세시온 님이 실리라고 부르곤 했지. 그렇지?”
“냥!”
“옛날에도 특별한 고양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직 살아 있을 줄은 몰랐구나. 세시온 님이 무척 아끼셨으니까 뭔가 수를 쓴 거겠지만…….”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세시온 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널 찾아봤었단다. 혹시 혼자 남았으면 내가 맡으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누군가에게 맡기셨겠거니 했는데 많이 외로웠겠구나, 아실리.”
“미야옹.”
“그래도 이제 좋은 친구를 만났구나.”
니콜레타는 다시 제이든을 향했다.
“널 처음 봤을 때 세시온 님의 흔적이 느껴져서 그분과 관련 있는 아이라는 건 알았는데, 아무래도 네 정체가 정확히 짚이지 않더구나. 출신도 짐작할 수 없었고 어쩐지 이 세상의 아이 같지가 않았어. 자, 털어놔 보렴. 넌 누구니?”
제이든은 아실리를 바라봤고 아실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포이는 길어지는 이야기가 지루한지 방 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난 니콜레타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면서 웃었다.
“그랬구나. 역시 다른 세상에서 온 아이였어. 이 나이에 내가 특별한 경험을 하는구나.”
“…….”
“대단한 아이야.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져서 이렇게 씩씩하게 버텨 나가다니, 게다가 세시온 님의 뒤를 잇는 훌륭한 감정사까지 되고, 정말 장하다!”
“다미에르 님을 잘 아시나요?”
“내가 아까 그 톰슨 골동품점 여자아이만 했을 때 처음 뵈었지. 그때 세시온 님은 이미 마스터였지만 정말 멋진 분이었어. 그 이후 오랫동안 좋은 가르침을 많이 주셨지.”
니콜레타는 눈가 주름 사이로 장난기 어린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아실리를 바라보았다.
“너 그거 아니? 세시온 님이 널 너무 아끼셔서 내가 좀 샘을 냈었단다. 나 말고도 널 질투한 여자들이 꽤 될걸? 연배는 좀 높았어도 세시온 님은 우리에겐 우상 같은 존재였거든.”
옛 생각을 하는 듯 아련한 얼굴이 되었던 니콜레타는 다시 제이든에게 말했다.
“아무튼 정말 장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고, 네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네가 원하는 유물도 꼭 찾을 수 있도록 축복하마.”
그녀는 침대 주변을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는 포이를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내 축복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더 큰 축복을 이미 받은 것도 같으니.”
* * *
“로스 감정사님, 생각 좀 해보셨습니까?”
“예,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데요. 제가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그러지 마시고,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문화재 관리국 마법 유물부에서 나왔다는 레노아의 상사, 정장의 신사는 집요하게 제이든을 쫓아다녔다.
“같이 일하시지요.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저는 한 군데에 머물 수 없고, 해야 할 일도 있어서요.”
제이든을 문화재 관리국으로 영입하려고 쫓아다니던 신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고사하시니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에트루리안의 서는 문관국에서 맡겠습니다.”
“예? 니콜레타 님이 제가 맡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겠다고 했는데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에트루리안의 서나 마신의 활 같은 유물은 개인에게 맡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제국 차원에서 보호, 관리해야 하는 유물이에요. 아무리 니콜레타 님의 보증이 있다 해도 안 됩니다.”
“책이 저를 선택했어도요?”
“근 백 년 이래 표지를 열어 본 유일한 분이라 하니 책의 신병을 맡기는 것을 고려해 볼 수는 있는데, 개인 신분으로는 안 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로스 감정사님께 드렸다가는 제 목이 날아갈 일입니다.”
오랜 공방 끝에 결국 제이든은 문화재 관리국의 객원 감정사 역할을 맡기로 했다.
실제로 근무할 필요는 없지만 문관국 필요시에 동원되거나 조력을 할 수 있으며 월급을 받지는 않지만 일할 때마다 수당을 받는 조건이었다.
“아휴, 문관국이나 마탑 소속이 아니면 책을 맡길 수 없다니 어쩔 수 없지.”
제이든은 번거로운 것도 싫고 어딘가에 매이는 것도 싫었지만 상황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제 토끼발 건인데…….”
토끼발은 라파엘이 들고 가더니 금방 다른 유물과는 달리 임의로 처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묻어 줘야 하나? 아니면 태워 줘야 할까?
그전에, 이걸 과연 포이에게 보여줘도 될까?
“안 돼요. 엄마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격이 클 텐데 잘린 발을 보여주는 건 너무 잔인해요!”
이노시카는 펄쩍 뛰었고,
“포이에게 인사를 하게 해 주고 묻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레노아는 작별 인사를 시켜 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포이를 데리고 가고, 토끼발도 엄마 토끼의 유품으로 보관하면 어떨까?”
라파엘은 토끼발뿐 아니라 포이를 키우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사람 못지않게 감정이 풍부하고 가족 간의 애정이 깊다는 포에니 토끼다.
과연 포이에게 엄마의 발을 보여주는 게 괜찮을지, 아직 아기인데 충격이 크지나 않을지, 일층 거실 응접실에서 진지하게 고민 중인 일행 뒤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니콜레타 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레노아의 물음에 니콜레타가 머리를 흔들었다.
“출출해서 뭐 요깃거리가 좀 있나 보려고 내려오는 길에 들었다만, 그 토끼 건이라면 내가 도와주마.”
잠시 후 일행은 거실에 모여앉았다.
중앙 소파에 앉은 니콜레타는 별과 달 무늬가 새겨진 보라색 로브를 입고 같은 무늬가 든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르카니오 마법사의 근무복이라고 한다.
그녀는 무릎에 토끼발이 든 상자를 놓은 채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아실리에게 손짓을 했다.
“아실리, 이리 오너라, 내 옆에 앉으렴.”
“냐옹.”
아실리가 그녀의 옆으로 갔고 제이든이 물었다.
“아실리는 왜요? 아실리도 마법에 필요한가요?”
니콜레타는 고깔모자를 옆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고쳐 쓰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림이 좋잖아, 마녀와 고양이는 원래 한 세트잖니. 고양이가 있으면 폼도 나고 힘도 나는 법이란다. 검정 고양이였으면 더 그럴싸했겠지만.”
“미야옹!”
“그래, 그래, 회색도 물론 괜찮지. 자 시작한다.”
포이는 니콜레타 맞은편에 앉은 라파엘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토끼발 상자에 손을 얹은 니콜레타가 눈을 감고 뭔가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몸에서 옅은 은빛 아우라가 생겨나더니 차차 그녀의 몸 전체와 토끼발 상자 전체를 감쌌다.
달카닥!
그녀가 상자를 열자 상자 안에서 은빛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엉겼다. 구름은 차차 토끼의 형태를 이루었다.
“피이잇!”
라파엘의 무릎 위에서 포이가 깡충 뛰어오르더니 엄마 토끼의 모습을 향해 달려갔다.
“피잇, 피잇, 피이잇!”
아기 토끼는 울면서 엄마 토끼에게 매달렸고 이제 완전히 토끼의 형태를 이룬 영체는 포이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포이의 온몸에 입 맞추듯 코를 비벼대던 엄마 토끼의 영체는 마침내 뭔가 당부하듯 포이의 귀에다 코와 입을 대고 한참 오물거리더니 서서히 포이의 몸을 놓았다.
토끼는 마치 부탁한다는 듯 사람들을 쭉 한 번 둘러보더니 제이든을 한 번 더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 간절한 눈길에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피이이이!”
포이는 엄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뒷발로 일어서서 앞발을 허우적거렸지만 엄마 토끼의 몸을 이루었던 구름은 서서히 옅어지면서 토끼발 상자로 돌아왔다.
점점 투명해지던 구름은 마침내 은빛 물방울이 터지듯 비산하면서 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토끼발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피이, 피이, 피이이!”
포이는 니콜레타의 무릎까지 뛰어올라와 앞발로 상자를 파닥파닥 뒤집어 보더니 마치 사람 어린애처럼 뒷발을 앞으로 뻗고 앉아 울었다.
“자, 포이야, 포이는 용감한 토끼지? 엄마가 씩씩하게 잘 지내야 된다고 하지 않더냐? 자, 뚝!”
니콜레타가 마치 사람 아이를 달래듯 포이를 토닥거렸고 아실리가 포이를 감싸 안으면서 얼굴을 핥아 주자 포이는 아실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삼켰다.
“이 애 엄마의 혼은 떠나질 못하고 이 토끼발에 남아 있었어. 아마 아이 걱정 때문에 그랬겠지. 아직 시일이 많이 지나지 않아서 토끼발을 매개체로 영체를 불러올 수가 있었단다. 이제 안심하고 떠났을 거야.”
소파에서 일어서려던 니콜레타는 갑자기 푹 쓰러졌다.
“니콜레타 님!”
놀란 사람들이 부축하려 하자 그녀는 기운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직 채워지지도 않은 마력을 또 바닥까지 긁어냈더니 배가 고파 죽겠구나. 누가 먹을 거 좀 다오.”
#작가의 말
공원에 버려진 채 떨고 있는 걸 구조한 토끼들입니다.
작은 토끼가 포이의 모델이고요.
큰 토끼가 아기 토끼를 끔찍이 챙기곤 했어요.
사진은 우리 집에 있을 때인데 지금은 둘이 같이 좋은 집으로 입양가 잘 살고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