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28화 (28/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8화

8. 토끼발(12)

금고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길쭉한 방이었다.

앞이 투명한 보관함들이 양쪽 벽에 나란히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경매품들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안전 장치가 확실한지 이 난리통에도 문이 열린 보관함은 아직 없었지만 덜걱덜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게 오래 버티지는 못할지도 몰랐다.

들어온 입구 맞은편의 벽에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둥근 원 안에 복잡한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늑대 가면이 지팡이를 쥔 채 비틀거리며 그 앞에 다가서는 중이었다.

제이든도 비틀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방이 어찌나 흔들리는지 마치 탈선하는 열차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저 마법진, 발동하지 못하게 해야 돼. 이동 마법진이야.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아실리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지만 제이든은 막 마법진에 지팡이를 갖다 대는 늑대 가면을 보면서 퍼뜩 그런 생각을 했다.

저놈을 놓쳐도 이 금고가 남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냐, 아냐, 이 금고 전체를 이동시키는 마법진이라고!

헉! 제이든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어 늑대 가면의 허리를 껴안고 뒹굴었다.

한쪽 면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던 마법진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몇 번 명멸하다가 빛을 잃으면서 방이 더 심하게 요동쳤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보관함 몇 개가 쓰러지면서 문이 열리고 유물들이 나뒹굴었다. 늑대 가면이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으로 제이든을 후려쳤다.

“망할 고양이 자식, 문관국이냐? 마탑 끄나풀이야?”

제이든도 체력 단련은 꾸준히 해 왔지만 늑대 가면은 제이든보다 키도 크고 힘도 좋았다.

게다가 방이 너무 흔들리고 있어 균형 잡기도 어려웠다. 두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드잡이질을 하는 중에 늑대 가면이 떨어뜨렸던 지팡이를 주워들어 제이든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캬아아악!”

아실리가 분노의 하악질을 발사하면서 늑대 가면의 팔에 매달렸다.

“끄아아악! 이놈의 고양이가!”

늑대 가면이 아실리를 뜯어내어 바닥에 내팽개쳤고 아실리는 재빨리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착지하면서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아실리가 다시 한번 도약했고 늑대 가면은 지팡이로 아실리의 목을 겨냥해 검을 쓰듯 휘둘렀다.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지팡이의 끝에서 짧은 칼날이 튀어나왔다.

“실리!”

쓰러졌던 제이든이 소리를 지르며 아실리와 지팡이 사이로 뛰어들었다.

“으윽!”

아실리를 감싸안은 제이든의 등이 쭉 찢어지며 벽의 마법진으로 피가 튀었다.

“이런 망할!”

콰르르릉!

.제이든의 피가 튄 마법진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나고 방이 살아 있는 짐승의 목구멍처럼 꿀렁거렸다. 늑대 가면이 당황한 고함을 내지르더니 돌아서서 들어온 입구 쪽으로 뛰었다.

“늑대 형님?”

입구 쪽에서 막 벽을 통과해 들어왔던 족제비 사내가 늑대 가면을 불렀으나 늑대 가면은 넘어지고 자빠지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실리가 걸었던 환영 마법의 효력이 다했는지 열려 있는 금고 문과 그 바깥이 분명하게 보였다.

“어서 나가! 좌표가 틀어졌어. 이 방이 어디 가서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보물들…….”

“여기 갇혀서 말라 죽고 싶어? 얼른 나가!”

-제이든, 괜찮아? 빨리 나가!

제이든과 아실리도 서둘러 입구로 향했다.

“저건 가져가야 해!”

입구 가까이 문이 열린 보관함 안에 ‘에트루리안의 서’가 있었다.

주위의 모든 유물들이 제자리를 잃고 뒤흔들리는 중인데 그 책은 혼자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조용히 공중에 떠 있었다.

“토끼발은? 토끼발은 어디 있지?”

제이든은 책에 손을 뻗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늑대 가면에게 덤벼들 때 손에 들고 있던 토끼발 상자를 떨어뜨린 것 같은데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르릉! 마법진이 다시 한번 울었고 방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늑대 가면은 족제비 사내를 끌고 금고 바깥으로 몸을 던지기 직전에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보물들과 함께 영원히 시공을 헤매다가 죽어라. 몇백 년 후 금고가 어딘가 안착했을 때 사람과 고양이 미이라가 한 구씩 더 있겠군.”

제이든의 코앞에서 금고 문을 쾅 닫으려던 늑대 가면이 뭔가에 발이 걸리면서 고꾸라졌다.

제이든이 떨어뜨린 토끼발이었다. 상자가 열려서 토끼발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끄아악!”

팔을 뻗어 토끼발을 움켜쥔 늑대 가면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닫히는 금고 문에 오른팔이 걸리면서 우두둑! 끔찍한 소리가 났다.

“비켜라!”

금고 문이 다시 열리더니 검은 옷차림의 몸집이 작은 여자가 쓰러져 신음하는 늑대 가면의 등을 짓밟듯이 금고 안으로 몸을 날렸다.

“어서 나가!”

고깔모자에 마녀 가면을 쓴 여자는 그림자처럼 제이든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제이든의 몸을 와락 밀쳤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강한 힘이라 제이든은 거의 던져지듯 금고 밖으로 밀려나왔고 아실리도 재빨리 그의 옆을 따랐다.

그녀가 요동치는 금고방 안에서 미끄러지듯 마법진 앞으로 다가가는 잔상만 남기고 금고 문이 스르르 사라지면서 벽만 남았다.

“책을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공중에 떠 있던 ‘에트루리안의 서’를 미처 잡아 오지 못했다.

“토끼발은?”

쓰러져 있는 늑대 가면의 손 앞에 토끼발이 떨어져 있었다.

제이든은 재빨리 토끼발을 주워서 허리에 찬 전대 안에 넣었다.

기괴하게 비틀린 팔을 붙들고 신음하고 있던 늑대 가면이 얼굴을 들었다. 가면이 떨어져서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제이든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영상에서 본 적 있는 얼굴, 포이의 엄마 토끼의 발을 잘라내던 그 남자였다.

그는 토끼발을 집어넣는 제이든을 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XX, 아랫것들 시키려다가 포에니 토끼라고 행운이 있을까 해서 직접 잘랐더니, 행운은 개뿔.”

금고 밖은 싸우는 사람들로 난장판이었다.

경매장에서 방 안으로 통하는 문은 이미 부서져서 벽이 커다랗게 뚫려 있었다.

족제비 사내가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손에 시퍼런 칼을 들고 있었다. 제이든이 겨우 칼을 피하고 그를 밀어붙이는데 또 다른 사내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피할 각이 보이지 않아 양 팔을 머리 위로 교차시켜서 막는데 빠악! 소리가 울리면서 사내가 뒤로 넘어갔다.

경매장에서 방 안으로 뛰어든 레노아가 근사한 돌려차기로 사내를 넘어뜨리고 다음 사람을 상대하는 게 보였다.

길쭉길쭉한 팔다리의 움직임이 시원스럽다. 견습 마법사라지 않았나? 저 현란한 움직임을 보면 무술가인데?

경매장 쪽을 내다보니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고 있는 그렉 톰슨이 보였다. 저 아저씨도 한가락 하시네.

-제이든, 등 괜찮아? 제이든.

“괜찮아, 아실리, 별로 안 다친 거 같아.”

아실리가 울상이 되어 제이든의 등을 보려고 폴짝폴짝 뛰었지만 제이든은 흥분해서 그런지 아픈 줄도 몰랐다.

“괜찮아요? 제이든?”

장내가 조금씩 정리되어 가면서 어디선가 라파엘이 나타났다.

“등을 다치셨네. 리암, 이쪽으로 좀 와 줘요!”

치유사인 듯한 사람이 달려와서 제이든의 등에 치유의 힘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우선 응급조치만 하고 나중에 치료를 다시 하죠.”

싸움은 거의 끝난 것 같았고 문화재 관리국이나 마탑의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경매 주최 측 사람들을 굴비 엮듯이 엮어서 끌고 나갔다.

“저놈은 어쩌죠?”

제이든이 그동안 겨우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늑대 가면을 가리키자 그가 씹어뱉듯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 인원이 모였나 보네. 위치를 숨기는 마법에다 방어 마법도 이중 삼중으로 걸어 놨었는데 깨고 들어온 거 보니.”

그는 고통 때문에 이마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비웃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단해, 밤의 경매가 이렇게까지 깨진 건 처음인데, 하지만 모두 허탕이 되었군!”

늑대 가면은 벽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유물은 금고와 함께 몽땅 날아갔잖아. 우릴 잡아봤자 물건을 모두 잃었으니 문책이나 받지 않음 다행이겠어.”

“글쎄, 그럴까?”

라파엘과 레노아는 금고가 사라진 벽을 바라보았다.

“아까 들어간 여자, 마녀 가면이지? 그 여자도 너희들 끄나풀인가? 돌아오지 못할 텐데 안 됐네.”

늑대 가면이 이죽거렸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혹시 실패한 건가.”

“그분이 실패할 리가 없어요. 여기로 돌아오진 못했을지 몰라도 어딘가에 무사히 도착했을 거예요. 만약의 경우라도 자기 몸 하나는 빼냈을 거예요.”

라파엘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레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못 돌아온다니까. 이 금고의 설계는 기관진식에 있어서는 일류라는 마법사가 셋이나 붙어서 한 건데, 지금쯤 어딘가 시공을 헤매고 있거나 심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거나 그럴걸.”

늑대 가면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채 실실 웃었다.

뒷마무리를 할 몇 명만 남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도 한참 후,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라파엘이 한숨을 쉬었다.

“이만 철수하지. 혹시라도 연락이 오는 걸 기다리고.”

“그것 보라고, 크하하하!”

늑대 가면이 승리했다는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저 자식도 끌고 가고.”

그때 아실리가 벽을 보며 야아옹 울었다.

“?”

아실리의 울음 소리에 벽을 돌아본 제이든이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 저것 좀 봐요!”

벽에 조그만 그림자가 떠올랐다. 흔들흔들하던 그림자가 조금씩 커지더니 서서히 문의 형태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어, 좌표가 틀어졌는데, 마법진이 피를 먹었는데, 열쇠가 되는 지팡이도 없는데 이게 돌아올 리가 없어!”

늑대 가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지만 서서히 분명해지던 문의 형태가 뚜렷해졌다. 마침내 벽에 다시 금고 문이 생겼다.

-끼이익.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문을 향해 팔을 뻗은 채 쓰러진 것이 보였다. 고깔모자가 옆에 뒹굴고 있었다.

“니콜레타 님!”

레노아가 비명을 지르며 여자를 향해 달려가서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안 죽었다. 흔들지 마라…….”

레노아의 품에 안긴 여자가 희미한 음성을 흘렸다.

“아이고, 이것들아, 내가 이 늙은 몸을 가지고 현역이랑 같이 뛰어야겠냐? 마력이 한 점도 안 남았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어떻게 돌아온 거야? 늙은 마녀 같으니, 무슨 짓을 한 거야?”

늑대 가면이 악을 썼다.

여자는 겨우 일어나 앉더니 늑대 가면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얼마나 급하게 힘을 썼는지 이거 벗을 시간도 없었네.”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얼굴에 쓴 마녀 가면을 벗으면서 말했다.

“필생의 마법을 좀 부렸지, 난 진짜 마녀거든.”

레노아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자 라파엘이 그녀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다음 제이든을 향해 씩 웃었다.

“한 번 만나뵌 적 있으시지요? 전대 마탑주이신 니콜레타 아르카니오 님이십니다.”

“아!”

제이든이 탄성을 토했다.

미누엘과 함께 갔던 오래된 골동품점의 주인 노파가 제이든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보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