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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27화 (2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7화

8. 토끼발(11)

무대 중앙의 탁자 위에 올라온 ‘에트루리안의 서’.

“여러분, 이 책에는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여태까지 보신 다른 유물은 모두 투명한 마법 보호막 안에 들어 있었지요? 유물의 파손을 막기 위해 저희 측 마법사가 설치한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보호막을 두르고 있거든요.”

늑대 가면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저희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고서적 전문가와 마법사까지 동원해서 이 책을 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는 두 손을 흔들었다.

“책을 들거나 움직일 수도 있는데 보호막을 통과해 직접적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열 명이 넘는 마법사와 서적 전문가들 중 표지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단 두 명 있었고 책을 펴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죔쇠가 열리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장갑을 낀 손으로 탁자 위의 책을 들어 보였다.

“자리에선 잘 안 보이시겠지만 가까이 와서 보시면 제 손과 책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만질 수 있는 영광을 얻지 못했어요.”

늑대 가면의 책 설명이 끝나자 두 명이 연이어 가까이에서 보기를 신청했고 제이든도 얼른 부채를 들었다.

가장 먼저 무대로 나간 사람은 양쪽으로 둥글게 말린 뿔이 두드러진 산양 가면을 쓴 남자였다. 몸집이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데다 행동거지가 거칠어서 사나운 느낌을 주었다.

“산양 가면이 아니라 곰 가면을 썼으면 어울렸겠는데요.”

“음. 저 사람이 아까 마신의 활을 낙찰받았지. 엄청 큰 걸 하나 낙찰받았으니 다른 건 응찰 안 할 줄 알았는데 에트루리안의 서에도 관심이 있나 보네.”

치열한 경쟁 끝에 마신의 활을 낙찰받은 산양 가면은 그 이후 다른 물품에 응찰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에트루리안의 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책을 살펴본 후 주최 측에서 제공한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표지를 만져 보았다. 아니 만져 보려고 했다.

“이거, 만져지지가 않는군.”

산양 가면은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의 손은 책 위에서 약 1㎝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치 투명한 유리벽을 문지르는 듯이 미끄러졌다.

“아!”

늑대 가면은 연극적인 탄성을 토하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보셨죠? 여러분? 이 책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에겐 손대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겐 손은 댈 수 있지만 열지는 못하게 하고요.”

그는 산양 가면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산양 님. 책이 산양 님이 만지는 것을 거부하나 봅니다.”

산양 가면은 짜증이 나는 듯 한 번 발을 굴렀다. 마치 책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듯했지만 그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고는 거칠게 콧방귀를 한 번 뀐 뒤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으로 보실 분은 마녀 님입니다.”

마녀 가면이 나와서 신중하게 책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표지에 손을 얹었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늑대 가면이 탄성을 토했다.

“오, 책이 마녀 님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표지를 만지게 해 주네요. 혹시 책을 펼 수도 있을까요?”

그녀가 표지 끝 죔쇠에 손가락을 대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려 했으나 죔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녀 가면은 작은 소리로 웃고 나서 포기한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마녀 님도 열지 못했습니다. 자, 이제 고양이 님이 보시겠습니다.”

보호 마법을 두른 제이든이 무대 가운데로 나갔다.

영상으로 볼 때도 아름다운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실물은 더 아름답고 신비스러웠다. 생각보다 크기는 조금 작았고 두께는 두툼했다.

가까이 가자 책에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일반 유물에 걸려 있는 방어 마법과는 달랐다.

.제이든도 꽤 여러 가지의 방어 마법을 겪어 봤으나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공격성은 전혀 없고, 다가오는 자를 부드럽게 막아서는 분위기랄까.

제이든이 다가가자 막아서는 느낌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가까이 오도록 이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과 가까워질수록 아까 마신의 활을 본 이후 몸에 생긴 꺼림칙함이 씻겨져 나가고 따뜻한 물 같은 공기가 기분 좋게 그의 몸을 감쌌다.

표지와 책등은 무슨 가죽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죽 재질로 보였다.

하지만 제이든이 처음 보는 재질이라 어쩌면 가죽이 아닐지도 몰랐다.

.표지 전면에 상감된 자개는 최상급의 세이렌 진주조개 패각을 정교하게 갈아낸 것으로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빛나며……, 아니, 이건 뭐지?

제이든은 허리춤의 전대에서 돋보기를 꺼냈다.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 첫머리 부분에 꽃잎처럼 장식된 자개 한 조각이 다른 것과 조금 달라 보였다. 그는 돋보기로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처음 보는 건데……, 다미에르의 서재에서 수십 가지 자개 견본을 보면서 공부할 때도 이런 자개는 보지 못했다. 이건 자개라기보다는 뭔가의 비늘 조각 같은데, 이렇게 신비로운 빛을 내는 비늘이 있나?

제이든이 손가락을 비늘 위에 살짝 갖다대자 단단하고 매끄러운 촉감이 전해져 왔다.

“오, 고양이 님이 표지를 만지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책이 거부하지 않았어요.”

그를 보고 있던 늑대 가면이 과장을 섞어 감탄했다.

“어떻습니까? 고양이 님, 한번 책을 펴 보시겠습니까? 혹시 성공하신다면 책과 인연이 있는 분일 테니 꼭 낙찰받으셔야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절대 못 펼 거라는 듯한 말투였다.

제이든은 표지 아래쪽 귀퉁이의 은제 죔쇠를 살짝 만져 보았다.

삼각형으로 책 모서리를 보호하면서 잠금 역할도 하는 죔쇠 위에는 용 무늬가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비아트리스 성녀 이후로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 책, 펴 볼 수 있을까?

그는 삼각형의 죔쇠 양쪽으로 손가락을 대고 살그머니 눌렀다.

찰카닥! 소리가 나면서 죔쇠 중간 부분이 열렸다.

앞표지에 고정된 위쪽 죔쇠와 뒤표지에 고정된 아래쪽 죔쇠가 분리되었다.

제이든 자신도 놀랐지만 좌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듯했다.

제이든은 위쪽 모서리의 죔쇠에도 손을 대었다. 조용한 장내에 다시 한번 찰카닥 소리가 울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표지를 들어 올렸다.

두꺼운 표지가 그의 손 아래에서 부드럽게 올라와서 옆으로 제쳐지고 속표지가 드러났다.

.표지와 똑같이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이 있고 그 아래에 새파란 색으로 고풍스러운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을 갈아 만든 안료로 그린 게 분명했다.

한 장 더 넘겨서 안쪽을 보려고 속표지의 모서리를 잡자 보이지 않는 힘이 제이든의 손을 밀어냈다. 그가 닫지도 않았는데 겉표지가 저절로 움직여서 닫혔다. 찰카닥 소리가 나면서 죔쇠가 채워졌다.

장내에 사람들의 감탄 소리가 흐르고, 잠시 후 늑대 가면이 겨우 입을 열었다.

“고, 고양이 님이 겉표지를 펴는 것까지 성공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무도 죔쇠를 열지 못했는데……. 고양이 님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이 책이 열릴 시기가 된 걸까요?”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이마의 땀을 닦고 나자 노련한 경매사답게 목소리에 안정을 찾았다.

“자, 고양이 님은 속표지까지 보셨습니다. 그 이상 책을 펴 보는 데는 실패하셨고요. 또 시험해 보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제이든이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사람들의 눈총이 그에게 집중되는 바람에 등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몇 명이 더 나와서 시험해 봤지만 죔쇠를 여는 것은 고사하고 표지를 직접 만지는 것에 성공한 사람도 없었다.

경매가 시작되자 모두 이 마지막 경매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책의 마법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다들 진품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 같았다. 표지도 펼치지 못하고 읽지도 못한다 해도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은지 장내가 열기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50만, 60만, 70만,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경매가에 제이든도 가슴이 떨렸지만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이 책은 꼭 낙찰받아야만 했다. 그동안 벌어 둔 돈과 다미에르의 유산까지 모두 털어 넣는 한이 있더라도.

안 되면 라파엘과 레노아의 힘을 빌어서라도 반드시 입수해야만 했다.

“100만, 100만 나왔습니다. 작년 셀레스테 경매에서 낙찰된 카이엔 대제의 ‘영광의 망토’와 같은 금액입니다. 이제 그 기록을 깰 것 같습니다.”

너무 높은 금액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마지막까지 경합하던 산양 가면이 떨어져 나가면서 ‘에트루리안의 서’는 150만 골드에 제이든에게 낙찰되었다.

“형님, 그런데 150만 골드가 있어요?”

미누엘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제이든에게 물었다.

“네 형이 제때 들이닥치기를 기도하자.”

경매가 끝나자 늑대 가면이 무대 뒤쪽의 문을 열었다. 그동안 경매품을 하나씩 가지고 나왔던 문이었다.

“자, 이제 한 분씩 들어오셔서 입금과 물건 인수 과정을 밟겠습니다. 먼저 사자 님, 들어오세요.”

너구리 가면을 동반한 사자 가면이 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두 번째 손님을 불러들일 때까지 사자 가면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출구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얼룩말 님, 고양이 님, 들어오세요.”

제이든과 미누엘, 아실리가 들어간 방은 크지는 않으나 벽 한 면이 딱 봐도 금고 문인 걸 알 수 있었다. 세 명의 남자가 금고 문을 둘러싸고 서 있었고 반대쪽으로 출구인 듯한 문이 있었다.

“얼룩말 님, 3번 토끼발과 12번 에트루리안의 서를 낙찰받으셨습니다. 입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누엘은 제이든을 쳐다보았고 제이든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계약금을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송금해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151만 4천 골드, 계약금은 10프로인 15만 1천 4백 골드입니다. 송금은 24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하며 에슈나트 은행 계좌로 하셔야 합니다.”

에슈나트는 카이엔과 동방 대륙 사이에 있는 섬나라인데 오로지 비밀 은행 운영만으로 나라를 유지한다는 섬이었다.

미누엘은 미리 준비해 온 1만 골드짜리 20장 묶음 수표책을 꺼내서 15장을 뜯었다.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손을 덜덜 떨더니 정작 수표책을 뜯는 모습은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입금이 확인되는 대로 에트루리안의 서는 원하시는 주소로 보내 드립니다. 밤의 경매의 오랜 역사를 걸고 입금이 되었는데 물건이 전달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직접 인수도 가능합니다. 두 분 중 한 분이 저희와 함께 남으시고 한 분이 송금 완료를 하시면 됩니다. 남으셨던 분과 물건을 함께 보내 드리지요. 만약 입금이 안 되는 경우엔…….”

늑대 가면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그 미소가 더 무서워 보였다.

“토끼발은 지금 수령할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금고 옆에 서 있던 남자 세 명 중 두 명이 목에 걸고 있던 패를 금고 문으로 향하자 두 줄기의 빛이 어우러지면서 문이 열렸다. 한 명이 금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필통처럼 생긴 상자를 꺼내 왔다.

“보호막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상자를 감싸고 있던 마법 보호막이 풀리고, 제이든이 상자를 받아들고 뚜껑을 열어 토끼발을 확인했다.

.하얗고 보슬보슬한 토끼발……, 애잔한 마음이 들어 토끼발을 살짝 만져본 순간, 어디선가 펑! 굉음이 울리면서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뭐야!”

바닥에 쓰러졌던 늑대 가면이 몸을 가누려고 애쓰면서 소리쳤다. 금고 옆의 사내들도 바닥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방어 마법이 깨졌다!”

요란한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고 늑대 가면이 외쳤다.

“금고 닫아!”

아실리가 훌쩍 뛰어 벽면 앞을 지나갔다.

“금고 문이 사라졌어!”

사내 한 명이 부르짖었고 금방까지 금고 입구가 있었던 벽은 그냥 밋밋한 벽으로 변해 있었다.

“당황하지 마, 환영 마법이야. 누구지? 너희들인가?”

늑대 가면은 아직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제이든과 미누엘을 노려보았다.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다시 한번 흔들리고 요란한 굉음이 더 심해졌다.

.다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가운데 제이든은 토끼발이 든 상자를 꽉 껴안았다.

“문관국이다!”

누군가 문 밖에서 외쳤고 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늑대 가면이 벌떡 일어나더니 금고가 있었던 벽면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제이든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일어나 흔들리는 벽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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