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26화 (2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6화

8. 토끼발(10)

“얼룩말 님의 대리로 응찰하시는 고양이 님이 1만 부르셨습니다. 지금부터는 호가 1천으로 올라갑니다.”

급박한 응찰 경쟁 속에서 전주가 감정사에게 문의해 가면서 응찰하기 어려우므로 감정사에게 응찰을 맡기는 일도 종종 있어서 제이든도 그 형식을 취했다.

1만 골드면 한국 돈 가치로 바꿔 보면 거의 1억이다. 토끼발 하나가 이렇게 비쌀 일인가?

하지만 건너편 나비 가면이 1만 1천에 부채를 들자 제이든 역시 망설이지 않고 부채를 들었다.

“아실리, 진정해.”

언제나 침착하고 우아한 아실리가 흥분해서 제이든이 부채를 들기도 전에 한쪽 앞발을 높이 드는 중이었다.

“형님보다 아실리가 더 응찰자 같은데요?”

역시 흥분했는지 반쯤 일어서 있던 미누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실리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실리 너무 사람 같다. 너 혹시 고양이 수인 아니니?”

“냐앙!”

-아니양!

“1만 2천, 나비 님 1만 2천, 1만 3천 없습니까? 네, 사자 님 1만 3천!”

“형님, 지면 안 돼요. 힘내요!”

“1만 4천, 자, 1만 5천 없습니까? 1만 5천? 네. 1만 4천에 거기, 고양이와 함께 오신 고양이 님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경매사가 낙찰의 표시로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미누엘이 주먹을 허공에 한 번 내두르고는 제자리에 앉았고 아실리도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얼른 자세를 고쳐 앉더니 할짝할짝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포이 때문에 아실리가 좀 흥분했나 봐.”

“네, 저도 영상 나올 때 울컥해서……. 아,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토끼의 피가 끓어오르더라니까요! 우리가 낙찰받아서 다행이에요.”

그루밍한 앞발로 수염을 정리하다 말고 아실리가 부끄러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렇게 체통을 잃는 일이 없는데, 그 영상 때문에……, 포이가 보여서 그만.

미누엘이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이가 아실리를 엄청 따르니까 아실리도 자기 새끼처럼 정이 들었나 봐요.”

4번, 5번, 6번 경매가 지나고 레노아가 주의 깊게 보라고 한 7번 경매의 차례가 되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제이든도 그동안 몇 번 응찰 경쟁에 참여했다가 적당한 선에서 빠지곤 했다.

“밤의 경매치고는 사람들 응찰 경쟁이 심하지 않은데요? 가격대도 그렇게까지 높은 건 아닌 거 같고…….”

“나도 밤의 경매는 처음이지만 오늘은 사람들이 총알을 아끼는 중이라 그럴 거야.”

“총알을 아껴요?”

“아마 12번을 노리고 자금을 아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걸.”

“아하, 그 책. 형님도 영상 속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보시더니.”

12번을 위해 다른 경매품에 응찰을 자제 중인 사람들이 많겠지만 7번 역시 만만치 않은 물건이었다.

“7번은 유명한 데 체나로 보물선에서 인양된 유물입니다. 당시 도굴꾼 페이린이 빼돌려 밀매한 백여 점 가운데에서도 마법 유물로 이름 높은 물건이지요.”

무대 위에 높이 약 60㎝ 정도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아 조각상이 올라왔다.

.균형이 잘 잡힌 체격의 청년이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활줄은 없으나 잔뜩 당겨진 활과 청년의 손 사이에 황금 화살이 걸려 있었다.

.눈에는 좁쌀만 한 붉은 보석을 박았고 머리 양쪽으로 굽이치듯 솟아난 두 개의 뿔이 있었다.

“‘마신의 활’입니다. 페이린은 이 조각상을 포함한 데 체나로의 유물 밀매로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한 번 더 보물선의 유물을 빼돌리려고 데 체나로 호에 침투했다가 제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유물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그 이후 언제부턴가 암암리에 이 활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늑대 가면은 애를 태우듯 좌중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문화재 관리국은 페이린이 밀매한 백여 점의 유물을 추적해서 육십 점 정도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신의 활은 찾지 못했습니다. 마탑 역시 추적에 합류했으나 마신의 활은 매번 추적을 피했습니다. 마탑이 합류한 이유는 이 활이 마법 유물이라는 소문 때문이지요.”

-마법 왕국 아르카니오에서 다하르에 복수하기 위해 만든 마도구라는 말이 있었어.

아실리가 살짝 냐옹거렸다.

아르카니오는 일곱 왕국 중 마법이 가장 발달한 것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데 체나로 호는 아르카니오 식 이름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다하르의 해적선이었다.

일곱 왕국 중 가장 호전적이었던 다하르는 국가의 비호 아래 해적선을 운용하곤 했는데 데 체나로는 그중에서도 규모가 큰 선박으로 아르카니오 무역선으로 위장했던 배였다.

아르카니오와 로시난트에서 약탈한 귀중품을 가득 싣고 다하르로 돌아오던 데 체나로 호가 폭풍을 만나 침몰한 후 사라진 보물선에 대한 소문은 끊임없이 떠돌았으나 그 배가 다시 발견되기까지는 오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늑대 가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부호 티그리스가 이유 없이 사망한 이유가 이 활 때문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그의 경쟁자였던 사티엔이 죽음을 앞두고 고백했다고 하지요. 마신의 활을 썼다고.”

그는 조각상을 가리켰다.

“마신의 활은 소유자의 소원을 세 번 들어 준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소원 말입니다.”

탕! 그가 지팡이를 내리쳤다.

“저도 직접 사용해 본 적이 없으니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어둠 속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이렇습니다. 죽이고자 하는 자의 초상화와 이름-본명이어야 합니다-을 화살 앞에 놓고 소유자의 피를 마신의 손에 흘리면 마신이 활을 쏜다고 합니다. 화살이 초상화에 꽂히게 되면 그 대상자는 죽는다고 하더군요.”

누군가 손을 들었는지 늑대 가면이 그쪽을 향했다.

“네, 수선화 님, 질문이 있으신지요?”

제이든의 좌측 어느 칸에서인가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가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늑대 가면은 지팡이로 손을 살짝 두드렸다.

“이만한 흑마법에 대가가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소유자의 피 외에도 뭔가 대가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마신의 활이 선택하는 대가가 뭔가 소유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것 외에는 뚜렷이 밝혀진 게 없습니다. 일정한 것 같지도 않고요.”

그는 천천히 마신의 활이 올려진 탁자 주위를 돌았다.

“사티엔 외에 자신이 마신의 활을 가졌었다고 고백한 자는 두 명이 더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자살했지요. 세 명 모두 활을 사용한 후에 무서움을 느껴서 팔아 버리거나 버렸다고 진술했습니다.”

“…….”

“정말로 이 활에 그런 힘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단지 소문일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그 세 명의 진술이 사실일 수도 있고요.”

늑대 가면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라면 무엇이 대가가 될지 모르니 두려우나, 그럼에도 누군가의 생명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 또 어둠의 매력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물건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 타인의 심장을 내 손에 쥐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끼실 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이 작품이 만약 문화재 관리국이나 마탑의 손에 들어간다면 철저한 관리하에 놓여 두 번 다시 사용될 수 없을 확률이 높습니다.”

“…….”

“아니, 흑마법을 혐오하는 현 황제 카이엔 9세의 성향이라면 아예 파괴하겠다고 할지도 모르죠.”

아까 제이든과 복도에서 부딪쳤던 마녀 가면이 부채를 들어 올려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신청했다.

그녀는 천천히 조각상 주위를 돌면서 앞뒤를 살펴볼 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제이든도 마신의 활을 자세히 보려고 부채를 들었다.

-저거, 손대지 말고 봐. 가능하면 너무 집중하지 말고.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고 있던 아실리가 말했고 제이든도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레노아 양이 잘 봐 달라고 한 물건인데.”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꼭 회수해야 하는 물건이니까 제이든이 확인해 주면 좋겠지. 근데 제이든 요즘 물건의 내력에 빠졌다가 나왔다가 하는 시기라서 좀 위험해.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저거 흑마법 기운이 너무 강해 보여. 보호 마법 먼저 걸고 나서 봐.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아실리의 말대로 스스로에게 보호 마법을 먼저 걸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유물 중에 가끔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가까이 오거나 건드리는 자를 공격하는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경우가 있다.

.보호가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을 해치기 위해 미끼로 쓰이는 흑마법 물품도 있고.

감정사들도 그런 마법 유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 마법을 배운다.

3급 때는 유물에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한 감지 마법을 배우고 만약 방어 마법이 걸린 물품이라고 파악되면 손을 대지 않는다.

마법 유물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기본적으로 2급 감정사 이상이라야 유물의 마법 여부까지 감정할 수 있지만 단순히 방어 마법을 감지하는 정도는 특별한 마법적 재능이 없어도 배울 수 있고 재능이 있는 3급 감정사라면 스스로에게 가벼운 보호 마법을 두를 수도 있다.

그보다 더 발전해 마법 유물도 다룰 수 있고 보호 마법은 물론 감정 마법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2급 감정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보호 마법을 발동시킨 제이든이 마신의 활에 가까이 갔다.

흑마법이 걸린 물건이라는 선입견을 제외하고 보면 굉장히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곱슬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솟아 있는 두 개의 뿔만 아니라면 마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듯했다. 청년의 얼굴도 몸도 남성적이면서도 우아하게 조각되었고 섬세하게 표현된 얼굴은 표정이 살아 있었다.

재질이나 조각 상태로 보면 에테노른력 900년대의 물건 같은데, 굉장히 뛰어난 솜씨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품에 사람을 죽이는 마법을 걸었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엇!”

조각상과 눈이 마주친 제이든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붉은 보석을 박은 마신의 두 눈이 유혹하듯 반짝였던 것이다.

마치 내 눈을 봐라, 너에게 나의 내력을 보여주겠다면서 제이든을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보면 안 돼.’

아실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제이든 역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가시덩굴이 몸에 두르고 있는 보호 마법을 뚫고 들어오려는 듯한 따갑고 기분 나쁜 느낌이 피부를 쿡쿡 찔렀다.

제이든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늑대 가면에게 잘 봤다는 손짓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왠지 등 뒤에서 마신의 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후, 섬뜩해라.”

제이든이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 앉자 경매가 시작되었다.

흑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꺼림칙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런 물건에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세 명 정도의 응찰자가 경쟁을 시작했다.

“이거 경매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저런 위험한 물건이 밖으로 풀리면 큰일인데.”

“우리 형이랑 일하는 사람들이 언제쯤 나타날지 모르겠네요.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니 답답하네요.”

제이든과 미누엘이 소곤거리자 아실리도 살그머니 끼어들었다.

-경매 중엔 경계가 더 심할 거야. 다 끝난 후에 응찰자들이 물건 인수할 때를 노리는 거 아닐까?

“흠.”

아실리의 말이 그럴듯해서 제이든은 다시 경매에 집중했다.

마침내 모든 경매가 끝나고 마지막 12번, 제이든이 꼭 손에 넣어야 하는 ‘에트루리안의 서’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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