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5화
8. 토끼발(9)
토끼발은 곧 다음 영상으로 넘어갔지만 제이든은 한동안 가슴이 떨렸다.
예전 같으면 그냥 부적인가보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는데 포이를 데리고 있다 보니 전처럼 대수롭지 않게 볼 수가 없었다.
경매에 나온 토끼발이 아무래도 포이의 엄마 토끼 같아서 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미누엘 역시 토끼 수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영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차례차례 바뀌는 경매품 중 아실리가 알아보는 장물과 밀수품만 서너 점이 더 있었다. 하긴 밤의 경매에 나오는 물품들이니만큼 출처가 깨끗지 못한 물품이 훨씬 많은 게 당연했다.
“자,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물품입니다.”
마지막 영상이 뜨는 순간 제이든과 아실리가 동시에 헉 숨을 들이마셨다.
“형님, 왜 그러세요?”
옆에서 묻는 미누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한 제이든은 의자에서 거의 일어서다시피 허리를 앞으로 빼고 영상에 집중했다.
“제가 밤의 경매사 노릇을 오래 했지만 이렇게 전설적인 물품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늑대 가면이 정중하게 지팡이를 들어 올려 벽을 향했다.
고풍스러운 책 한 권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낡은 가죽 표지에 화려한 자개 상감 장식이 되어 있고 앞뒤 표지의 귀퉁이에는 아름다운 세공의 은제 죔쇠가 끼워져 있는 책, 표지에는 우아한 글씨체로 제목인 듯싶은 금박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읽을 수는 없었다.
“옛이야기나 전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천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다는 ‘에트루리안의 서’, 일명 ‘용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일곱 왕국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왕국 에테노른, 황무지와 괴물들이 들끓던 이 대륙에 처음으로 왕국을 세우고 인간이 살아갈 기초를 다진 에테노른의 역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웅!”
늑대 가면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용의 가호를 받았다는 에트루리안이 용의 말을 받아쓴 예언서라고 하지요. 인연이 닿는 자만이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카이엔 대제가 일부 해독했었다고 하고 성녀 비아트리스가 일부 읽어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후 해독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니 내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 자체만으로도 최상의 예술품입니다. 천 년 동안 가짜 ‘에트루리안의 서’도 수백 권이 유포되었습니다만…….”
그는 다시 한번 화면을 가리켰다.
“우리는 이 책이 바로 그 ‘에트루리안의 서’ 진품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방 전체에 물결처럼 흔들리는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흥분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칸막이를 넘어 파도처럼 번졌다.
“저거, 진품일까?”
제이든은 흥분한 나머지 미누엘이 옆에 있는 것도 잊고 중얼거렸다. 대답한 것은 미누엘이 아니고 아실리였다.
-그림에서 본 책이랑 똑같기는 한데, 실물을 안 보고는 뭐라 말 못 하겠다옹. 오십 년쯤 전에도 정말 진짜 같은 책이 한 번 나와서 세시온이랑 에테노리움까지 갔었는데 결국 가짜였다옹.
갑자기 고양이 말투가 터져 나오는 걸 보니 아실리도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옛 에테노른의 수도였던 에테노리움은 지금도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다.
셀레스테 경매도 여기서 열리며 카이에른에 있는 국립 박물관과 함께 카이엔의 양대 박물관인 에트루리안 박물관도 여기에 있다. 박물관의 이름은 물론 영웅 에트루리안의 이름을 딴 것이고.
‘에트루리안의 서’는 제이든이 다미에르의 유지를 이어 찾아야 하는 네 가지 유물 중 하나였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 알 뿐 어디서 어떻게 찾기 시작해야 할지도 막연했던 이 책을 여기서 만나다니!
“제가 오늘 에테노른의 정복을 입고 나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오늘 밤의 경매는 에테노른으로 시작하여 에테노른으로 끝나겠습니다. 열두 가지의 경매품을 모두 잘 보셨을 테니 잠시 휴식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삼십 분 후 첫 경매를 시작합니다.”
동행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경매품을 어떻게 응찰할지 의논하느라 웅성웅성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담당 직원을 불러 음료를 주문하거나 뭔가를 묻는 사람도 있는 듯했다.
“이대로 경매를 진행하면 되는 건가요? 만약 우리 형이 못 따라온 거면 어떡하죠?”
미누엘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라파엘은 제이든과 미누엘에게 경매에 무사히 참석하기만 하면 알아서 따라온다고 했지만 아무런 통신 장치를 갖고 오지 못했기 때문에 연락할 길이 없으니 답답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물건을 잘 봐 놓으라고 했으니 나는 일단 그렇게 해야지.”
제이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임무는 경매에 나오는 물건을 잘 보고 분석, 기억해 두라는 거였으니 일단 감정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작정이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
“고양이 손님, 이쪽입니다.”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주변도 슬쩍 둘러보려고 제이든이 일어서자 족제비 사내가 금방 따라붙어 길을 안내했다.
‘안내라기보다는 감시겠지. 철저하네.’
복도 끝 화장실은 남녀가 다른 방인데 족제비 사내처럼 고객 한 팀당 한 명씩 담당이 따라붙어서 화장실도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여보내는 모양이었다.
가면을 쓴 사람 두어 명이 복도에서 제이든과 스쳐 지나갔다. 고깔모자까지 갖춘 마녀 가면을 쓴 몸집이 작은 여자가 지나가면서 제이든과 툭 부딪쳤다.
미안한 듯 손을 들어 보이며 뭐라고 말하려는 여자를 뒤에 따라오던 남자가 재빨리 제지했다.
“마녀 님, 손님들끼리의 대화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여자는 뭔가 말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제이든에게 손만 들어 보이고는 그냥 경매장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제이든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었는데 어찌나 감시가 심한지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실망한 채 다시 자리에 앉은 제이든의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든, 레노아예요. 내 말 들리면 잠깐 일어나서 칸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요. 두리번거리지 말고.’
제이든은 깜짝 놀라 막 들어 올리려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칸막이 밖으로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고양이 님?”
“아, 긴장해서 그런지 팔다리가 좀 저려서요.”
잠시 팔다리를 쭉쭉 폈다가 칸막이 안으로 도로 들어온 제이든에게 다시 머릿속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내 말이 들리는 거 확인했어요. 일단 그대로 경매에 참여하세요. 1번, 7번, 12번을 집중해서 봐주세요. 가능하면 감정도 부탁드려요.’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제이든은 그냥 혼자서 머리만 주억거렸다.
“미누엘, 혹시 마법사가 자기 말을 다른 사람 머릿속으로 바로 전달할 수 있는 마법 알아?”
“예? 저는 마법 잘 몰라요. 그치만……, 그런 마법 들어본 적은 없는데요?”
미누엘은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제이든을 쳐다봤지만 사실 아실리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아실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냐아아앙 울었다.
-일반 마법사가 쓸 수 있는 마법 중엔 없는데, 레벨이 높은 고급 마법사라면 비슷한 게 가능할지도. 귓속말을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는 마법이 있거든. 자기 모습과 말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할 수는 있지만 그건 수정구가 필요하고……, 아!
냥! 하고 뭔가 깨달은 듯 외친 아실리가 말을 이었다.
-동방 대륙에 전해져 내려오는 무술 공부 중 그런 게 있다던데. 머릿속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 있대.
“오! 전으…….”
-전으?
“전이요?”
아실리와 미누엘이 제이든을 바라봤지만 무협지깨나 읽은 한국 출신 청년은 혼자 납득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전음입밀 같은 건가 보네.’
제이든은 괜히 고개를 빼고 주위를 휘휘 둘러봤지만 어디서 그 전음이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 그 여잔가? 하지만 레노아 양은 키가 큰데 그 여자는 몸이 작았고 어딘가 젊은 여자 같은 느낌은 아니었어. 그리고 레노아 양은 견습 마법사라지 않았나?’
견습 마법사가 전음 같은 고급 기술을 쓸 수 있을지 머리를 갸우뚱거리던 제이든은 곧 경매가 시작한다는 경매사의 말에 무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튼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1번 경매품인 에테노른의 도기 항아리가 무대 중앙 탁자 위에 올라왔다.
감정사의 이름을 단 감정서를 동봉할 수 없는 장물인지라 주최 측에서 따로 감정한 열발광 결과를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고대 도기를 감정하는 방법 중 열발광 검사가 있다. 도기 바닥에서 아주 작은 도편을 채취하고 그 도편을 고온으로 가열하는 방법이다.
가열된 도편에서는 옅은 푸른빛이 나는데 이 푸른 발광을 열발광이라고 부른다. 이 발광열의 세기에 따라 도기가 처음 가마에서 구워진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를 계산해 낼 수 있다.
“열발광 검사 결과 이 도기는 에테노른력 380년에서 400년 사이에 구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에테노른 도기의 전성기 시절이지요. 모양새의 아름다움이나 보존 상태의 훌륭함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원래 에트루리안 박물관의 소장품이었습니다. 이미 검증된 명품이지요. 나와서 직접 확인하고 싶으신 분은 부채를 들어 주세요. 네, 거기 너구리 님, 나오십시오.”
감정사인 듯한 너구리 가면이 나와서 도기를 꼼꼼히 뜯어보고 가져온 돋보기와 마법 감지용 도구까지 사용해 찬찬히 살펴본 뒤 들어갔다. 두어 명이 더 나왔고 제이든도 부채를 들었다.
안력을 집중하자마자 도기 전체를 감싸는 맑은 푸른빛 아우라, 잠시 후 약간의 금빛이 섞이는 게 의심할 여지 없는 명품이었다.
경매가 시작되자 꽤 여러 명이 연이어 부채를 들었지만 제이든은 응찰하지 않았다. 격렬한 응찰 경쟁 끝에 결국 너구리 가면과 함께 온 사자 가면이 항아리를 낙찰받았다.
두 번째 경매품은 의외로 출처가 깨끗한 물건이었으나 가격대는 1번 경매품만큼 높지 않았고 세 번째가 문제의 토끼발이었다. 제이든은 부채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이건 남에게 넘길 수 없지. 오늘 밤의 경매가 문화재 관리국에 걸려서 경매품을 압수당한다 해도 토끼발까지 압수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포이의 엄마 발일지도 모르는데 아무에게나 넘어가서 부적으로 쓰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진품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미와 새끼를 틀에 가둔 채 토끼발을 만드는 과정이 영상으로 나왔다. 제이든 일행은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포이가 맞아.
아실리가 반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냐옹거렸다.
“포에니 토끼의 토끼발, 새끼를 향한 어미의 모정이 그대로 담긴 부적입니다. 만든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아직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토끼발이 첫 주인을 찾습니다. 시작가 8천 골드, 호가 5백 골드로 시작합니다. 8천, 8천 5백, 우측 나비 님 9천, 중앙 사자 님 9천 5백.”
“냥!”
아실리가 부르짖는 것과 동시에 제이든도 부채를 들었다. 경매사가 잠시 말을 더듬었다.
“좌측 고, 고양이 님, 네, 고양이 님 두 분이 1만 부르셨습니다.”
#작가의 말
작중 고대 도기의 연도를 측정하는 열발광법 검사(Thermoluminescence Test)는 실제로 도기 감정에 사용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