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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23화 (23/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3화

8. 토끼발(7)

세간에 알려진 키타이너의 이력은 이렇다.

남부 바다의 어느 섬에서 태어나 그림에 뜻을 품고 일찍부터 대륙으로 건너온 키타이너는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그림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배고픈 무명 화가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가 결국 위작에 손을 대었지만, 사실 단지 돈을 위해서 위작을 만든 것은 아니라고 한다.

키타이너는 재능 있는 무명 예술가들이 대중에게 그림을 보일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던 당시 미술계의 상황, 예술가와 수집가 사이에서 양쪽을 농락하는 중개상들, 그림의 가치를 보지 않고 이름값만으로 가격을 매기는 풍토 등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위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직접 혼을 담아 그린 그림은 중개상이나 화상들에게 은전 몇 닢의 가치도 없다고 조롱받았다.

하지만 그가 정체를 숨긴 채 거장 모데로티스나 유센토르의 그림을 모사했을 때, 그 위작은 수천 골드, 때로는 수만 골드에 팔려 나갔다.

한다하는 감정사들이나 미술업계 종사자들도 그의 그림이 위작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쩌다 의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해도 주위에서 인정해 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암암리에 그에게 위작을 주문하고 유통과 판매를 맡았던 비밀 중개상 몇 명 사이에서는 키타이너의 이름이 높아지고 ‘얼굴 없는 대가’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하지만 그들 외에는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15년간의 위작 작가 생활 끝에 그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키타이너가 스스로 위작 작가임을 공표했을 때 카이엔 대륙 미술계는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가 15년간 그려낸 위작 작품 8백여 점이 화상, 중개상, 경매 등을 통해 판매되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 누구에게 팔렸는지는 세세히 알 수도 없었고 키타이너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내지 못한 실패한 화가이고, 수많은 위작을 유통시킨 책임 또한 피하지 못할 것을 안다.”

키타이너는 말했다.

“단지 한 가지, 정말로 실력 있는 감상가나 감정사라면 내 그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린 모든 그림에는 표식이 있다.”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대륙 미술계의 격렬한 비난을 뒤로 한 채 바다로 떠나 버렸다.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섬 하나를 찾아 조용히 살다가 여생을 다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몇 점 되지 않는 키타이너 본인의 이름을 단 그림은 그가 위작 작가임이 알려진 후 서서히 가격이 오르더니 그가 죽고 나서는 급속도로 가격이 뛰었다. 뒤늦게 그의 재능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유산 절반을 비테이른 시 근교 빈민가에서 세탁소를 하던 노부부에게 남겼는데, 그가 젊었을 때 그 부부가 그를 보살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머지 절반은 그가 만난 미술상들 중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인정했던 미술상 케노스에게 남기면서 무명 화가들이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을 운영하도록 부탁했다.

키타이너의 위작은 표식을 남겼다는 본인의 말이 있었음에도 자신 있게 감정해 낼 수 있는 감정사가 없었다.

그가 판매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던 위작 몇 점을 공개했음에도 어찌나 솜씨가 좋았던지 어째서 이것이 위작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가 사망한 후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야 어느 젊은 감정사가 그의 위작을 정확히 판별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젊은 감정사의 이름은 세시온 다미에르였다.

다미에르가 처음 키타이너의 표식을 판별하는 방법을 찾아낸 후 근 백 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키타이너의 위작으로 밝혀진 작품은 이백여 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위작을 개인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는데 본인들의 수집품이 위작이리라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설령 조금 의심이 들더라도 혹시라도 위작이라는 판명이 날까 봐 아예 재감정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키타이너의 위작이 명성과 비난을 동시에 얻으면서 모순되게도 그의 위작만 수집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몇 년 전 카이에른 경매에서는 키타이너의 위작이 여러 점 출품되어 고가에 낙찰된 적도 있었다.

키타이너가 카이엔 미술계에 던진 충격이 컸기에, 그 이후 카이엔 미술계에는 상당한 혁신이 있었다.

당시 예술계의 풍토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무명 화가들의 작품이 대중 앞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작가와 고객 사이에서 폭리를 취하며 가격을 좌지우지하던 중개상들의 힘이 대폭 약해졌으며 중개상들의 몫이 적어짐에 따라 실구매가는 조정되었다.

실력보다는 명성만으로 가격을 매기던 풍토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 * *

제이든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액자를 만져보았다.

이 그림은 내게 다이카와 키후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그는 포이를 내려다보았다. 포이가 아실리의 옆구리에 붙은 채 까만 눈으로 제이든을 올려다보며 코를 쫑긋거렸다. 환각 속에서 본 다에와 놀랄 만큼 닮았다.

“포이, 네가 도와준 거니? 그림의 내력을 볼 수 있도록?”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림 그 자체의 힘과 그림에 남아 있던 다에의 마음과 포이의 능력이 합쳐져서 제이든에게 그림의 내력을 보여준 것 같았다.

제이든은 알 수 있었다. 아직 그 스스로 유물이나 예술품의 내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안 된다.

작가가 혼을 담아 완성한 명품, 가끔 하는 말로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정도의 유물이나 예술품이 제이든에게 스스로의 내력을 보여주고자 원할 때 자신의 눈이 트인다는 것을.

그리고 자칫하면 그 환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환각에 먹히지 않으려면 내가 더 수련을 해야겠네.’

환각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 토끼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 그림과 다에는 나에게 키타이너가 아직 키후나였던 시절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

제이든 역시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키타이너가 아무리 위작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이제는 키타이너의 위작을 수집하는 사람까지 있지만 사실 그가 원하던 길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명이나 다이카의 제자였다는 것을 평생 밝히지 않았다. 스승의 이름에 누가 될까 두려웠던 거겠지.

제이든은 액자에 손을 댄 채 마음속으로 말했다.

‘키타이너 씨, 제가 당신의 그림을 찾아보겠습니다. 키후나였던 시절에 당신이 그렸던 그림들요. 제가 그 그림들을 찾아서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정사로서 보람 있는 작업이 될 듯합니다.’

제이든은 라파엘을 돌아보며 힘차게 말했다.

“자, 이제 그림 수령해서 숙소에 가죠. 밤에 또 할 일이 있잖습니까.”

“냐옹.”

“포잇.”

누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실리와 포이가 대답하면서 깡충 뛰었고 라파엘이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이노시카와 미누엘이 들어왔다.

“감정은 다 끝나셨나요?”

“예. 이노시카 양, 정말 안목이 좋으십니다. 살아 있는 그림을 구하셨어요. 그림은 직접 가져가십니까? 아니면 배송을 하시나요?”

“배송업체에 부탁하려고요. 제가 먼저 메이빌에 가서 배송을 기다려야지요.”

이노시카가 구매한 ‘해변의 기수’를 업체에 배송 의뢰를 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실리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 때문에 얘길 못 들어서 너무 답답했어. 환각에서 뭘 봤어? 마지막에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몰입했던데.

제이든이 찬찬히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실리는 집중해서 듣고 있었고 포이도 마치 뭔가 알아듣는 것처럼 눈을 깜박이면서 얌전히 아실리를 보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왜 아무 말 안 했어? 이노시카 양이 낙찰받은 다이카의 그림, 그러면 그 키후나라는 사람이 그린 거 아냐?

“아니야.”

제이든은 고개를 저으며 아실리와 포이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주었다.

“그건 다이카가 키후나와 함께 그렸던 두 번째 해변의 기수야. 그 그림이 나에게 키후나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나 봐.”

아실리는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키후나는 다이카가 그린 해변의 기수를 평생 갖고 다녔구나. 그가 해변의 기수를 사랑한 만큼 그림도 키후나를 좋아했나 봐.

아마도 골동품점에 있는 해변의 기수가 키후나가 그린 그림일 것이다.

“나 그거 사야겠어. 중개상이 예약해 놨다고 하는데 내일 골동품점 가서 연락해 달라고 해야지.”

* * *

소네트 경매가 모두 끝난 일요일 밤은 델리움과 글로비스의 축제 마지막 밤이기도 했다.

경매 때문에 대륙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아서 경매의 마지막 날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 떨이에요, 떨이, 오늘 밤이 마지막이니까 안 남기고 다 팔아요.”

“예쁜 아가씨, 내일 되면 이제 이런 물건은 없어요. 와서 골라 보세요.”

“달콤하고 고소한 말린 과일 사세요. 먼 길 오신 손님들, 돌아가시는 길에 간식으로 드세요.”

미누엘과 제이든은 말린 과일을 한 봉지 사서 집어 먹으며 광장의 서쪽 모퉁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누군가 접촉해 온다고 했지?”

“예, 그런데 시간이 꽤 걸리네요.”

“그쪽에서도 우리가 누군가 달고 나오지 않는지 지켜보고 경계하겠지.”

“야아옹.”

아실리가 다리에 몸을 부비며 울어서 제이든은 말린 사과 한 조각을 주었다.

“포이가 잘 있어야 할 텐데.”

“미야옹.”

라파엘도 임무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포이는 숙소에서 이노시카와 그렉이 돌보는 중이다.

아실리와 떨어지기 싫어했지만 라파엘과 아실리가 잘 설득했는지 마지못해 이노시카 옆에 남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노시카가 사과와 당근을 주면서 인심을 산 것도 있고.

-라파엘은 토끼 수인의 피가 섞여서 그렇다치고 이노시카 양도 눈코입이 다 동글동글한 게 꼭 토끼처럼 생겼잖아. 그러니까 경계심이 덜한 것 같아.

아실리는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말했는데 제이든이 보기에도 이노시카는 흰 토끼를 연상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거기 총각들, 말린 과일 좀 더 사실라우?”

광장 끄트머리에 말린 과일 노점을 차려 놓고 있던 나이든 여자가 제이든과 미누엘을 불렀다.

“봉지 보니 저 안쪽 마르코네 가게에서 사셨구랴? 우리 집 말린 과일이 훨씬 맛있는데, 내가 판매 신청을 일찍 못해서 이렇게 외진 자리에 노점을 냈더니 장사가 영 못하네. 이쪽으로 와 봐요. 이쪽으로.”

여자는 아예 노점 밖으로 나와서 미누엘의 팔을 끌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노점은 광장 끄트머리에서도 바깥쪽 외진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의 왕래가 확연히 적었다.

한 봉지 사 줘도 되겠다 싶어 제이든과 미누엘은 여자가 끄는 대로 그녀의 노점까지 다가갔다. 노점 뒤쪽으로는 축제 기간 동안 임시로 세운 가벽이 있었다.

“어느 게 맛있나요, 아주머니?”

“다 맛있지.”

여자가 씩 웃더니 미누엘을 가벽으로 툭 밀쳤다.

“엇?”

제이든의 눈앞에서 미누엘이 물에 빠지듯 가벽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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