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2화
8. 토끼발(6)
화면이 줌으로 잡아당긴 것처럼 가까워지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뒷모습이 눈앞으로 훅 다가왔다.
‘어? 두 사람이네?’
이젤을 나란히 걸어 놓고 두 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다른 쪽은 좀 작았다.
두 사람의 발치에서 놀고 있는 토끼는 귀가 새까맣고 털이 복슬복슬한 데다 눈사람처럼 몸이 동그란 것이 포이를 꼭 닮았는데 성체인지 포이보다는 몸집이 컸다.
앞쪽을 봐야 누군지 알 텐데.
답답해진 제이든은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몸이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마치 걸음을 걷듯 제이든의 의식이 화면의 옆쪽으로 움직이면서 시야가 움직였다.
화면이 천천히 빙그르르 돌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앞쪽이 보였다.
키가 큰 쪽은 다이카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초상화에서 본 모습보다는 나이가 들었고 조금 여윈 모습이지만 평온하고 따뜻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틈틈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뭐라뭐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키가 작은 쪽은 젊은 원주민이었는데 다이카와는 달리 긴장한 얼굴이었다. 다이카가 그림을 그리는 손이나 건네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잔뜩 집중한 모습이었다.
“키후나.”
다이카가 청년을 불렀다.
“넌 이제 남의 그림을 모사할 단계를 넘어선 지 한참 되었다. 네 그림만 그려도 충분한데 왜 이걸 그리고 싶어 하지?”
청년이 약간 서투른 말투로 대답했다.
“선생님 그림, 다 너무 좋지만 이 그림이 특히 좋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해변인데 너무 아름답게 그리셨어요. 저도 그려보고 싶었어요.”
다이카가 뒤로 좀 물러선 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청년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키후나,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면 안 된다. 내가 지금 눈이 많이 흐려졌는데도 네 그림이 내 것과 정말 똑같은 것을 알겠구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재료로 함께 그린다고는 해도 이렇게 똑같이 그릴 수 있다니! 내가 눈이 멀쩡했다고 해도 구별하기 힘들겠어.”
키후나가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웃자 다이카는 엄격하게 말했다.
“칭찬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똑같이 그릴 수 있다는 건 재능이지만 절대 거기 빠지면 안 된다. 모사는 공부의 과정일 뿐 그게 결과가 되면 안 돼. 너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너만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예. 그렇지만.”
청년은 다소 풀이 죽었다.
“저는 기술만 있나 봐요. 선생님 그림을 보면 막 가슴이 울리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리셨을까 싶어요. 보고 따라 그릴 수는 있는데 저 혼자선 이런 그림을 못 그려내겠어요.”
다이카가 웃으면서 키후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라. 넌 아직 젊잖아. 경험이 쌓이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좀 더 보면 너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거다. 난 아주 기대하고 있다. 네 재능은 결코 나보다 못하지 않아.”
키후나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지만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다이카가 발치에서 놀고 있는 토끼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에니 토끼는 행운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지. 난파선에서 우리가 이 토끼를 구한 후 왠지 나는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이후 내 소원은 오직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뿐이었지.”
그는 이젤을 향했다.
“다른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그릴 때만은 마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림이 보인단 말이지.”
다이카는 토끼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다에, 네 덕분일까? 응?”
“포잉?”
토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기다란 귀를 갸웃갸웃하면서 까만 눈으로 다이카를 쳐다보다가 깡충 뛰면서 키후나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키후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토끼를 안아서 뺨을 비비자 토끼는 간지러운 듯 피릿피릿 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비가 오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이젤과 그림 도구를 거두기 시작했다.
키후나가 다이카를 부축했고 두 사람은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끼는 깡충깡충 뛰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 장면은 풀로 지붕을 잇고 가느다란 나무로 벽을 짠 이국적인 집이었다. 휴양지의 방갈로 같은 느낌인데 실내에는 그림이 여러 점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집 전체가 화실 같았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듯한 여성이 마중 나왔고 키후나는 다이카를 그녀에게 인계한 뒤 오던 길로 돌아갔다.
다이카의 집 벽에 ‘해변의 기수’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키후나와 함께 그리고 있던 그림도 똑같은 ‘해변의 기수’였다.
제이든은 뭔가 알 것 같았다. 첫 번째 해변의 기수는 다이카가 혼자 그린 그림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해변의 기수는 아까 다이카가 키후나와 함께 그린 두 점의 그림인 듯했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마차가 오가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큰길에서 뒤쪽 거리 쪽으로 화면이 잡히더니 빈민가에 가까운 뒷골목 거리에 있는 허름한 집이 제이든의 눈에 들어왔다.
거실과 침실의 구분도 없는 화실이었지만 벽에는 그림이 첩첩이 기대어져 있었다. 아까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키후나가 있었고 상인 차림을 한 두 명의 남자들이 문간에 서 있었다.
“그래서, 내 그림은 판매할 가치가 없다는 건가요?”
키후나는 잔뜩 목이 잠긴 소리로 물었고 상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그렇지,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이런 그림을 누가 큰돈 내고 사겠어? 제대로 교육받은 적도 없는, 섬에서 온 원주민이 그린걸.”
“다이카에게 배웠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알아? 다이카의 유족들은 자네 모른다고 했어. 이미 병사한 다이카가 보증해 줄 것도 아니고.”
수십 년간 연락도 없다가 다이카가 죽고 나서 자신이 대륙까지 와서 부고를 알린 후에야 나타났던 친척 몇 사람. 남겨진 그림이고 뭐고 서로 더 가져가려고 눈이 벌겋던 그들이 무슨 유족이라고.
키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제자라고 해서 득을 볼 생각은 없어요. 그냥 그림만으로 평가받고 싶어요.”
앞에 있던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물론 자네 그림은 좋아. 나도 미술상 경력이 꽤 되니까 그림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것만으로 그림값이 매겨지는 건 아니거든. 뭐 그림이 여러 점 된다니까 헐값에 한꺼번에 넘기면 집안 장식하려는 사람들이 한두 점 살지는 모르지.”
상인 중 한 명이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그것보다 말이야, 자네 토끼를 데리고 있다던데. 포에니 토끼를 닮았다면서? 차라리 그걸 팔지그래? 그림보다 수십 배는 더 비싸게 쳐주지. 한번 볼 수 있을까?”
“다에는 팔지 않아요. 제 가족이니까.”
“에헤이 그렇게 딱 자르지 말고, 자네 여기서 먹고 살길도 없다면서. 그 토끼는 원래 기르는 토끼가 아니야, 토끼발을 만드는 거라고, 토끼발을 만들면 그까짓 그림 백 장 판 것보다 나을걸.”
“그래, 자네 먹고사는 데 신경 쓰지 않고 그림만 그릴 수 있다니까. 그러다 보면 화가로 이름을 얻을지도 모르지,”
“나가요!”
키후나는 상인들을 내쫓고 문을 잠그고 나서 한쪽에 세워진 낡은 옷장 문을 열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던 토끼가 깡충 뛰어나와 키후나의 품에 안겼다.
“걱정 마, 다에, 내가 굶어 죽으면 죽었지 널 팔진 않을 거야.”
“키이!”
“울지 마.”
토끼에게 뺨을 비빈 키후나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그냥 섬에 돌아갈까? 선생님 돌아가시고 대륙에 온 지 몇 년이나 됐는데, 난 아무래도 여기서 성공 못 할 거 같아. 아무도 내 그림을 알아봐 주지 않는걸. 이제 월세도 낼 수 없고 물감도 살 수 없으니…… 그냥 섬에 돌아가서 밭 갈고 물고기 잡으면서 맘 편히 살까?”
그날 밤, 키후나와 다에가 곤히 자고 있을 때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불이야, 불이야! 모두 밖으로 나와요!”
“불이다, 불! 사람 살려!”
자고 있던 키후나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다에를 끌어안고 이미 연기가 자욱한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바깥은 이미 자다가 뛰쳐나온 사람들로 난장판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가의 집은 불이 번지기가 쉬워 모두 난리 법석이었다. 벌써 양동이에 물을 퍼 온 사람들이 집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이쪽으로. 불 끄는 데 방해되니까 비켜.”
누군가 키후나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는 정신없이 끌려갔다.
왠지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느낌이 들어 두리번거렸을 때는 인적 없는 골목 안까지 와 있었다.
“누구시죠?”
“키이잇!”
자신을 잡아끄는 사람을 돌아보려는 순간 품 안의 다에가 경고하듯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고 그 순간 뒤통수에 퍽! 하고 몽둥이가 떨어졌다.
“토끼 못 도망가게 빨리 잡아!”
“사람은 신경 쓸 거 없어. 토끼만 뺏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면서 키후나는 토끼를 끌어안았던 손을 풀었다. 다에, 도망가!
* * *
“괜찮아요?”
키후나가 눈을 떴을 때 그는 허름하지만 아늑해 보이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아유, 이제야 정신이 들었네, 큰일 날 뻔했어요.”
인자해 보이는 중년 부인이 그를 보며 겨우 마음이 놓인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난 틈에 사람을 해치다니, 불나서 뛰어나온 사람한테 뭐 뺏을 게 있을 거라고. 다행히 우리 아저씨가 봐서 소리를 지르니까 도망갔대요.”
부인의 뒤에서 비슷하게 후덕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머리를 쑥 내밀었다.
“두 놈이던데, 쓰러진 사람 품을 뒤지는 거 같길래 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갔지. 이래 봬도 내가 젊었을 땐 한가락 했거든.”
“다에, 다에는?”
정신이 든 키후나가 벌떡 일어나려다가 도로 쓰러졌다.
“아유, 머리 다쳤는데 그렇게 벌떡 일어나면 안 돼요! 근데 다에가 누구야?”
“피잉!”
침대 밑에서 토끼가 팔짝 뛰어올라 키후나의 가슴에 안겼다.
“다에, 무사했구나.”
“피이잉!”
부둥켜안고 있는 청년과 토끼를 보면서 중년 남자가 웃었다.
“아아, 그 토끼가 다에인가? 대단한 토끼던걸.”
“예?”
“내가 골목 안으로 뛰어들어 가서 보니 그 토끼가 자네한테 손대려고 하는 놈들 얼굴에다가 뒷발차기를 신나게 하고 있던데. 껑충껑충 뛰면서 얼마나 날뛰는지, 토끼가 그렇게 사나운 동물인 줄 처음 알았다니까.”
“아…….”
“우리 집까지 자네를 업고 오는데 뒤에서 깡충깡충 따라오더라고. 강아지나 고양이만 주인 따르는 줄 알았는데 말야.”
그날 밤의 불은 누군가의 방화였다. 짐작은 가지만 증거가 없어서 고발도 할 수 없었던 키후나는 수년간 피땀을 흘려 그린 그림들이 대부분 타버린 집 앞에서 다에를 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두고 보자. 어떻게든 갚아주고 말 테니.
그리고 다음 장면, 제이든은 널찍하고 잘 꾸며진 응접실에 있는 키후나를 보았다.
아까보다 겨우 두어 살 더 먹어 보였는데 훨씬 관록이 붙은 느낌이었고 머리며 옷차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키타이너 씨, 그럼 이 금액으로.”
마주 앉아 있던 남자가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내밀자 키후나는 종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 금액에 넘기죠.”
“모데로티스의 ‘황혼’과 유센토르의 ‘지평선’이지요.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비밀은 철저히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남자는 일어서려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키타이너 씨, 다이카의 그림은 안 되겠습니까?”
키후나-키타이너는 차가운 눈길로 그를 힐끗 보았다.
“다이카의 그림은 그리지 않습니다. 너무 위대한 작가니까요.”
“하지만 유센토르처럼 다이카보다 더 거장인 작가의 그림도 그려 주시면서…….”
뭔가 말을 이으려던 남자는 곧 꼬리를 내리면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미술품 중개상으로 보이는 남자를 내보내고 난 키후나는 응접실에 이어진 화실의 문을 열었다.
“다에. 배고프지 않니?”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나와 키후나에게 안겼고 그는 토끼를 어깨에 올린 채 화실로 들어갔다.
키후나와 토끼가 들어가는 화실의 안쪽 벽에 ‘해변의 기수’가 걸려 있는 것이 언뜻 보였고, 토끼가 키후나의 어깨너머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 *
-제이든!
“엇!”
아실리의 날카로운 부름에 제이든은 순간 정신을 차리면서 풀썩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세요? 제이든 씨, 갑자기 마치 백일몽이라도 꾸시는 것처럼…….”
라파엘이 제이든의 팔을 건드리며 물었고 제이든은 정말 꿈에서 깨어난 사람답게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진짜 잠깐 백일몽을 꿨네요.”
“2~3분 정도긴 했는데 조금 이상하신 것 같아서 제가 몇 번 불렀는데 못 들으시더라고요.”
“아 너무 집중하고 있다 보니까.”
-제이든.
아실리가 다시 야옹 하고 울었고 옆에서 포이가 덩달아 포이! 하고 울었다.
-지금 그림에 먹힐 뻔했어.
제이든은 아실리의 말을 들으며 심호흡을 했다.
와! 몰입이 진짜 장난 아니긴 했어. 그런데 정말 놀랐네. 키후나가 그 키타이너라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위작의 명인, 얼굴 없는 대가(大家) 키타이너가 다이카의 제자였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