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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20화 (2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0화

8. 토끼발(4)

첫 번째 골동품점은 언뜻 보기에도 역사가 깊어 보이는 오래된 곳이었다. 매장도 크고 주인 외에도 직원이 둘이나 더 있는 걸 보니 상당히 번창하는 가게인 듯했다.

“오늘은 친구분과 같이 오셨네요?”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것이 오히려 관록을 더해주는 주인장도 그림에서 빠져나온 골동품상처럼 중후하고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어제 왔을 때 마음에 드는 물건이 좀 있었는데 저 혼자서 결정할 수가 없어서 말이죠. 오늘은 최고의 감정사님이랑 같이 왔으니 숨겨놓으신 좋은 물건 있으면 아끼지 말고 보여주세요.”

미누엘은 으쓱거리면서 제이든을 소개했다.

우연히 발견한 골동품으로 인해 큰돈을 번 김에 골동품에 관심이 생긴 초짜 수집가 연기가 그럴듯했다.

“아, 이분이 혹시 그 헤카디아의 너울을 알아보셨다는 감정사님인가요?”

“예. 제가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지요.”

어깨에 힘을 주는 미누엘의 말을 들으며 골동품상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지만 제이든을 뜯어보는 눈매는 오히려 더 예리해졌다.

“이거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한번 죽 둘러보시고 혹시 우리 집에 묻혀진 보물이라도 있으면 넌지시 귀띔해 주시지요.”

미누엘은 매장을 둘러보며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물어대었고 제이든은 대충 대답을 해주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나 직원들을 살폈다.

딱히 의심스럽거나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나 물건은 없었고 매장에 갖춰놓은 골동품들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형님, 이건 어때요? 투자할 만한 물건일까요?”

진짜 관심이 있어서 묻는다기보다는 대충 고르는 거긴 하겠지만, 미누엘이 관심 있는 척 골라서 제이든에게 들이미는 물건들을 보니 미누엘이 헤카디아의 너울을 발견한 건 진짜 천운임이 틀림없었다.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인 물건들 중에서 용케도 뭔가 조금 부족하다 싶은 것만 골라내는 게 정말로 미누엘이 골동품 수집에 뜻을 뒀다면 쫓아다니며 말려야 할 뻔했다.

“음. 같은 형태의 물건이라도 그거보단 저쪽 게 나은데, 저건 어때?”

미누엘을 말리면서 가게 주인을 보니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게 어제 이미 미누엘의 안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건 꼭 구매하고 싶은데, 형님, 투자 목적이 아니어도 제가 수집하고 싶어요. 제가 이제 이 정도 돈은 있잖아요?”

“그래, 다 좋은데 일단 물건을 봐놓고, 구매는 내일 헤카디아의 너울이 낙찰되고 실제로 자금을 손에 쥔 뒤에 하는 걸로 하자. 경매 끝나고 다시 와 보자고.”

미누엘을 달래며 몇 가지 물건을 찜해 놓고 가게를 나서는 제이든에게 주인이 고생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돈만 있고 철은 없는 막냇동생 달래는 형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미누엘, 연기 잘하네.”

“헤헤.”

가게를 나올 때까지도 칭얼거리다가 가게에서 멀어지자 금방 의젓해진 미누엘은 붉은 곱슬머리를 흔들면서 웃었다.

“역할놀이가 꽤 재밌네요. 제가 연극 보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거든요. 도시에서 태어났으면 배우도 꿈꿔 봤을지 모르는데.”

신이 난 미누엘은 두 번째 골동품점을 향해 앞장섰고 제이든도 웃으면서 그 뒤를 따랐다.

두 번째 골동품점은 생긴 지 몇 년 안 되는, 골동품점으로서는 신생 가게였다.

앞의 가게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돈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하지만 물건의 질은 앞의 가게보다 고르지 못했다.

미누엘은 앞의 가게나 마찬가지로 이것저것에 관심을 보이며 흥분했고 제이든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가게와 주인, 물건들을 관찰했다.

“형님, 이거 한번 보세요. 괜찮지 않아요?”

왠지 조금 어두운 아우라를 풍기는 유물이 있어 한눈을 팔고 있던 제이든은 미누엘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또 대충 보기에 그럴듯한 골동품을 찍었겠지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던 제이든은 조금 놀라면서 미누엘 옆으로 다가섰다.

투명한 마법 보호막이 쳐져 있는 벽에 그림이 몇 장 걸려 있었는데 미누엘이 그중 한 장을 보고 있었다.

색은 좀 바랬는데 바닷가 모래밭에 상의를 벗은 사람들 몇 명이 말을 탄 채 흩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이쪽저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분방하게 흩어져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만이 우뚝 선 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폴로 다이카의 ‘해변의 기수’인데?”

“유명한 그림이에요?”

“음, 유명하지. 그것보다도…….”

제이든이 놀라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가까이 왔다.

“어떻습니까? 훌륭하지요? 어렵게 구한 겁니다.”

“예에, 그런데.”

제이든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에게 물었다.

“이거, 다른 그림은 오늘 소네트 경매에 나왔던데요.”

다이카의 ‘해변의 기수’는 똑같은 그림이 두 점 있다. 그가 똑같은 그림을 왜 두 점 그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가가 특정한 그림을 두세 점씩 남기는 일은 적지 않다.

구도나 채색을 바꿔보는 경우도 있고 연습으로 그린 그림과 완성본이 거의 비슷한 경우도 있다.

지구에서도 유명한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Jeunes filles au piano)’의 경우 같은 구도로 세부 표현이 조금씩 다른 그림이 여섯 점 있다. 그중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두 점이 가장 유명하다.

“맞아요. 이름을 밝히지 않는 개인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인데 하나는 이번 경매에 나왔고, 이건 제가 얼마 전에 어렵게 구했습니다. 사실 소네트에 나간 작품과 한 쌍으로 묶어 출품하고 싶어서 경매 위원 측에 중개를 부탁했었는데 그쪽 소유주분의 동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냥 출품하지 않으신 건가요?”

“예.”

“그럼, 혹시 구매 가능합니까? 가격은 얼마 생각하고 계신지요?”

제이든이 묻자 골동품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미 예약한 중개상이 있습니다. 따로 개인 수집가에게 판매해 보겠다고 했어요. 소네트 경매에 출품하는 것보다 가격을 높게 받을 자신이 있다더군요.”

“예에…….”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에 안력을 집중했다.

그냥 살펴보아도 다이카의 진작이 분명해 보이긴 했으나 혹시 몰라서 기를 집중해 보았더니 파르스름한 빛무리가 그림을 감싼다. 진품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 그림은 다이카 작품 중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편인데, 감정사님이 관심을 보이시는 걸 보니 일반적 평가보다 가치가 높은 걸까요?”

주인의 물음에 제이든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뇨, 그렇지는 않고 일반적 평가나 가치만으로 보면 다이카의 다른 작품들 중 이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많겠습니다만, 제가 이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제이든이 숨겨진 계곡, 세시온 다미에르의 서재에 갇혀 카이엔의 문화와 미술사를 공부할 때 한동안 다이카의 그림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다이카는 동부 명가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일찍부터 명사에게 사사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아서 초기에는 화려한 궁정과 도시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삼십 대를 넘으면서 그는 소박한 시골 풍경, 바다, 아직 문명이 닿지 않은 이국적인 섬 등에 빠졌고 남부 해안에서도 가장 남쪽, ‘바다의 끝’이라는 별명을 가진 섬에 이주해 살면서 원주민들의 그림을 그렸다.

‘해변의 기수’는 그가 말년에 그린 그림들 중 하나인데, 다이카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평가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묵직하면서도 정교하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다이카의 그림들 중에서 이 작품은 마치 스케치하듯 단순하게 그린 느낌을 준다.

사용한 색상도 다른 그림들에 비하면 밝고 가벼워서 무게가 덜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제이든은 이 그림에 매력을 느꼈다.

특히 이 무렵 다이카는 병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는데도 이처럼 훌륭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는 데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제이든 자신은 시력을 거의 잃었을 때 그림을 포기하려 했었는데.

“해변의 기수 두 점이 같은 시기에 글로비스에 모이다니 신기하지요? 한 점은 누군가 낙찰받아갈 테고 이것까지 판매되면 이제 해변의 기수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글쎄, 그럴까요?”

제이든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숨겨진 계곡 속 다미에르의 서재에 이 그림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제이든이 감정 일을 하면서 우연히 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수집가를 알게 되어 어렵게 설득해서 그림을 구매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글로비스에 두 점이 있는 것일까? 소네트 경매에 나온 것과 이 골동품점에 있는 것 두 점 중 하나는 위작이거나 아니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이카의 ‘해변의 기수’가 하나 더 있다는 말이 되겠다.

오늘 경매장에 나오는 다이카의 작품도 도록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진품처럼 보였는데. 직업적 관심에 불이 붙은 제이든은 입맛을 다셨다.

누군가 낙찰받아가 버리면 다시 볼 기회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너무 아쉬웠지만 오늘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 번째 골동품점은 어떻게 손님이 찾아가는지 모를 정도의 골목 안에 있었고 아주 작은 가게였지만 역사는 만만치 않아 보였다. 나이를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자신도 유물처럼 보이는 주인 노파는 대놓고 미누엘을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우린 기본도 없는 손님은 안 받아. 어젠 뭘 모르고 들어오게 했었지만 오늘은 이 총각이 같이 오지 않았다면 문도 안 열어줬을 거야.”

“아니, 할머니, 내가 뭐 어때서요? 앞으로 얼마나 큰 고객이 될 건데.”

“시끄러워, 물건도 볼 줄 모르는 빨간 머리 너는 저쪽으로 가 있어. 너한테서 볼 건 운뿐이구만그래. 밤색 머리 자네는…… 뭐 보고 싶은 거 보게. 물건에 먹히지 않게 조심하고.”

“할머니, 손님을 왜 이렇게 차별해요? 이 감정사 형님 내가 데리고 온 건데.”

“시끄럽다, 할 일 없으면 내 어깨나 좀 두드리던지. 아이고 허리야.”

마치 조손 간이나 되듯 티격태격하는 주인 노파와 미누엘을 뒤로하고 물건을 둘러보면서 제이든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 집의 물건들은 굉장히 오래된 것들만 있기도 했지만 왠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물건에 먹히지 말라고 했지? 그는 노파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혹시 회색의 소녀상처럼 과거를 보여주는 유물은 없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유물은 없었다. 아직 제이든이 마음대로 유물의 내력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좀 남은 김에 미누엘이 어제 들렀다는 다른 골동품점과 카페까지 들러 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아실리와 포이가 사이좋게 자고 있었다. 아실리의 등에 업혀 자고 있던 포이는 제이든이 문을 열자 아실리의 등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통 튀고는 못마땅한 듯 뒷발을 탕 굴렀다.

“별일 없었어?”

-응. 제이든은? 나 없다고 막 실수하고 그러진 않았어?

“무슨 소리야. 혼자서도 거뜬하게 잘 다녀왔지.”

-흐응, 많이 컸네, 우리 제이든.

아실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콧방귀를 뀌었고, 제이든은 아실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면서 속삭였다.

“아무래도 허전하긴 했어. 팔 하나 떼어놓고 나간 거 같더라.”

아실리가 고르릉거리며 목을 울렸고 포이가 덩달아 코를 오물거렸다.

복도에서 그렉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이노시카와 그렉이 경매장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실리, 포이, 언니가 사과 사 왔다.”

이노시카가 사과 봉지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

“이노시카 양, 경매는 어떻게 됐나요?”

“아, 아주 잘 끝냈답니다. 제이든 님.”

이노시카는 눈웃음을 치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카리온의 소녀상은 딱 15만 골드에 낙찰받았어요. 어휴, 눈치 싸움 엄청 했어요. 제 돈 아니라지만 10만 단위 응찰을 하려니까 엄청 떨렸어요! 물건은 경매장에 그대로 맡겨놨으니 나중에 제이든 님이 찾아오시면 돼요.”

“잘했어요. 다른 거 낙찰받으신 건 없어요?”

“있어요. 도록 볼 때부터 맘에 들었는데 실물 보니까 더 좋아서 응찰한 거!”

이노시카는 도록을 펴서 제이든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운 좋게 낙찰받았어요!”

“이노시카! 사랑해요!”

제이든이 이노시카를 와락 껴안자 그렉이 질겁을 하면서 그를 밀어내었다.

“미쳤나? 제이든, 왜 이래?”

이노시카가 펴든 영상 도록에는 다이카의 ‘해변의 기수’가 떠 있었다.

#작가의 말

작중 ‘해변의 기수’는 내용은 다르지만 폴 고갱의 ‘해변의 기수들’에 대한 오마쥬입니다.

고갱의 다른 그림들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죠. 그는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릴 때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저작권 문제로 그림 사진은 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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