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9화
8. 토끼발(3)
“이노시카 양, 잘 숙지하셨지요? 15만 전후로 낙찰받으시면 되는데 상황 보시고 17만까지는 따라가셔도 됩니다. 17만을 넘어가면 포기하시고요.”
“예. 걱정 마세요.”
이노시카는 금발 머리가 붕붕 날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늘색 눈에 힘을 주었다.
경매 두 번째 날, 올리버 로렌스가 부탁한 카리온의 소녀상이 나오는 날이다. 원래는 제이든이 직접 낙찰받아야 하지만 오늘 제이든은 경매에 빠지고 이노시카에게 대신 낙찰을 맡기기로 했다.
경매 첫날은 비교적 저렴하고 소소한 물건들이 나오는 날이라 이름 있는 수집가들이나 관련 계통 종사자들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부터는 다를 것이고, 제이든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였다.
그가 응찰하면 덩달아 부채를 드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 가격이 터무니없이 오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전날 경매에 함께 참여해 보니 이노시카가 골동품 보는 눈이 좋은 것 이상으로 경매에도 감각이 있어 보여서 믿고 맡겨볼 만했다.
오늘 나오는 경매 물건 중에는 제이든이 눈여겨봐 둔 것도 두어 점 있긴 했으나, 오늘 따로 할 일이 생겼기 때문에 아깝지만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경호원 역으로 붙은 그렉과 함께 경매장으로 떠나는 이노시카를 배웅하고 돌아와 방문을 열었다.
엎드려 있는 아실리를 깡충깡충 뛰어넘으며 놀고 있던 토끼가 제이든을 보자마자 얼음처럼 딱 멈춰 서서 눈만 깜박거렸다.
“뭘 또 그렇게 놀라? 자, 이것 좀 먹어보렴.”
전날 이노시카가 사다 준 알팔파 건초를 그릇에 담아 내밀었지만 토끼는 눈만 깜박일 뿐 입을 대지 않았다.
“어제는 먹었다면서 오늘은 왜 안 먹어? 특별히 부드러운 걸로 사 왔다고 했는데.”
전날 아실리랑 둘이 있을 때 알팔파를 잘 먹었다는 걸 보면 젖은 뗀 거 같고, 지금도 입을 오물거리는 걸 보면 먹고 싶긴 한 모양인데.
제이든과 아기 토끼가 건초 그릇을 중간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밀당을 하는 걸 보고 아실리가 끄응 몸을 일으켰다.
아실리가 먼저 건초 두어 줄기를 입에 넣고 씹어 보이자 토끼가 기쁜 듯이 “포잇” 하고 울더니 옴뇸뇸 알팔파를 먹기 시작했다.
건초 줄기가 돌돌돌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아삭아삭 사라지는 게 마치 종이 파쇄기에 종이가 말려 들어가는 것 같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먹이를 먹는 모습과는 전혀 달라서 또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실리가 씹고 있던 건초 줄기를 등 뒤에 살그머니 뱉으려다가 아기 토끼의 눈치를 보고는 그냥 꿀꺽 삼켰다.
“맛이 없어?”
-내 입엔 안 맞아.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물을 마시는 아실리를 보며 제이든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리싹이나 밀싹은 잘 먹잖아?”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육식 동물이지만 보리나 밀, 귀리 등의 싹도 잘 먹는다.
지구에서는 캣그라스라고 해서 고양이용 풀을 따로 팔고 있고 아실리는 특히 일반 고양이와는 식성이 달라서 채소나 과일도 잘 먹었다.
-응, 근데 알팔파는 내 취향이 아니네.
미식가 고양이는 입이 쓴지 혀를 날름거리면서 계속 입맛을 다셨다.
아기 토끼 안심시킨다고 기미상궁 노릇을 한 아실리가 안쓰러워진 제이든은 탁자 위에 놓인 봉지에서 사과 한 알을 꺼냈다.
“입가심하게 사과 하나 나눠 먹자.”
반으로 자른 사과를 깎기 시작하자 갑자기 “포잇!” 소리가 났다.
아기 토끼가 알팔파를 입에 문 채 뒷발로 일어서서 제이든의 손을, 아니 사과를 보고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하고 코가 발름발름하는 게 사과 향에 몹시 끌리는 모양이었다.
“기분 좋을 땐 엄청 귀여운 소릴 내네. 꼬마 사과 먹고 싶구나? 근데 아직 어린데 사과 줘도 될까?”
제이든은 사과를 먼저 한 조각 작게 잘라서 기미상궁에게, 아니 기미고양이에게 먼저 주었다. 사과를 좋아하는 아실리가 냉큼 받아서 한 입 아삭 깨무니까 사과 향이 더 강하게 풍겨 나왔다.
아기 토끼의 마스카라를 칠한 듯한 검정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반짝거리고 코가 격렬하게 발름거렸다.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자, 요기 있다. 포잇 하면서 와야지?”
제이든이 얇게 썬 사과 조각을 손에 들고 토끼를 부르자 토끼는 어쩔 줄 모르고 제이든과 아실리를 보면서 망설였다.
“안 먹어? 그럼 내가 먹는다.”
제이든이 손에 들고 있던 사과 조각을 입에 쏙 넣어 버리자 토끼는 순간 나라 잃은 표정이 되었다.
“우와, 사과 진짜 달다!”
제이든이 과장되게 감탄하면서 사과를 꼴깍 삼키자 토끼는 일어나 앉은 자세로 뒷발을 탕 굴렀다. 인상을 쓰는 표정이 눈썹이 있다면 가운데로 모여 역 팔자를 그렸을 법한 얼굴이다.
“아 화내는 거 너무 귀엽네!”
-애기 약 올리지 말고 얼른 줘.
아실리가 웃음을 참으면서 야옹거렸다.
“자, 포이, 사과 여기.”
제이든이 다시 사과 조각을 내밀자 토끼는 망설이다가 더 이상 참기 어려웠는지 제이든의 손에서 사과를 탁 뺏어 물고는 얼른 물러서서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는지 가늘게 자른 사과 조각이 순식간에 입안으로 돌돌돌 사라진다.
-포이라고 부를 거야?
“괜찮지 않아? 포잇 하고 우니까. 안 그래, 포이?”
“포잇!”
사과 조각 한 개를 다 먹어치운 아기 토끼가 포잇! 하고 대답하더니 하얀 앞발 두 개를 얌전히 앞으로 모아서 내밀었다.
제이든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면서 사과 조각 한 개를 더 주었다.
“아주 얇게 잘랐으니까 두 조각 정돈 먹어도 괜찮겠지. 나머지는 우리가 먹자.”
제이든과 아실리가 남은 사과를 나눠 먹고 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로스 감정사님, 라파엘입니다.”
문을 열자 라파엘이 들어와서 포이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말은 들었는데 진짜 포에니 토끼네요. 멸종 위기종이라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데.”
“피이?”
낯선 사람을 본 포이가 얼른 아실리의 등 뒤로 숨으면서 귀를 쫑긋거렸다.
“괜찮아, 나 무섭지 않단다.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사람을 많이 경계해서요. 못 만지게 할 텐데요.”
“싫어하면 만지지 않겠습니다.”
라파엘은 몸을 굽혀 포이와 눈을 맞추고는 무언의 대화라도 하듯 코와 귀를 쫑긋거렸다.
멀쩡하게 잘생긴 성인 남자인데, 웅크리고 앉은 라파엘의 모습이 일순 커다란 토끼처럼 보였다.
“피이이…….”
라파엘이 손을 내밀어 포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포이는 가냘프게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머리를 내주었다.
“그래, 그래, 고생 많았다. 이제 괜찮아. 좋은 분들 만나서 참 다행이다.”
어라? 제이든은 당황스러워서 입을 실룩였다.
포이가 저렇게 쉬운 토끼였나? 내가 발견해서 내 방에 모시고 먹을 것도 바치고 잠자리도 만들어주고 한번 만져보려고 온갖 애교를 떨어도 손을 못 대게 하더니 라파엘에겐 저렇게 쉽게 손을 허락하다니!
포이는 라파엘의 손안에서 울먹울먹하면서 호소하듯 울더니 한참 만에야 아실리의 품으로 돌아갔다.
“포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정사님이 구해주지 않으셨으면 끔찍한 꼴을 당했을 거예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제가 토끼 이름을 말했던가요?”
라파엘은 포이 쪽으로 귀를 기웃하면서 웃었다.
“아뇨. 포이가 말해줬어요.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데요.”
* * *
라파엘의 방에는 미누엘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나왔습니다.”
“어라, 데메스 양?”
“레노아라고 불러주세요.”
전날 헤어졌던 레노아 데메스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법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문화재 관리국 마법유물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라파엘과는 전에도 같이 일한 적이 있어요. 문화재 관리국에서 마침 제가 글로비스에 있으니 합류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 번이라도 얼굴을 봤다고 안면 있는 사람이 나오니 반가웠다.
“어제 미누엘이 좋은 물건 찾는 초짜 수집가인 척 델리움의 골동품상 네 군데, 글로비스 골동품상 다섯 군데를 돌았는데요.”
그 후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이미 이름과 헤카디아의 너울을 위탁한 경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입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말을 잘하더라고요. 진짜 좋은 물건은 경매장이 아니라 따로 중개상을 통하거나 밤의 경매에서 볼 수 있다면서. 헤카디아의 너울도 경매에 위탁하지 않고 자기들 같은 중개상을 통했으면 개인 수집가에게 훨씬 더 좋은 가격에 넘길 수 있는데 아쉽게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흐음.”
미누엘의 말을 들으며 제이든과 레노아는 쌍둥이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딱 맞는 말은 아니지만 또 아주 그른 말은 아니었다. 경매장에는 장물이나 밀수품 등은 내놓을 수 없다.
당연히 그중 아주 값진 물건이 있을 수 있고, 수집가들 중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런 물건들을 비싼 값에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물이나 밀수품이 아니더라도 골동품을 판매하려는 소장가나 중개상 중에 공개 경매로는 제값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밤의 경매나 개인 중개상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고.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경매장에 가서 위탁 취소하고 헤카디아의 너울 찾아다가 그쪽에 판매 맡기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미누엘은 머리를 긁으면서 웃었다.
“제가 홀랑 넘어갔다 싶은지 밤의 경매에 참여해 볼 생각 있으면 모레 일요일 밤에 광장 서쪽 모퉁이에 나와 있으면 자기들이 접촉하겠다고 했어요. 감정사를 동반하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된다고 했고.”
“미누엘이 물건 볼 줄 모르는 건 다들 아니까요. 혼자 가겠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죠.”
“아 형!”
미누엘이 아니어도 수집가가 감정사를 동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두 푼 하는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아닌데.
“일요일 밤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고, 미누엘이 다닌 골동품상 중 미심쩍은 곳을 세 군데 정도 골라놓았으니 오늘 제이든 님이 같이 한번 가 보시죠. 레노아와 저는 다른 쪽을 좀 파 보겠습니다.”
준비를 하고 나서려니 뭔가 허전하다. 제이든은 언제나 아실리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아실리 없이 중요한 일을 보러 나가는 게 낯설었다. 아실리도 마찬가지인지 잔소리가 늘어졌다.
-밤의 경매와 관련이 있는 골동품상은 흑마법에 엮여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감정 마법은 에너지 소모가 크니까 되도록 적게 쓰고, 다과 내주는 거 함부로 먹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누가 보면 고양이가 아니라 엄마인 줄 알겠다. 너야말로 포이 잘 지키고 있어.”
포이를 찾던 자들이 아직 이 도시에 있을지 모르는데 숙소에 아실리와 포이만 남기고 나가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걱정 마, 포이 지키는 정도는 할 수 있어.
“넌 공격 마법은 못 쓰잖아.”
아실리는 환영 마법 등 몇 가지 마법을 쓸 수 있었지만 그중 공격성 마법은 없었다.
-괜찮아, 경험이란 게 있잖아. 포이는 내가 잘 돌볼 테니 제이든이나 조심하고 일 잘 보고 와.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고 제이든은 문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으려다가 아실리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앞발을 흔들고 있는 고양이의 옆에서 아기 토끼가 자기도 조막만 한 앞발을 들어 흔들다가 제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아실리의 등 뒤로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