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화
8. 토끼발(1)
마을의 젊은이들이 축제 준비의 마무리를 하면서 들뜬 분위기가 가득한 전야제.
“필레나, 여기 한 번만 더 타 볼래? 균형이 잘 맞는지 좀 보자.”
축제 행렬의 맨 앞에서 행진을 이끌 꽃배는 여러 가지 꽃과 소품들로 장식된다.
조각으로 유명한 리카노스 섬이니만큼 자그마한 조각상 여러 개를 뱃전에 둘러 세우고 그 주위를 꽃으로 장식하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꽃배에 탈 여름의 여신은 뱃머리에 세울 소품을 선택할 수 있다.
재작년의 여신처럼 귀여워하는 새끼 양을 데리고 탄 특이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아하는 조각상을 선택한다. 인어나 용처럼 물과 관련된 조각이 인기가 많았다.
필레나는 구입 후 창가에 두고 매일 어루만지며 정을 붙였던 소녀상을 선택했다. 크기가 좀 작긴 했으나 뱃머리에 올려놓고 꽃으로 장식하니 무척 사랑스럽게 보였다.
“영차!”
꽃배는 마차 위에 설치한 지지대 위에 올려놓았기에 상당히 높았지만 필레나는 배에 걸쳐 놓은 사다리를 거뜬히 타고 올라갔다.
“이야, 씩씩한 아가씨네, 부축도 안 받고 저렇게 높은 배를 잘도 올라가네.”
밑에서 사다리를 잡아주던 데이나의 약혼자, 밀로스와 주변 사람들이 감탄했다.
“필레나는 남자애들보다도 나무를 더 잘 타는걸요. 지금이야 제법 아가씨인 척하고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독수리 둥지를 보겠다고 나무를 타다가 옷을 다 찢어먹어서 엉덩이가 나올 뻔…….”
“야! 아키온!”
소녀는 자신의 흑역사를 떠들어 대는 소꿉친구에게 소리를 지르며 높은 배 위에서 주먹을 흔들었다.
“저것 봐요. 저런 말괄량이가 무슨 여름의 여신이야!”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 속에서 필레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지? 어디선가 기분 나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 그 소란 속에서 어디선가 불길한 삐걱거림이 들려온 것 같았는데.
“필레나, 이제 그만 내려와. 오른쪽이 조금 비어 보이니 그쪽에 내일 조각상을 두어 개 더 놓으면 되겠다.”
“예.”
그녀가 대답하고 사다리로 건너가려는 순간 몸이 쭉 미끄러졌다.
“필레나!”
아키온이 부르짖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 돌고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으로 좌르륵 지나가면서 필레나는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누군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얼굴이 스쳐 간 것 같은데, 누구지?
* * *
“큰일 날 뻔했어, 필레나.”
아마리스가 필레나의 손을 잡은 채 침대 옆에 앉아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이만하기 다행이야. 다들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뱃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필레나는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고 했다.
“이틀이나 의식을 찾지 못해서 못 깨어나는 거 아닌가 했단 말야.”
“축제는?”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필레나의 목에서 겨우 새어 나왔다.
“네가 다쳐서 다들 놀라고 흥이 식긴 했지만 그래도 축제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여신은?”
“데이나 언니가 했어.”
아마리스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내년에도 축제는 있잖아.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하지만 여름의 여신은 리카노스의 처녀들에게 일생에 한 번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영광인데. 더구나 이렇게 큰 사고가 있었으니 필레나가 여름의 여신이 될 기회는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거였다.
필레나는 눈물이 나는 걸 보이기 싫어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온몸에 타박상이 심한 건 당연했지만 의사는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혀를 찼다.
“발목 하나만 부러지고 끝난 게 천행입니다. 부목 대어 드렸으니까 치유사가 오면 힐링 잘 받으시고요. 목은 좀 어떻습니까? 옆으로 돌릴 수는 있으세요? 목에도 고정 장치를 해드리는 게 좋겠군요. 약 빼먹지 말고 드세요.”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목발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필레나는 창가에 놓여 있는 소녀상을 보았다.
그녀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소녀상도 기울어진 뱃전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누군가 집에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소녀상도 몇 군데나 금이 가 있었다. 그런데 왜 색이 더 어두워진 것 같지? 흰색에 가까운 연한 회색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짙은 회색이 되어 있었다.
흙이 묻어 그런가 하고 소맷자락으로 닦아 보았지만 소녀상의 빛깔은 어두워진 채였다.
“필레나. 좀 괜찮아?”
“아키온.”
창틀에 드리워진 발을 헤치고 소년이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필레나가 들고 있는 소녀상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리스가 걱정하던데, 그 소녀상 진짜 재수 없는 거 아냐? 그거 때문에 죽을 뻔한 건지도 몰라. 야, 그거 버리든지 반품하든지 해. 내가 더 예쁜 걸로 사 줄게.”
필레나는 어두운 얼굴로 소녀상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그런 걸까? 이 소녀상이 불운을 불러오는 물건이라 내가 평생 한 번 있을지 모르는 여름의 여신 자리를 놓치고 축제에도 참여하지 못한 걸까?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는 내가 배에서 떨어져 이렇게 심하게 다치고?
“이리 줘, 내가 버리고 올게.”
아키온이 필레나의 손에서 소녀상을 빼앗았다.
“아니야, 버리지 마.”
필레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소녀상이 애절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냥, 그냥, 가게에 돌려줄래.”
“알았어. 내가 갖다주고 올게.”
“아키온, 그냥 내가 갖고…….”
행여 필레나가 붙잡을세라 소녀상을 손에 쥔 아키온이 재빨리 사라지는 걸 보면서 필레나는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상실감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 * *
“4만 2천, 4만 2천, 더 없습니까?”
경매사의 목소리가 들리며 제이든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부채를 들어 올리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옆에 있는 이노시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기나긴 꿈을 꾸다니.
경매사는 제이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든의 뒤쪽에서 부채를 들어 올리던 검은 머리 여자도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든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채를 무릎에 내려놓으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 경매사가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잡고 있던 창대를 바닥에 두드렸다.
“끝났습니다. 117번 고객께 4만 2천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날을 세우지 않은 창대 끝에 묶인 푸른 리본이 팔락이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지구에서도 고대 로마 시절의 경매에서는 경매사가 창을 바닥에 내리찍어 낙찰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계에서도 창을 경매봉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첫날 경매에서는 소녀상 외에 제이든의 눈길을 끄는 게 없었다. 환각을 보고 난 후유증이 꽤 심해서 다른 물건에 눈을 돌릴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고.
경매가 끝난 뒤 이노시카가 경매사와 이야기를 나눌 게 있다고 남았기에 먼저 경매장 밖으로 나오니 소녀상을 낙찰받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제이든을 힐끗 보더니 움찔움찔하는 것이 뭔가 말을 걸까 말까 하는 분위기라 제이든이 먼저 고개를 까딱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좋은 물건 낙찰받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리카노스 분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때 로시에르 하논이 경매장 안에서 나와 그들 옆으로 다가왔다. 왠지 불쾌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레노아 양.”
“안녕하세요. 하논 감정사님.”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로시에르는 제이든을 향해 턱짓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 사람이 그 소녀상을 낙찰받으라고 권하던가요?”
“예? 아닙니다. 제가 원래 염두에 두었던 물건이었어요.”
“그건 불운을 불러오는 어둠의 소녀상인데 알고도 낙찰받으신 건가요?”
여자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하기에 제이든이 끼어들었다.
“꼭 어둠의 소녀상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아가씨는 소녀상이 선조의 유품이라서 낙찰받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레노아 양이라고 불린 여자가 눈꼬리가 긴 눈을 크게 뜨면서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제이든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야 환각에서 본 필레나라는 소녀가 지금 이 레노아라는 여자와 꼭 닮았기 때문이지.
“당신은 낙찰받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값만 올린 거 아닙니까?”
로시에르가 제이든에게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입니까? 저는 정말로 낙찰받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이 아가씨가 저보다 소녀상을 더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아 마음을 접었을 뿐입니다.”
소녀상도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말이지.
로시에르는 잠시 낯을 찌푸린 채 서 있다가 말했다.
“레노아 양, 나중에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하면 꼭 저한테 연락 주십시오. 만약에 소녀상에 흑마법이라도 걸려 있거나 하면 정화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단발머리 여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
“하논 감정사님, 경매란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위작을 사든 흑마법이 걸린 물건을 사든 위험성도 응찰자가 감안하고 낙찰받는 거잖아요. 부득이한 경우 철회비를 내고 철회할 수도 있는 거고요.”
채찍처럼 쌀쌀맞은 말투에 로시에르의 얼굴이 붉어지자 여자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튼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두 사람에게 꾸벅해 보이고 돌아서는 여자에게 제이든이 슬쩍 말했다.
“그 소녀상, 잘 간직하세요. 저는 정말 낙찰받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엔 불운의 물건이 아니라 반대로 액운을 막아주는 물건이거든요.”
그는 아직 조금 뻐근한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모르는 새 저도 한 번 신세를 진 거 같고요.”
레노아는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속삭이면서 제이든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도 가끔, 꿈을 꾸거든요.”
“…….”
제이든이 멍해 있는 동안 여자는 돌아서면서 말했다.
“혹시 소녀상 건으로 연락 주실 일 있으시면 마탑의 레노아 데메스에게 비둘기를 보내주세요.”
“마법사이십니까?”
여자는 웃었다.
“아직 견습입니다.”
두 사람은 기분이 상한 게 역력한 로시에르 하논을 뒤에 두고 목례를 한 뒤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 * *
-흐응, 액운을 막아주는 물건이라.
아기 토끼의 귀를 핥아주느라 여념이 없던 아실리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
“응, 내 생각엔 액운을 막아준다기보다 액운을 대신 받아주는 물건이야.”
-으응. 옛날에 세시온이 읽고 있던 책에서 비슷한 얘길 본 거 같아.
아실리는 아기 토끼의 귀를 다 핥고 머리와 뒷덜미로 넘어가면서 야옹 소리를 냈다.
아기 토끼는 기분이 좋은 듯 골골거렸다.
-레안드로는 스승인 카리온의 딸을 좋아했다고 그랬지. 아마 그 소녀상에 그의 마음이 담겼던가 보네. 그 딸은 병이 많았고 결국 일찍 죽었다던데.
“소녀상이 그 딸의 액운을 그나마 완화시켜 주는 걸 사람들이 불운의 상징이네, 흑마법이 씌었네 해서 레안드로가 누명을 썼던 거 같아.”
-야아옹.
“내가 환각으로 본 여자애도 마찬가지였어. 소녀상이 그 애 생명을 구한 건데. 단언하는데 그 애가 추락사할 뻔한 건 불운 때문이 아냐. 누군가 뱃전에 기름칠을 한 거야.”
필레나는 보지 못했겠지만 제이든은 확실히 보았다. 데이나의 약혼자라던 남자가 웃는 것을.
-다행이야. 소녀상이 오랜 방황 끝에 진가를 알아보고 아껴줄 만한 사람 품에 들어간 것 같네.
아실리는 아기 토끼를 살짝 뒤집었다. 바닥에 누운 동글동글한 아기 토끼는 짧은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좋다고 꺄륵거렸다.
토끼도 소리를 내는구나. 토끼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본 제이든은 신기하게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아실리가 토끼의 짧은 앞발을 핥아주면서 슬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란 참 약한 동물이야. 걸핏하면 뭔가 불운을 갖고 오네, 행운을 가져다주네 하면서 뭔가에 의존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니까. 우리 고양이는 절대 그런 일이 없는데.
니예 니예 그러시겠죠. 제이든은 독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고양이가 아기 토끼를 알뜰살뜰 핥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애만 해도 그래. 포에니 토끼로 태어난 게 무슨 죄야? 괜히 행운을 가져온다고 사람들한테 쫓기기나 하고 비싼 값에 이리저리 팔려 다니기나 하고.
“진짜 행운을 가져오긴 해?”
-영물이니까,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을 도울 수는 있지. 하지만 억지로 잡아다가 부적 취급을 하는 사람들한테 행운을 줄 리가 있어? 무엇보다도!
아실리는 토끼의 앞발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놈들이 원하는 건 포에니 토끼의 발이거든. 산 채로 자른 토끼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