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화
7. 회색의 소녀(4)
“뭐지?”
제이든이 자세히 보려고 몸을 굽히자 솜뭉치는 바르르 몸을 떨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자 흰 밤송이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귀와 눈을 보면 토끼 같은데 토끼가 이렇게 동그란 동물이던가? 토끼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서울에서 본 토끼는 이렇게 동그랗지 않았는데. 제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사람들이 찾아다닌다는 그 동물 아닐까? 가까이서 보니 많이 지쳐 보이고 흰 털도 후줄근했다.
“피이~”
제이든이 손을 내밀자 토끼는 경계하듯 뾰족한 소리를 내면서 발딱 일어서서 조그만 앞발 두 개를 쳐들었다.
“그걸로 나 때리려고?”
위협하듯 쳐든 앞발이 너무 작아서 제이든은 그만 웃음이 나왔다.
“겁내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 방에 가서 따뜻하게 해주고 먹을 것도 줄게. 그리고 네 주인도 찾아줄게.”
“키이잇!”
토끼는 폴짝 뛰면서 몸을 바르르 떨더니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곳을 찾았다.
“왜 그래? 왜 그렇게 놀라?”
제이든이 덩달아 깜짝 놀라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데 복도에서 문이 열렸다.
“감정사님? 거기서 뭐 하세요?”
이노시카와 그렉 톰슨이 머리를 내밀고 그 아래에서 아실리도 머리를 쏙 내밀었다. 소녀상을 보러 갈 때 아실리 혼자 방에 두면 심심할까 봐 이노시카에게 맡겼었다.
“여기 구석에서 토끼, 아닐지도 모르지만 토끼 닮은 동물을 발견했는데요. 사람들이 찾아다니던 그 동물 아닐까요?”
그렉이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보더니 감탄했다.
“허! 이거 포에니 토끼 아닌가! 아주 어린 새끼네.”
“정말요?”
이노시카와 아실리도 가까이 왔다. 사람들의 시선 가운데 놓인 토끼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떨면서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키킷거렸다.
“사람을 굉장히 무서워하네요.”
그때 아실리가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부드럽게 토끼에게 코를 비비며 골골 목을 울렸다.
파들파들 떨던 토끼는 아실리가 얼굴을 비벼 주자 세웠던 털을 조금씩 가라앉히더니 가냘프게 피이피이 울면서 아실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신기하네요, 아실리가 달래주는 것 같아요.”
잠시 후 아실리는 아기 고양이를 물어 올리듯 아기 토끼의 뒷덜미를 물고 들어 올리더니 방으로 향했다.
제이든이 얼른 달려가서 자기 방 문을 열자 아실리가 아기 토끼를 물고 안으로 들어가고 사람들도 줄줄이 따라 들어갔다.
침대 옆 방석에 자리 잡은 아실리가 아기 고양이를 핥듯이 아기 토끼를 핥아준다.
“포에니 토끼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저도 처음 봐요.”
“고양이가 토끼를 그루밍해 주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고.”
“포에니 토끼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다닌 것도 이해가 가네요.”
제이든은 포에니 토끼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보통 토끼랑 다른가요?”
“생김새도 다르고, 수도 적지. 델로스 산 깊은 곳에 살고 있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그렉이 대답했다.
“행운을 불러오는 토끼라고 하거든. 행운의 상징이라고. 그래서 일반 토끼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비싸.”
“아아.”
제이든은 납득했다. 삼색 고양이 수컷 같은 건가 보네. 희귀하기 때문에 행운의 상징이 된 동물.
“그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기르던 토끼일까요? 연락해서 돌려줘야 하려나?”
“키이잇!”
토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르더니 아실리의 품으로 파고들며 바들바들 떨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아실리가 아기 토끼를 감싸 안으면서 제이든에게 단호하게 야옹거렸다.
-보내면 안 돼.
“음, 일단 아기 토끼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조용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좋겠어요. 아실리가 잘 돌보고 있으니 우린 잠시 나가 있죠. 토끼가 먹을 만한 게 뭐 있더라.”
제이든은 아실리와 아기 토끼를 남겨두고 그렉과 이노시카와 함께 방을 나왔다. 이노시카는 토끼가 먹을 만한 걸 사 온다고 밖으로 나갔고 제이든은 그렉의 방으로 갔다.
“아 그러고 보니 미누엘은 벌써 자나요?”
“아니, 미누엘은 형이 온다고 해서 마중 나갔어.”
다리를 다쳐서 오는 길에 여관에 남았다던 미누엘의 형이 회복되어 글로비스로 온다는 전갈이 왔다고 했다.
“잘됐네요. 형 때문에 걱정하더니.”
“음.”
그렉은 아까부터 뭔가 찜찜한 얼굴이더니 제이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토끼 말이야. 주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연락하지 말고 좀 기다려 보게. 내가 알아볼 게 있어.”
* * *
일주일간의 소네트 경매 중 사전 전시 사흘이 끝나면 본 경매가 사흘간 진행되고 마지막 하루는 경매품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사정상 철회비를 내고 철회를 원하는 등 관련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할애된다.
미누엘과 그렉은 골동품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으므로 다른 일을 보기로 했고, 첫날 경매는 제이든과 이노시카만 참여했다. 아실리는 토끼와 함께 숙소에 남았다.
사전에 받은 도록에 따르면 카리온의 소녀상은 이틀째, 헤카디아의 너울은 사흘째에 나오기로 되어 있었고 첫날은 비교적 소소한 물건들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게 도록이라니 신기하네.”
제이든은 아침에 받은 부채 모양의 영상 도록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경매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카이에른과 셀레스테에서도 영상 도록을 받았지만 그쪽은 경매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도록이 완성된다.
소네트처럼 직전까지 위탁 물품을 받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도록도 훨씬 정교한데, 소네트의 영상 도록은 그처럼 정교하진 않지만 소탈하고 젊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노시카는 경험을 쌓기 위해, 제이든은 회색 소녀상이 첫날 나오기 때문에 일찌감치 경매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혹시 낙찰받고 싶은 물건 있으면 말씀하세요. 봐드릴 테니까.”
“제이든 님이 계셔서 정말 든든해요.”
제이든은 이노시카와 함께 경매를 보면서 새삼 이노시카가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상당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골동품상의 저력은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오전에는 저렴한 물품들의 경매로 시작해서 점심 후 오후부터 점점 더 값나가는 골동품들이 나왔다.
이노시카는 눈여겨보았던 골동품 서랍장을 좋은 값에 낙찰받아 싱글벙글했고, 드디어 회색 소녀상 차례가 되었다.
경매사의 또렷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이번 작품은 8세기에 제작된 석조 소녀상입니다. 에테노른력 700년부터 730년 사이의 작품으로 조각가는 명장 카리온의 수제자였던 레안드로로 추정됩니다. 당시 많이 사용된 리카노스 산 대리석이나 흰 돌이 아닌 회색 석재가 사용된 점이 이채롭고요. 전체 형태는 소박하나 옷자락이나 손가락처럼 사소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솜씨가 돋보입니다.”
경매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특이점으로는 3급 감정사 로시에르 하논 님이 덧붙인 소견이 있습니다. 레안드로가 불운을 불러온다는 어둠의 소녀상을 조각한 것으로 인해 카리온 문하에서 파문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소녀상이 그 어둠의 소녀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견이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작품번호 49번, 1만 5천 골드에서 시작하며 호가 1천 골드씩 올라가겠습니다. 시작합니다.”
제이든은 부채-지구에서는 응찰자가 드는 팻말을 패들이라고 하는데 카이엔에선 부채 모양으로 된 접을 수 있는 팻말을 펴드는 것으로 응찰 표시를 한다-를 들 준비를 하며 장내를 재빨리 훑었다.
레안드로의 작품은 상태에 따라 대체로 3~5만 골드에서 가격 형성이 된다.
이번 소녀상은 표면에 상처가 많은 데다 로시에르 하논의 감정이 영향을 미쳐서 낙찰가가 높지 않을 것 같았다.
어둠의 소녀상이라는 말이 나왔기에 응찰자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흑마법 관련 물품 수집가도 있기 때문에 또 모를 일이었다.
“1만 6천, 1만 7천.”
아니나 다를까 제이든보다도 더 빨리 부채를 든 사람들이 있었다. 제이든도 부채를 들어 올렸다. 자신에게 첫 환각을 보여준 물건이라 낙찰받아 놓고 자세히 살피고 싶었다.
“2만, 호가 2천으로 올리겠습니다. 2만 2천, 2만 4천.”
누군가 제이든의 뒤쪽에서 계속 부채를 들어 올리고 있어서 제이든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때 그 여자분이네.’
루이네 여관에서 보았던 검정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오늘은 흰옷에 파란 어깨걸이가 검은 머리와 대비되어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부채를 꼭 쥐고 소녀상에 눈길을 박고 있는 모습이 반드시 낙찰받고 싶은 갈망이 느껴졌다.
또 한 사람 부채를 들고 있는 남자는 제이든 쪽을 힐끗힐끗 보면서 부채를 올리는 게 특별히 소녀상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제이든을 아는 모양이었다.
제이든 로스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좋은 물건이려니 하는 눈치였다.
“3만, 3만 2천, 3만 4천…… 3만 6천, 3만 8천.”
경매가 3만 8천이 넘어가자 부채를 들었다 놨다 하던 남자가 손을 놓았다.
‘사실은 저게 맞지. 물건의 가치로만 보면 3만에서 3만 5천 정도가 적정가니까.’
제이든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 번 더 부채를 들었다.
“4만, 4만 나왔습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멈췄기에 제이든은 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검정 단발머리 여자는 입을 꼭 다문 채 부채를 들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한 번 더 부채를 들었다.
“4만 2천.”
제이든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부채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 눈앞이 핑 돌면서 다시 환각이 훅 들어왔다.
* * *
에테노른력 737년, 리카노스 섬의 여름은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금빛 햇살과 청록빛 바다, 흰 돌로 벽을 쌓고 파란 지붕을 인 집들이 줄지어 선 해안가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거리 중심부 쪽에는 흰 대리석으로 지은 우아한 건물들이 서 있었다.
소녀 필레나는 친구들과 함께 장신구 가게에 있었다. 축제가 머지않았기에 소녀들은 재잘거리며 귀고리, 목걸이, 머리에 쓰는 베일이며 팔찌 등을 고르는 중이었다.
필레나가 독특한 문양의 옷감을 발견하고 만져보려는데 옷감들 뒤에 숨듯이 서 있는 조각상에 눈이 갔다.
팔뚝 정도 길이의 아담한 소녀상이었다.
비둘기의 속날개처럼 연한 회색을 띠는 돌로 깎았고 살짝 웅크리고 앉은 듯한 형태는 단순했지만 부드러운 표정이나 우아한 옷자락, 뭔가를 감싸듯 앞쪽으로 살짝 내민 팔과 손가락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서너 군데 금이 가고 흠집이 있었지만 돌인데도 왠지 맑고 투명한 느낌이 느껴졌다.
“저, 이것도 혹시 파는 건가요?”
필레나가 소녀들을 상대하고 있던 주인에게 묻자 주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이거 사시려고?”
필레나의 친구 아마리스가 그녀 옆으로 다가오더니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필레나, 이거 사지 마. 액운을 불러온다는 소문이 있어.”
“액운?”
“응. 넌 못 들었니? 나 이거 본 적 있어. 데이나 언니가 약혼자한테 선물로 받았던 거야. 그런데…….”
아마리스는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필레나에게 속삭였다.
“이거 받은 후 자꾸 재수 없는 일이 생겼대. 그래서 가게에 반품한 거래.”
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가씨들, 그런 건 다 미신이랍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 물건인데 그래요. 재수 없는 일이라는 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괜히 소녀상 때문이라 생각하니까 자꾸 덮어씌우게 되는 거라고요.”
주인은 필레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카리온 공방 출신 레안드로 씨 이름 들어 봤죠? 이게 그 레안드로 씨가 젊었을 때, 카리온 공방 수제자 시절에 만든 거라고요. 나중에 스승님이랑 사이가 틀어져서 독립해 나왔지만.”
“앗, 나 그 얘기 알아요. 카리온 님의 따님이랑 사랑의 도피를 했었다던데.”
아마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흠, 흠, 그거야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무튼 레안드로 씨가 그 따님을 위해 만들었던 게 이 소녀상이다, 그런 말씀입죠!”
필레나는 소녀상을 살짝 어루만져 보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돌로 조각한 소녀상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지만 왠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소녀상이 필레나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아가씨 이 소녀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네. 자, 이거 원래 크레마 은화 사십 냥은 충분히 받는 물건인데, 흠집도 나 있고 하니 삼십 냥에 가져가요.”
“필레나, 이거 정말 살 거야?”
필레나의 얼굴에서 이미 홀딱 빠진 표정을 본 아마리스는 한숨을 쉬고는 팔을 걷고 나섰다.
“한 번 팔았다 돌아온 물건이잖아요. 소문도 안 좋고. 이십 냥에 주세요”
“아이고, 아마리스 양, 아무리 대상단 따님이지만 반값으로 후려치시다니요. 석 냥 더 깎아드리죠. 그게 최선입니다.”
아마리스의 화려한 흥정 끝에 필레나는 결국 이십삼 냥에 소녀상을 샀다. 집에 가서 비둘기색으로 칠이 된 창턱에 소녀상을 올려놓으니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꼭 맞게 어울렸다.
소녀상을 산 이후 재수가 없기는커녕 모든 일이 더 잘 풀렸다. 아버지의 장사도 어머니의 건강도 더 좋아졌고 필레나는 축제 때 앞에서 배 모양의 마차를 타고 꽃을 뿌리는 여름의 여신으로 뽑히기까지 했다.
해마다 여름의 여신으로 뽑히는 아가씨들을 부러워했는데, 필레나는 가슴이 터질 만큼 기뻤다.
그랬다. 축제를 하루 남긴 전야제의 밤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