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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5화 (1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화

7. 회색의 소녀(3)

“아실리! 여기다!”

“냥!”

그렉 톰슨의 굵은 음성이 사람들 틈에서 들려왔고 아실리가 머리를 쏙 뽑아 올리면서 냥! 대답하고는 조르르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왜 아실리를 불러? 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제이든은 음식점 거리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헤치고 미누엘과 이노시카, 그렉이 앉아 있는 노천 테이블로 다가갔다.

소네트 경매 때문에 글로비스가 사람들로 미어터지겠네. 그래도 땅이 넓기 때문인지 지구에 비하면 테이블 간격이 널찍널찍해서 다니기가 편했다.

“감정사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미누엘이 제이든 몫으로 비워둔 자리를 손짓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여러 가지 먹거리가 풍성하게 올라와 있었다.

“감정사님 좀 늦으셔서 맛있어 보이는 걸로 먼저 좀 골라 봤어요.”

-크림 파이는?

아실리가 테이블 위를 살피려는 듯 고개를 위로 빼자 이노시카가 제이든 옆의 의자를 빼주었다.

“사람 많아서 위험하니까 바닥보다는 여기가 나을 거야. 아실리, 요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지?”

“냥!”

아실리는 의자에 폴짝 뛰어 올라가 앉아서 얌전히 발을 모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데 정말 사람 같은 고양이예요.”

이노시카는 작은 접시에 아실리가 먹을 만한 것을 덜어주었고 아실리는 우아한 자세로 맛을 보았다.

“저희는 오전에 다른 일을 보느라고 전시장 구경을 아직 못 했어요. 점심 먹고 나서 돌아볼 예정인데 감정사님은 벌써 보고 오셨나요?”

“예.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더군요. 내일 헤카디아의 너울이 전시되면 인기가 굉장할 겁니다.”

“헤에…….”

조용히 생선 요리의 맛을 보고 있던 미누엘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소년처럼 웃었다. 뭐, 아직 소년에 가까운 나이이긴 하지.

“다 감정사 형님 덕분이에요. 형님 아니었으면 보물을 손에 쥐고도 그냥 흘려보낼 뻔했는데.”

미누엘은 싹싹하게 눈웃음을 치면서 생선 요리를 제이든에게 담아주고 아실리에게도 조금 나눠 주었다. 저번부터 은근슬쩍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귀여우니까 봐 준다.

“중부 지방에선 생선 요리 잘하는 곳을 별로 못 봤는데 이건 꽤 괜찮네요. 한번 드셔 보세요.”

“미누엘 군 고향이 남부인가?”

그렉이 묻자 미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원래 남부 바닷가에 살았어요. 몇 년 전 이카루스로 이주했는데 이카루스는 남부에 속하긴 해도 거의 중부에 걸쳐져 있어서 바다랑은 멀잖아요. 이번에 헤카디아의 너울이 좋은 가격에 낙찰되면 식구들 모두 데리고 남부로 돌아갈 거예요.”

그는 남부 소년다운 구릿빛 얼굴에 흰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중부가 수도와 가까워서 요리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지만 생선은 역시 원산지에서 먹어야 제맛이죠. 나중에 남부 바닷가의 생선을 한번 맛보여드리고 싶어요!”

카이엔 대륙의 동부와 남부는 해안에 면해 있고 북부는 산악 지역, 서부는 들판이 많았다. 중부는 북부에 비해 완만한 산과 들판이 섞여 있고.

대륙전쟁이 끝나고 카이엔 제국으로 통일된 지도 삼백 년이 가깝지만, 원래 일곱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대륙이라 아직도 옛 왕국의 지역에 따라 지방색이 뚜렷하고 영주의 권한도 강한 편이었다.

한동안 점심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음식점 거리 한쪽에서부터 파도가 일듯이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밀물처럼 가까워졌다.

그렉이 벌떡 일어나서 이노시카를 제 뒤로 돌렸고 제이든은 아실리를 품에 안았다.

“뭐야? 저거?”

사람들을 헤치고 일직선으로 뭔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잡아주세요, 좀 잡아주세요.”

누군가 외치면서 그 뒤를 쫓고 있고.

하얀 털뭉치처럼 보이는 것이 달려오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중에 위쪽에서 뭔가 떨어진다.

“으으윽!”

노천 테이블이 뒤집어지면서 테이블 가운데 꽂혀 있던 파라솔 기둥이 제이든의 어깨를 강타했다. 그리고 달려오던 하얀 털뭉치가 넘어지는 제이든의 어깨를 콩 밟고 뛰어넘어 지나갔다.

“으윽!”

두 번 연속으로 받은 충격에 제이든은 신음을 토했다.

“뭐야? 저거?”

겨우 몸을 일으킨 제이든의 앞으로 이번엔 사람 몇 명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손에 그물이며 뜰채 같은 걸 들고 있었다.

“감정사님, 괜찮으세요?”

“아니, 이거 무슨 일이래, 어제는 나무에 머리 부딪치고 오늘은 어깨, 아휴.”

“아실리 내려놓고 팔 좀 이리 줘봐. 쇠기둥이 떨어졌는데 무사할 리가 있나.”

“예? 괜찮은 거 같은데요.”

제이든의 어깨를 더듬어 보던 그렉은 안심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묘한 얼굴이 되었다.

“저렇게 큰 쇠기둥에 정통으로 맞았는데 괜찮다고? 어깨뼈 박살 나지 않은 게 신기하네.”

“속이 빈 거라서 그럴까요? 저도 맞았을 때는 눈앞에 불이 번쩍하는 게 어깨 나간 줄 알았는데 좀 뻐근하고 욱신거리긴 해도 견딜 만해요.”

어깨를 문지르며 일어선 제이든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쪽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그거 뭐였어요? 어찌나 빠른지 자세히 못 봤는데.”

“동물 같던데, 누가 뭘 놓쳤나 봐요. 흰색에 검정 얼룩이 있는 것 같던데 강아지나 고양이인가, 저도 자세히 못 봤어요.”

이노시카가 걱정스럽게 그들이 사라진 쪽을 보았다. 아실리도 먼 곳을 보듯 눈을 좁힌 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을 정리한 후 미누엘과 이노시카, 그렉은 전시장을 보러 가고 제이든은 아실리와 함께 숙소에 가서 좀 쉬기로 했다. 쇠기둥에 강타당한 어깨보다 넘어지면서 부딪친 무릎이 더 아팠다.

“아이고, 이틀 연속 이게 무슨 일이야. 굿이라도 해야 하나.”

-굿이 뭐야?

“그런 게 있어. 아이고.”

-맨날 그런 게 있대.

“그나저나 아실리, 너도 아까 지나간 게 뭔지 못 봤니?”

-제이든이 내 얼굴을 가슴팍에 틀어박는 바람에 못 봤지. 안 그랬음 봤을 텐데.

“내 덕분에 너는 털끝 하나도 안 다쳤잖아. 사람들 막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랬는데. 그 기둥이 나 말고 너한테 떨어졌음 어쩔 뻔했어!”

-그래, 그래, 용맹한 제이든, 얼른 좀 누워.

어깨도 욱신거리고 아실리를 끌어안은 채 넘어졌을 때 근육에 무리가 갔는지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시큰거려서 제이든은 오후 내내 침대 신세를 졌다.

다음 날도 제이든은 숙소에 머물렀으나 전시를 보고 온 미누엘과 이노시카가 먹을 것을 사들고 와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었다.

“헤카디아의 너울 근처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정작 우리는 구경도 못 했어요. 인기가 최고예요.”

“제이든 형님이 감정해 주셨다고 해서 더 화제가 됐대요. 진짜 감사합니다.”

“뭐, 자네 복이지.”

그렉이 아실리에게 과자를 주면서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동물은 아직도 안 잡힌 모양이야.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다니던데.”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걸 어쩌다 잃어버렸을까요. 날 추워지기 전에 빨리 집 찾아가야 할 텐데.”

“강아지건 고양이건 전단지라도 좀 붙여보지. 누가 보고 연락해 주면 더 빨리 찾을 거 아냐.”

* * *

사전 전시 마지막 날인 경매 사흘째의 저녁, 관람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 제이든은 다시 삼 층 계단 옆의 소녀상을 찾았다.

지난번 본 환각이 이 소녀상과 관련이 있는지, 일시적인 환각인지 아니면 유물의 내력을 볼 수 있게 된 첫걸음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보기 드문 회색 돌, 색이 좀 특이하지만 재질은 아마 리카노스 산 석재, 다소 투박한 형태감에 비하면 의외로 섬세하고 세련된 솜씨, 제작 시기는 8세기, 명장 카리온의 스타일을 따라 조각한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의 솜씨라면 카리온의 제자 중 하나인…….

“누구의 작품 같습니까?”

제이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로시에르 하논이 뒤에 서 있었다.

“하논 공자.”

“지난번에도 이 소녀상을 보고 계시던데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보셨나요?”

“글쎄요.”

제이든은 말을 흐렸다.

“카리온의 제자 중 한 명이 조각한 듯한데 사실 크게 특별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왠지 저한테는 끌리는 게 있네요.”

로시에르는 잠시 제이든을 보고 있더니 소녀상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어둠에 끌리시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어둠이요?”

제이든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로시에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로스 감정사가 이 소녀상을 뚫어지게 보고 있길래 저도 호기심이 생겨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혹시 카리온의 파문당한 수제자 이야기를 아십니까?”

“레안드로 말씀이시군요.”

“역시 견문이 넓으십니다.”

로시에르가 싱긋이 웃었지만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게 왠지 비딱한 느낌이라 제이든도 예의 여우 웃음을 샐쭉 웃어주었다. 로시에르의 얼굴이 금방 굳는다. 이게 또 효과가 있지.

“레안드로가 어둠의 소녀상을 만들었다가 파문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아무래도 저 소녀상이 그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말입니까?”

제이든은 이번엔 정말 놀라서 소녀상을 다시 쳐다보았다. 제이든도 이 소녀상이 레안드로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둠의 소녀상이라면 불운을 불러오는 물건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제이든의 눈에 뭔가 어둠의 상징 같은 것이 보일 것이다.

이를테면 검은 안개라든지 탁한 기운이라든지, 하지만 회색 소녀상에서는 그런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흠, 모르셨군요. 제가 어제 온종일 기록을 뒤져 봤었는데 레안드로의 어둠의 소녀상이 마지막으로 기록에 남은 게 에테노른력 792년 여름에 케세론의 포목상이 소유하고 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예…….”

“이 회색 소녀상은 카이엔력 235년에 데메티안의 농부가 밭을 갈다가 파낸 것인데요. 출토 장소가 케세론과 멀지 않고, 무엇보다도 소유주를 찾아가 이번에 경매에 내놓은 이유를 물어보니 말을 안 하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사고를 일으키는 물건이라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제이든은 로시에르의 으쓱해하는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고는 싹싹하게 대답했다.

“짧은 시간에 조사를 잘하셨네요.”

“원래 레안드로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평범한 작품이라고 봤는데 로스 감정사가 눈여겨보던 것 때문에 조사를 좀 더 했지요. 물론 어둠의 소녀상이라는 건 현재 추정입니다만 후일 1급 감정사님께 확인을 받아볼 생각입니다.”

제이든은 빙그레 웃었다. 2급 감정사인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태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록에도 없는 그런 내력을 확인하려면 1급 감정사가 필요하긴 했다.

전 대륙에 세 명뿐인 데다 한 자리에 붙어 있는 일이 없는 양반들이라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이든은 머리를 까딱 숙여 보인 후 전시장을 나왔다.

숙소의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로시에르의 말과 소녀상을 생각했다. 불운이라……. 그런데, 그 소녀상의 몸에 원래 흠집이 많기는 했지만 어깨의 실금도 원래 있었던가? 색깔도 미묘하게 더 짙어 보이던데.

“어이쿠!”

제이든은 놀라서 껑충 뛰었다. 생각에 빠져 복도를 돌아 들어가다 모퉁이에 뭉쳐져 있는 하얀 덩어리를 밟을 뻔했던 것이다.

“아 깜짝이야, 이게 뭐지? 웬 솜덩어리가 여기 있어?”

성인 남자의 주먹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흰 솜덩어리가 모퉁이에 동그랗게 뭉쳐져 있었다.

이게 뭔가 하고 보는 동안 솜덩어리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까맣고 뾰족한 것이 하나둘, 솜덩어리 밖으로 삐져나오더니 깜빡! 하고 불이 켜지듯이 새까맣고 커다란 눈이 솜덩어리 중앙에서 생겨났다.

#작가의 말

사진의 모델묘(卯)는 몇 년 전 동네 공원에 버려져 있던 아기토끼입니다. 특이하게 생겼죠?

구조해서 우리 집 고양이들과 잠시 지내다가 지금은 좋은 집에 입양가 잘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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