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화
7. 회색의 소녀(2)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졌다.
부옇게 흐린 안개 속에서 뭔가 보일 듯 말 듯 사람의 형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가 지나가는 와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굉장히 고운데?”
“대리석이 아닌데도 빛깔이 정말 좋아.”
옅은 안개의 휘장 너머로 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개에 가려 있어 분명하지는 않지만 파란 지붕을 인 하얀 집들이 줄지어 서 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었다.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바다 위에 흰 돛을 단 배들이 떠다니고 있는 게 평화로웠다.
제이든의 시야 속에서 거리가 천천히 흘러갔다. 마치 그가 그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비켜 봐, 이건 내가 사지! 데이나도 좋아할 거야.”
아까 들었던 그 목소리가 제이든의 옆쪽에서 다시 들려왔다. 그가 돌아보자 거리 옆 상가들 중 한 집에서 두세 명의 남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사람이나 물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형태는 보였다.
설마 이 환각이 그건가? 1급 감정사 수준이 되면 물건의 내력을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내가 그 단계에 접어든 걸까?
제이든은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려고 그 가게 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자 풍경이 반대쪽으로 빨려들어 가듯 저절로 멀어졌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데. 제이든은 애가 타서 더 빨리 다가갔지만 풍경은 꼭 그만큼 더 빨리 멀어졌다.
“오, 이게 누군가?”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면서 순식간에 눈앞에서 환각이 사라졌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발을 내디딘 상태로 정신이 확 돌아왔다.
“로스 감정사 아닌가?”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사람이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중후한 분위기의 노신사였다.
제이든은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카시우스 백작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맞네. 로스 군. 자네가 소네트에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이거 반갑네.”
“지나는 길에 우연히 소네트 경매품 하나를 감정하게 되어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오호, 그 헤카디아의 너울 말이지? 그렇잖아도 어제부터 그 너울이 아주 화제라네.”
카시우스 백작은 한 걸음쯤 옆으로 비켜나면서 그의 뒤를 따라오던 사람들을 소개했다.
“처음 보지? 이 사람이 소네트 백작가의 당대 가주 클로드 소네트라네. 그 뒤는 로시에르 하논. 하논 남작가의 삼남인데 일찍부터 감정에 뜻을 둔 기재지.”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소네트 백작님. 하논 공자.”
소네트 백작은 제이든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이야. 듣기는 했는데 정말 젊은 분이시군.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반갑소. 카이에른과 셀레스테에는 갔었다면서 우리 소네트에는 오지 않아서 내심 섭섭했었다오. 이번 경매에 혹시 염두에 둔 물건이라도 있으신가?”
“일단 둘러보고 있습니다만 좋은 물건이 많네요. 소네트가 이렇게 훌륭한 경매인 걸 모르고 이제야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혹시 인연이 닿으면 저도 뭔가 낙찰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잘 부탁드립니다.”
소네트 백작이 머리를 끄덕이며 제이든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 뒤에 있던 서른쯤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제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집중력이 아주 강하신가 봅니다. 올라오다 보니 뭔가에 빠지셔서 우리가 올라오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으시던데?”
“예?”
“아, 백작님 소개대로 저는 로시에르 하논입니다. 3급 감정사고요. 요즘 명성이 자자한 제이든 로스 감정사가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비딱한 말투였지만 제이든은 싹싹하게 미소 지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알고말고요. 아카데미의 기린아, 카이엔의 세 거울 중 하나이신 로시에르 하논 공자를 모를 리가 있습니까.”
여기서 거울이라 함은 젊고 뛰어난 감정사를 말하는 것이다. 감정사의 필수품 중에는 돋보기가 있는데 옛날에는 돋보기를 볼록거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카이엔 대륙에선 감정사가 상당히 대우받는 직업이라서 로시에르 하논처럼 귀족가의 자녀가 직업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물론 가문을 이어야 하는 첫째나 둘째가 감정사가 되는 일은 거의 없고 로시에르처럼 삼남 또는 그 아래의 자녀인데 머리가 좋고 끈기가 있다면 감정사의 길을 걷는 사람이 종종 있다.
카이엔의 세 거울이란 젊은 감정사들 중 가장 촉망받던 세 사람을 일컫는 이름이다.
로시에르 하논, 피니어스 렌, 엘리노어 유스틴이 그 셋이었다.
로시에르 하논은 수도 카이에른의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이 높았다.
남작가의 자제인 데다 감정학 외에도 모든 과목에서 우수생이어서 그가 마침내 감정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을 때 다른 학부 교수들 중 아쉬워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피니어스 렌은 동방인 아버지와 카이엔인 어머니의 혼혈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둘 다 이름 있는 학자였다. 로시에르 하논보다는 두어 살 위였는데 로시에르 못지않은 기재여서 아카데미의 쌍룡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몇 해 선배라서 같은 기수가 아닌 탓에 내놓고 우열을 가린 적은 없지만 올리버 로렌스가 제이든에게 귀띔한 바로는 피니어스 렌이 한 수 위라고 했다.
엘리노어 유스틴은 동부 실리온 아카데미의 자랑이었는데 원래 감정에 뜻을 두었던 것은 아니지만 감정 마법에 재능이 발현하는 바람에 감정사의 길로 전환했고 다른 둘에 비해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재능과 침식을 잊은 노력으로 그 둘을 따라잡았다고 했다.
이 셋이 아카데미 학부를 졸업할 무렵부터 카이엔의 세 거울이라는 별명이 항간에 떠돌았다.
“세 거울은 뭐…… 누구 덕분에 지금은 빛이 바랜 거울이지요.”
로시에르 하논은 제이든의 칭찬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또래의 세 거울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내심 카이엔 최고의 기재는 본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디선가 제이든 로스라는 희대의 천재가 튀어나와서 5급, 4급, 3급, 2급 감정사 시험을 삼 년 만에 파죽지세로 통과했던 것이다.
심지어 제이든 로스는 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저명한 감정사가 따로 키운 직전제자도 아니어서 더 자존심이 상했었다.
‘피니어스라면 몰라도 어디서 나왔는지 듣도 보도 못한 제이든 로스라니. 사문의 내력도 밝히지 못하는 자인데.’
로시에르 하논의 눈꼬리가 위쪽으로 뾰족해졌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감정사 모임 같은 데도 통 나오질 않아서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중부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경험을 쌓는다고 순례 여행자처럼 전 대륙을 돈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물을 보니 생각보다도 더 어려 보여서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무슨 말씀을요. 감정사란 장거리 달리기와 같은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운이 좋아서 자격증은 좀 빨리 땄지만 감정사는 역시 경험이 말하는 직업이잖습니까.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도토리 키재기 한다고 선배님들이 웃으시겠습니다.”
제이든이 웃으면서 로시에르의 기분을 풀어주자 그 말이 맞다는 듯 카시우스 백작이 웃으면서 로시에르의 등을 툭툭 쳤다.
“그래, 그래, 누구 거울이 더 빛나는지는 나중에 봐야 알지. 그나저나 그 고양이도 눈에 익군그래.”
“예. 작년에 뵈었을 때도 데리고 있었으니 아마 보셨을 겁니다.”
“흐음…….”
카시우스 백작은 수염을 매만지면서 외알 안경을 들어 제이든의 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실리를 뜯어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마스터 다미에르를 뵌 적이 있는데 마스터 다미에르도 고양이를 한 마리 데리고 다니셨지. 그 때문에 한동안 감정사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게 유행처럼 됐던 적이 있는데 한때뿐이지 금방 흐지부지되어 버렸거든. 감정사 일을 하면서 동물을 건사하기가 쉽지 않다더라고.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감정사는 오랜만이네.”
“냐앙!”
아실리가 인사라도 하듯이 얌전하게 울면서 고개를 귀엽게 기울였고 카시우스 백작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얌전한 아이라면 데리고 다닐 만하겠군. 내려가던 길이었나 본데 그만 가보게. 소네트 백작이랑 의논해서 식사 자리 한번 만들어 볼 테니 사양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제이든은 소네트 백작과 로시에르 하논과도 인사를 나누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계단참을 돌아 내려오는데 로시에르 하논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겉멋만 들어서, 마스터 다미에르 흉내 내느라고 고양이까지 달고 다니네.”
* * *
-아까는 왜 그랬어?
건물을 빠져나오자 아실리가 물었다.
-계단에서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을 때.
“아 그때 그 회색 소녀상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끼더니 옛날 풍경 같은 게 흐릿하게 보였어.”
제이든은 그때 환각처럼 본 내용을 아실리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아실리, 혹시 다미에르 님도 이런 적이 있었어?”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응, 조금 다르긴 하지만 세시온도 2급에서 1급으로 승급할 무렵에 그런 경험이 있었어. 세시온의 경우는 처음에 뭔가 보이기보다는 유물이 말을 거는 것처럼 자꾸 말소리가 들렸다고 했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유물의 내력이 보이기 시작했었어.
“내가 본 건 아마 그 계단 옆 회색 돌 소녀상과 관련된 것 같아.”
-그런 것 같네.
“지금은 보호막 안에 있어서 그냥 육안으로 보는 것 외에 더 자세히 감정해 볼 수는 없는데, 꽤 좋은 물건이긴 해도 크게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거든. 나중에 한번 자세히 보고 만져볼 수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 소네트 백작한테 부탁하면 해줄 걸? 제이든이 왔다고 엄청 기뻐했으니까.
“응, 가자. 미누엘이랑 이노시카 양이랑 점심 같이 먹기로 했는데 늦을라.”
-나 크림 파이 사 줘. 아까 다른 관람객이 말하는 거 들었는데 이 동네 크림 파이가 그렇게 맛있대.
“아이고 알았습니다. 먹보 스승님.”
제이든과 아실리가 멀지 않은 음식점 거리 쪽으로 사라지고, 삼 층에서 일을 보고 난 카시우스 백작 일행도 아래층을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로시에르 하논은 계단 옆 벽 쪽으로 전시된 회색 돌 소녀상을 유심히 보았다.
아까 제이든 로스가 정신을 빼고 보고 있던 게 이거 같은데.
한참 보아도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사무실에 가서 경매품의 기록을 한 번 더 확인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로시에르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점심 시간이라서인지 관람객도 좀 뜸해진 사전 전시장 삼 층, 계단 옆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또독 소리가 나면서 회색 소녀상의 왼쪽 어깨 부분에 보일 듯 말 듯한 실금이 갔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