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화
7. 회색의 소녀(1)
여기저기서 달짝지근하고 고소하고 짭짤한 냄새들이 풍겨와 바람을 타고 맴돌았다.
가을철이라 노점의 먹거리도 풍부했고 한쪽 모퉁이에선 노래를 부르는 악사 앞에서 구경꾼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가로등과 횃불의 노랗고 붉은빛 아래에서 광장은 몽환적으로 일렁이는 중이었다.
아실리가 코끝을 치켜들고 킁킁거렸다.
“실리, 배고프니? 아까 도시락을 일찍 먹었더니 좀 출출하긴 하네.”
-배고픈 것까진 아닌데 맛있는 냄새가 너무 많이 나.
“그러게, 어디 보자.”
빵, 과자, 과일, 고기 꼬치, 각종 튀김, 소시지…….
“손님, 이리 오세요. 벌꿀 입힌 군밤 맛 좀 보세요!”
“손님, 신선한 에녹 사과입니다. 한 입 씹어보세요. 즙이 뚝뚝 떨어지는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입니다.”
“거기 예쁜 고양이야, 주인님이랑 이쪽으로 와보렴!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닭고기 꼬치가 있단다!”
둘이 먹다 하나 죽는 거 아니었나? 제이든과 아실리는 고양이를 부른 노점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제법 솜씨 좋게 닭과 꼬치를 그린 입간판을 세워 둔 노점에선 고기 굽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고기만 원하시면 고기만, 야채랑 같이 원하시면 야채를 같이 끼워서 드립니다. 양념해 구운 거랑 양념 안 하고 소금에 찍어 드시는 것 중에서 고르실 수 있습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노점 요리사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부지런히 석쇠에 꼬치를 굽고 있었다. 맛이 좋은지 선 채로 먹고 가는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고기랑 야채 꼬치는 2실버, 고기만 끼운 꼬치는 3실버입니다.”
가격도 적당하다. 제이든은 은전 다섯 개를 주고 양념 안 한 닭고기만 끼운 꼬치 한 개, 양념한 고기와 파, 버섯, 피망 등속을 산적처럼 번갈아 끼운 꼬치를 한 개 샀다.
-요즘은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어. 옛날엔 이런 꼬치는 2, 3코퍼만 내도 수북이 줬는데 요샌 코퍼 동전은 거의 쓰지도 않네.
“고양이 주실 거면 이거 쓰세요.”
연륜이 오래되신 고양이는 물가 타령을 했지만 주인이 눈치 좋게 종이 접시를 하나 내주자 입을 다물고 반짝이는 눈으로 고기를 바라보았다.
꼬치에서 뺀 양념 안 한 고기를 접시에 담아 아실리에게 주고 제이든은 자기 몫의 고기를 베어 물었다.
이거 맛있네!
매콤하게 양념된 고기에다 파와 버섯을 같이 씹으면서 제이든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카이엔 대륙으로 넘어온 후 닭꼬치를 여러 번 먹어 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다. 이 양념은 뭐랄까, 제이든의 입맛에 굉장히 잘 맞는, 말하자면 한국식 맛이었다!
제이든은 입간판의 그림 밑 광고문구를 다시 보았다.
-동방에서 배워 온 비법 양념!
“진짜 동방에서 배워 오신 양념인가요?”
주인은 손등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제이든을 향해 웃었다.
“양념이 독특하죠? 동방에서 배워 온 거 맞아요. 엄밀히 말하면 동방에서 오신 분한테 배웠지요.”
“동방에서 오신 분이라면?”
“제가 올봄까지도 동부 해안 지역에 살았거든요.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하이옌 항구 근처에 뱃사람들이나 선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음식점 거리가 있었어요. 거기 음식점 하나가 동방 음식 전문점으로 유명했지요.”
“아하!”
“선대 주인이 동방에서 온 분이라고 했는데 음식이 독특하면서도 맛깔스러웠어요. 제가 그 집에서 삼 년간 일을 하면서 몇 가지 비법을 배웠거든요.”
그렇구나. 제이든은 동방 대륙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짙어졌다. 이렇게 비슷한 맛을 낸다니 동방 대륙은 어쩌면 고향과 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실리와 꼬치를 한 개씩 더 먹고, 일행과 나눠 먹을 요량으로 꼬치를 넉넉히 사서 숙소 쪽으로 향하는데 아실리가 울었다.
“야아옹!”
“왜?”
고양이는 벌꿀을 입혀 파는 군밤과 과자 노점 쪽으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고기 많이 먹었는데 단 거 또 먹으려고? 점점 더 먹보 고양이가 되네?”
-제이든도 삼십 년쯤 같은 사료와 같은 간식만 먹어 봐.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지.
“내가 밥해 주기 전에는 별말 없이 잘 먹었잖아?”
-그건 그런뎅…….
아실리는 꼴깍 침을 삼키고 분홍색 혀로 입 주변을 핥으면서 웃었다.
-그냥 마법으로 재생되는 사료만 먹을 때는 몰랐는데 제이든이 이것저것 만들어주니까 옛날 입맛이 다 살아났단 말이야.
제이든이 그림 외에 잘하는 게 있다면 요리를 들 수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누이 밑에서 크다 보니 집안일도 거들고 저 먹을 건 스스로 챙기곤 했는데 요리가 적성에 맞아서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이세계에 넘어와서도 도움이 될 줄이야.
숨겨진 계곡의 집에서 감정 수련을 할 때, 마을에서 식료품을 사다가 음식을 해 먹으면서 아실리에게도 만들어줬는데 감정 공부에는 점수가 엄청 짠 아실리가 제이든의 요리에는 매번 후한 점수를 주면서 뭔가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곤 했다.
-우리 세시온이, 모든 면에 탁월하고 모르는 거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세상 최고의 천재였지만 딱 하나…… 요리는 잘 못했거든.
제이든은 쿡쿡 웃으면서 아실리가 원하는 과자를 사고 과일도 좀 사서 숙소로 향했다.
* * *
소네트 경매는 일주일간 진행된다.
처음 사흘간은 사전 전시라 해서 경매에 나올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고 경매 참여자들에게 보여주는데 이 기간 동안에도 물건 위탁이나 접수는 가능하기 때문에 미누엘은 글로비스에 도착하자마자 접수처를 찾아가 헤카디아 공주의 너울을 위탁했다.
“제이든 로스의 감정서군요.”
경매 위원 중 한 명인 3급 감정사 로시에르 하논은 미누엘이 제출한 감정서를 보며 눈을 빛냈다.
“헤카디아의 너울에 제이든 로스의 감정서라니, 이번 경매에선 이게 제일 화제가 될 물건 같습니다.”
“확실히, 소네트 수준으로는 진귀한 물건이지. 셀레스테에 더 어울릴 물건인데 말이야.”
참관인으로 참여한 카시우스 백작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자 경매 주최자인 소네트 백작은 은근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꾹 참았다.
작위는 같은 백작이라도 카시우스 백작은 소위 유서 깊은 동부 출신 귀족이고 셀레스테 경매에 항상 참여하는 임원이기도 해서 소네트 경매를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직 젊은 소네트 백작보다는 연배가 높기도 했고.
헤카디아의 너울처럼 귀한 물건이 소네트에 나왔다는 게 배가 아플 테지. 뒤에서 소네트 경매를 장터라고 부른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번에 이 너울 말고는 화제가 되고 있는 물건은 없나?”
“이틀 전까지 가장 기대되는 물건은 다하르 흑태자의 투구, 카리온의 소녀상 두 가지였습니다. 이제 헤카디아의 너울까지 삼파전이 되겠네요.”
“동방 물건은 없고?”
“서너 가지 있긴 한데 크게 주목할 만한 물건은 없습니다.”
“동방 대륙 물건 중 괜찮은 게 있으면 제이든 로스가 올 텐데. 그자가 동방 물건에 관심이 많거든.”
“아, 그러고 보니 카시우스 백작님은 로스 감정사를 만나신 적이 있으시지요?”
“음, 작년에 로드포드 백작가에서 왕관의 진품과 가품을 가려낼 때 참관했었지. 나도 실물을 보기는 그때가 처음인데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놀랐지만 실력은 대단하더군.”
“이십 대라는 게 정말입니까?”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이십 대 중반일 걸세.”
“그 나이에 2급이라니, 태중에서부터 감정사 공부를 한 것도 아니겠고 정말 믿기 어렵네요.”
* * *
그 제이든 로스는 소네트 경매의 첫날 사전 전시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지구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카이엔 대륙은 엘프나 수인, 마법사가 있는 세계라서인지 고양이를 데리고 전시장에 들어오는 것도 가능해서 아실리도 함께였다.
물론 말썽을 부리면 바로 내보낸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고 들어오긴 했다.
사전 전시에 경매 참여 골동품이 모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미리 제출된 골동품은 대부분 다 전시되기 때문인지 경매 전부터 봐두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네트 경매의 사전 전시는 신분만 확실하면 관람 제한도 없어서 경매 참여자가 아니라도 관람 목적으로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전시 물품은 모두 마법으로 보호되는 투명 보호막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안전봉도 설치되어 있었으며 경비원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물건도 다양하고.”
제이든은 이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왕후 귀족들이나 저명한 수집가들이 모이는 카이에른이나 셀레스테 경매도 가 보았지만 소네트는 또 나름대로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경매가 기대되는데. 소네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아.”
-헤카디아의 너울은 전시에 안 나왔지?
“미누엘이 오늘 등록했으니까 아마 내일쯤 전시될 거야. 로렌스 선생님이 구매하라고 한 소녀상을 좀 보자.”
카리온의 소녀상은 대륙전쟁 이전 일곱 왕국 시대의 명장 카리온이 조각한 소녀상이다. 카리온은 다른 조각도 훌륭하지만 소녀상을 가장 많이 조각했고 가장 유명한 것도 소녀상이었다.
일찍 병사한 딸을 그리워하며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소녀상은 7점이었다.
이번에 소네트 경매에 위탁된 소녀상은 백여 년 만에 새롭게 발굴된 것이라 해서 일찍부터 ‘여덟 번째 소녀’라는 별명을 얻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여덟 번째 소녀’는 삼 층으로 구성된 전시장의 이 층 중앙, 가장 좋은 자리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역시 이번 경매의 중요한 물품인 ‘다하르 흑태자의 투구’가 있었고 아마 내일쯤 ‘헤카디아의 너울’이 이들과 합류할 것이었다.
소녀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카리온의 작품이었다. 카리온의 고향인 리카노스 섬의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카리온 특유의 우아한 선이 잘 살아 있었다.
아련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소녀의 얼굴은 청순하고, 부드럽게 내민 한쪽 팔과 화사한 손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좋은 물건이다. 옷자락이 조금 부서진 거 빼곤 훼손된 부분도 거의 없고. 로렌스 선생님이 탐낼 만하네. 15만 골드로 낙찰받을 수 있으려나? 더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제이든은 소녀상을 확인한 후 다른 층의 골동품과 미술품도 구경했다. 소녀상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품은 없었지만 꽤 재미있는 예술품들이 있어서 몇 점 눈여겨봐 두었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장.
“그래, 우리 먹보 고양이 또 맛있는 거 먹어야지.”
3층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뭔가 잡아끄는 듯한 느낌에 제이든은 계단 옆 구석 쪽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아까도 보긴 했지만 특별할 게 없어 지나친 조각상, 이쪽도 소녀상이긴 했지만 카리온의 소녀상처럼 빛을 발하는 게 아닌 평범한 회색 돌로 깎은 소녀상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