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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2화 (12/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화

6. 경매장 가는 길

제이든은 벽난로 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쭈뼛쭈뼛 자세를 잡았다.

“음, 무협지 같은 데서 보면 이렇게 기연을 만나면 구배지례를 하고 그러던데.”

-그런 거 안 해도 돼. 손만 이렇게 앞으로 모으고 맹약의 인사만 해. 이름 밝히고.

제이든은 아실리의 말대로 손을 합장한 뒤 다미에르의 초상화를 향해 꾸벅 절을 했다.

“다미에르 님, 권재인이자 제이든 로스인 저는 다미에르 님의 뒤를 이어 감정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다미에르 님의 초상 앞에서 맹약의 인사를 올리니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 탓인지 초상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초상화 속의 노인이 파란 눈으로 제이든에게 미소를 보냈다.

-잘했어. 이제 서재를 보러 가자.

아실리의 뒤를 따라가면서 제이든은 생각했다. 집 크기로 보면 서재가 아마 이층 침실보다는 좀 크겠지? 학습 속도를 빠르게 해준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한동안 죽었다 하고 공부만 해야 하겠네.

나한테 유물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원래 책이랑 그림을 좋아하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빨리 감정사 자격을 따서 유물 찾기를 시작하자. 그래야 빨리 집에 돌아가지.

어린 세시온과 아실리의 그림이 있는 서재 문 앞에서 아실리가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이제 제이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서재에 들어가서 책도 보고 실험도 할 수 있어. 자, 한번 열어 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돌리고 한 걸음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제이든은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뭐야!

천장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도 예술품처럼 우아한 서가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서재를 한 번 휙 둘러본 제이든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나왔다. 이건 사기야!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층으로 달려가서 초상화 앞에 매달렸다.

“영감님! 이건 사기잖아요. 말도 안 돼요. 무를 수 없어요?”

-안 돼, 이제 무를 순 없어.

뒤따라온 아실리가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미에르의 서재는, 양쪽으로 천장을 찌를 듯이 높은 서가가 끝도 없이 서 있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았다. 이 집이 수십 채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광활한 공간이 이층의 작은 문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서재에 있는 책만 공부해도 3급은 쉽게 통과한다더니……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제이든의 통곡 소리가 작은 거실에 메아리쳤지만 초상화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실리는 못 본 척 뒤돌아 앉아서 그루밍만 했다.

* * *

-제이든, 괜찮아? 정신 좀 차려 봐.

“감정사님, 감정사님, 손을 움직이셨어. 눈도 깜박이셨어요.”

아실리의 목소리와 웬 여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제이든의 귀에 들려왔다.

“감정사님, 괜찮으세요?”

이번엔 젊은 남자 목소리다. 눈을 몇 번 깜박였더니 초점이 잡혔다. 붉은 곱슬머리의 청년이 제이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누엘…… 그래 미누엘 파노스라던 청년이었다.

“정신이 드셨어! 감정사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혹시 저 때문인가요?”

-제이든!

은회색 고양이가 미누엘을 와락 밀어내고 제이든의 가슴에 엎어졌다.

“아실리, 나 괜찮아.”

제이든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며 아실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이 드셨네요. 감정사님. 다들 걱정했어요.”

바닥이 덜컹덜컹 움직인다 했더니 마차 안이었다.

자그마한 마차 안에 두툼하게 깐 담요 위에 제이든이 누워 있었고 그 주변에 아실리와 미누엘, 그리고 톰슨 골동품상의 그렉 톰슨과 이노시카 톰슨이 둘러앉아 있었다.

아, 꿈이었구나. 제이든은 눈을 비볐다. 오랜만에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의 일이 꿈에 나왔네. 그 서재를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지. 그 후로 일타강사 고양이의 채찍질을 받으며 밤낮으로 공부하고 수련했던 거 생각하면 정말이지…….

“인간 승리다, 인간 승리. 예전에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고 하버드고 다 골라서 갔을 건데.”

“삼촌, 감정사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데 병원부터 가야…….”

“아 괜찮습니다. 제가 꿈이 덜 깨서 그런 거예요.”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린 제이든이 이노시카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제가 아까 실수로 나무에 머리를 부딪쳤거든요. 그래서 잠깐 기절했었나 본데 그새 아주 생생한 꿈을 꿔서요.”

“아니, 무슨 머리를 어떻게 부딪쳤기에 기절까지 했나그래. 이젠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해서 그랬던가 봐요.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렉 톰슨은 제이든의 상태를 확인한 후 괜찮아 보였는지 마차의 포장을 들추고 마부석의 소년에게 소리를 쳤다.

“어이, 로비, 마차 좀 천천히 몰아라. 감정사님 깨어나셨어!”

마차를 몰고 있던 루이네 여관의 말구종 소년은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빨리 병원 가야 하는 줄 알고 서두르고 있었거든.”

“예. 그나저나 미누엘만 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톰슨 씨네까지 오셨네요.”

원래 제이든은 아실리와 함께 숲길에 서서 미누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의 소란 때문에 미누엘도 제이든도 마을마차를 타고 델리움으로 가기가 어렵게 된 참이었다.

제이든은 2급 감정사라 가는 길에 내내 사람들에게 시달릴까 걱정이 되었고 미누엘은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게 알려져서 혼자 글로비스까지 가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미누엘이 루이네 여관의 마차를 빌려 함께 가기로 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제이든은 먼저 출발해 산길에서 미누엘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루이스 씨한테 여관 마차 빌리고 있는데 마침 톰슨 씨도 마차를 빌리러 오셨더라고요. 루이스 씨가 톰슨 씨랑 같이 가면 든든하고 좋을 거라고 적극 추천하셔서 함께 가기로 했어요. 감정사님이랑도 안면이 있다고 하시고.”

“우리도 향로를 델리움의 금고에 다시 넣으러 가야 하는데 마을마차는 오늘 너무 붐벼서요. 겸사겸사 소네트 경매도 보고 오려고 동행하기로 했는데요.”

이노시카는 하늘색 눈을 크게 뜨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산길에 들어와 보니 나무 밑에 감정사님이 쓰러져 계시잖아요. 고양이는 엉엉 울고 있고.”

-내가 언제!

아실리는 당황한 얼굴로 부정했지만 이노시카는 감동한 듯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주인을 걱정하는 고양이는 처음 봤어요.”

미누엘이 훌쩍 코를 들이마시며 끼어들었다.

“저는, 혹시 저 도와주신 것 때문에 험한 일이라도 당하셨나 하고 진짜 놀랐어요.”

“그러게, 나도 혹시 그 상인 놈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몽둥이 찜질이라도 한 건가 했다니까.”

“아닙니다. 제 실수였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 몸 상태 좋습니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아실리도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듯 심호흡을 하면서 제이든의 몸에서 떨어져 그루밍을 시작했다. 제이든은 아실리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 아기 새는 어떻게 됐어?”

-둥지까지 도로 올려다 줬어. 내가 물고 가는 줄 알고 어미 새가 기겁을 하더라. 눈곱만큼도 안 다치게 잘 물고 둥지까지 올려다 줬는데.

“잘했어. 아실리.”

머리를 더듬어 보니 이마 위쪽으로 알밤 같은 혹이 만져졌다.

벌써 5년이 지났구나.

이제 카이엔 대륙의 제이든 로스로 잘 적응해서 권재인이었던 시절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처음 왔을 때의 꿈을 꾸자 집과 가족, 친구들에 대한 타는 듯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누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차원을 넘은 경우 양쪽 차원의 시간이 똑같이 흐르지는 않는다는데, 서울은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궁금했다.

* * *

마차 안에서 이노시카와 그렉이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요기를 하고 델리움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라 평소 같으면 관공서가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지만 소네트 경매 특수로 일주일간만 24시간 업무를 본다고 했다.

루이네 여관의 소년 로비는 하룻밤 묵고 필요한 물품과 식료품을 구매해서 다음 날 메이빌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제이든과 미누엘, 톰슨 숙질은 하룻밤 델리움에서 묵은 후 다음 날 함께 글로비스로 가기로 했다.

“저희는 일단 은행으로 갈 건데요. 미누엘 씨는 숙소에 있겠다고 했고.”

“저는 우편국에 좀 들르고 나중에 숙소에서 뵙겠습니다.”

가을날 저녁이라 제법 쌀쌀한데도 델리움은 들뜬 분위기 때문인지 열기가 느껴졌다.

시청 앞 광장에는 횃불과 마법 가로등이 함께 밝혀져 있었고 노점이 줄을 이어 서 있었다.

소네트 경매가 글로비스의 명물이라 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델리움까지도 축제 분위기가 이어져 있는 듯했다.

“카이에른이나 셀레스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만 여긴 여기대로 재미있네.”

제이든은 델리움 시나 소네트 경매는 처음이지만 카이에른 경매와 셀레스테 경매는 참관한 경험이 있었다.

애완조를 파는 노점에서 새 모이를 좀 산 제이든은 우편국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6시에 퇴근했을 우편국 직원은 임시 야간 근무가 못마땅한지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야간 우편은 10시까지만 접수받습니다. 긴급 우편인 경우는 추가금이 있고요. 부엉이만 가능하고 매는 내일 새벽 6시부터 가능합니다. 고양이가 대기실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새들이 놀랍니다.”

“사서함 확인하겠습니다. *S-J1030-4550입니다.”

머리도 들지 않고 사무적으로 응대하던 직원은 놀란 듯 제이든을 다시 쳐다보았다.

앞에 *S가 붙는 사서함은 일반 사서함이 아니라 마법 영상구다. 전 대륙 어디에서든 우편물을 확인할 수 있는 마도구지만 사용료가 굉장히 비싸서 일반인은 거의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서함 등록자 확인을 마친 직원은 제이든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고 제이든은 아실리를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둥글고 큰 지구본처럼 생긴 영상구의 표면에 흐르고 있는 구름 문양에 제이든이 손을 갖다 대었다. 구름 문양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다가 양쪽으로 걷히면서 서신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제이든은 순서대로 서신을 읽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는 인쇄를 했다.

“이 영상구에 프린트 기능이 있는 건 진짜 놀랍다니까! 이 정도의 마법 기능이 있으면 자동차도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쪽으로는 발달이 안 된 게 이상해.”

제이든이 인쇄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영상구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이든, 어디냐?”

“아 깜짝이야. 로렌스 선생님!”

영상구 속에선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젓다가 하며 부산을 떠는 중이었다.

“이 영상을 제이든이 빨리 봐야 할 텐데, 이놈이 사서함 확인을 언제 할지 알 수가 있나. 아무튼 제이든, 이 영상 확인을 하는 건 아마 델리움 아니면 글로비스겠지? 이번 소네트 경매에 카리온의 소녀상이 나온단다. 그거 좀 꼭 낙찰받아다오. 이거 큰 의뢰다. 알겠지? 금액은 15만 골드까지는 낼 수 있다. 물론 더 싸게 낙찰받으면 좋고. 부탁한다!”

“아니, 이 아저씨가 참! 무슨 의뢰를 이렇게 해?”

제이든은 로렌스에게 영상 통화를 넣어볼까 하다가 속 좀 타라고 답신도 안 쓰고 그냥 일어서서 나왔다.

올리버 로렌스는 제이든이 3급 감정사 시험을 볼 때 시험 감독관이었는데 그 후 가까워진 게 복인지 화인지 모를 사람이었다.

“일 다 보셨습니까?”

“예. 이건 배달부들 간식으로 주세요.”

아까 샀던 새 모이 봉지를 우편국 직원에게 건넨 제이든은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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