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화
5. 감정사의 고양이의 감정사
“여기요! 갓 구운 빵이랑 비스킷 나왔어요! 식기 전에 맛들 보세요!”
“수도에서 유행하는 문양입니다. 비단은 아니지만 훨씬 실용적이에요. 보고 가세요!”
“칼 갈아드려요! 도끼 갈아드려요! 창날 세워 드립니다!”
산기슭 마을이라 해서 한산할 줄 알았는데 마을은 제법 크고 번화했다.
-오늘 장날이라서 그래. 하긴 나도 마을 나오는 게 진짜 오랜만이라 그새 마을이 많이 커졌네.
재인보다 한두 걸음 앞에서 걷고 있던 아실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름은 안 잊어버렸지?
“응. 제이든 로스.”
-이제부터 제이든이라고 부를게.
전날 밤 세시온 다미에르의 영체가 재인에게 집어넣은 정보 중에는 이 세계의 기초 상식 외에 새로운 신분이 들어 있었다.
일반 상식이 문서로 받은 정보처럼 표면적으로 재인에게 들어와 있다면 ‘제이든 로스’라는 신분만큼은 마치 인두로 각인해 놓은 듯 재인에게 또렷이 박혀서 정말 자신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신분 외의 기초 상식은 실제로 보거나 겪은 게 아니고 정보만 받은 느낌이라 재인-제이든은 아실리를 따라 마을에 나와서 카이엔 대륙의 실제 생활상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실리의 거처에 물과 우유, 간단한 건량 외에는 사람이 먹을 게 없어서 식료품도 사야 했고 옷도 두어 벌 장만해야 했다.
유리며 거울 등을 파는 가게 문 앞에 커다란 전신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제이든이 거울을 보니 원래 권재인의 모습과 많이 닮았지만 이쪽 세계의 사람으로 보기 자연스러울 정도로 살짝 모습이 변한 청년이 거울에 비쳤다.
밤색 더벅머리, 검은 눈, 윤곽이 분명한 코와 입, 지구 기준으로 본다면 동서양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잘생긴 손님, 거울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제이든이 거울을 보고 있자 마차 안에서 상인이 나왔다.
“아니, 괜찮습니다.”
제이든이 손을 저으며 떠나려 하자 상인이 얼른 붙들었다.
“요즘은 남자도 꾸미는 세상인데 큰 거울이 부담스러우면 자그마한 거라도 하나 장만하시지.”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호객하는 상인을 떨치고 발을 옮기자 아실리가 냐옹거렸다.
-마을을 잘 봐 둬. 네가 만약 감정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선 살 수 없고 마을에 나와서 살아야 하니까.
“응.”
-저기 봐. 은행이야. 저긴 우편국이고.
“새 파는 가게가 아니고?”
-아니야. 사람 배달원은 주로 소포를 다루고 간단한 편지는 비둘기랑 까마귀가 배달해서 새가 많은 거야. 야간 배달은 부엉이가 하고 긴급하거나 중요한 우편물은 좀 비싸도 매를 쓰는데 매는 도시 우편국에나 있고 이런 마을엔 없어.
“신기하네.”
-네 고향-지구라고 했지? 거기선 우편용 새를 안 써? 배달원으로 사람만 쓰면 말을 탄다 해도 신속성에서 비효율적일 텐데?
“비둘기는 전서구라고 해서 오래전엔 많이 썼다는데 요즘은 안 쓰지. 요즘은 심지어 편지도 안 쓰는걸. 이메일이라는 게 있어서.”
-이메일?
“그러니까 뭐냐면…….”
미대생은 진땀을 흘리며 컴퓨터와 이메일에 대해 고양이에게 설명했고 잠시 후 아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이 영상구를 써서 소통하는 거랑 비슷한 거구나. 여기도 도시 우편국엔 사서함 형식의 영상구가 있긴 해.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필요하고 값도 비싸서 일반인은 못 쓰지만.
얼추 이해는 된 것 같아서 제이든은 안도했는데, 아실리가 앞으로 걸어가며 들릴 듯 말 듯 종알거렸다.
-근데 설명을 참 못하네. 감정사는 말발이 진짜 중요한데.
‘저 고양이가, 어디 보자, 넌 얼마나 설명을 잘하나.’
제이든은 아실리를 쫓아가서 이것저것 마을 안에서 알고 싶은 것들을 집요하게 물어대었다.
잠시 후……. 제이든은 부루퉁하게 입을 다문 채 걸었다.
‘무슨 고양이가 설명을 저렇게 잘해, 아주 일타강사네, 일타강사야!’
시무룩해진 제이든의 뒤를 따라오던 아실리가 웃음을 참느라고 꼬리로 입을 막았다.
‘어디 날 시험하려고. 내가 세시온이 마법사들이나 감정사들 상대로 강의하는 거 참관한 게 수십 년인데.’
아실리는 제이든을 쫓아가서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몸을 비볐다.
-제이든, 배고프지? 저기 좋은 빵집이 있으니까 빵 사 가자. 예전에 저 집 빵이 진짜 맛있었어.
“너 빵도 먹니?”
-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람 먹는 거 다 먹을 수 있게 됐어. 너무 맵거나 짠 것만 아니면 다 먹어.
“어서 오세요.”
앞치마를 두른 후덕한 부인이 제이든을 반기다가 빵집 문 앞에 얌전히 꼬리를 똬리처럼 틀고 앉는 아실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님 고양이인가요?”
“아 네. 일단은 그런 셈이에요.”
아실리를 바라보던 여주인은 둥근 뺨에 눈이 파묻힐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가끔 오던 고양이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네요. 아주 유명한 감정사 할아버지가 키우는 고양이였는데, 정말 예쁘고 똑똑한 고양이였어요. 저도 그런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부모님께 막 졸랐었지요. 그렇게 예쁜 고양이는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닮았네요.”
그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과자 두어 개를 가지고 나왔다.
“야옹아, 이거 먹을래? 그 고양이는 이 계란과자를 좋아했었는데,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나네요.”
* * *
-아주 귀여운 아이였는데 벌써 그렇게 나이가 들었네.
“그 빵집 아줌마 말이야?”
-응.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어. 세시온이 가끔 마을에 가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세시온 보느라 난리였는데 그 애는 나만 쫓아다녔어. 이름이 아마 플로렌스였지.
아실리는 빵집 여주인이 챙겨준 계란과자 조각을 오물거리며 삼킨 후 미소를 지었다.
-세시온이 떠나고 나서 마을에 두세 번 나왔었는데 늘 저 애가 없어서, 어디 먼 데로 시집갔나 했는데 오늘 봐서 반갑네.
제이든은 장터를 한 바퀴 돌면서 당장 입을 옷 두어 벌과 식료품을 샀다.
카이엔 대륙은 지구와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점이 많았다. 시간 단위나 날짜 단위도 지구와 같았고 식료품도 지구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것이 많았다.
쌀도 팔고 있었는데 이쪽 사람들은 밥을 주식으로 먹지 않아서 용도가 제한되어 있는 듯했다.
-밥이라는 거 옛날에 세시온이 동방 요리 전문점에서 포장해다 준 거 먹어 본 적은 있어. 동방 대륙에선 밥을 먹는대.
“쌀을 조금 샀으니까 나중에 내가 밥을 하면 한번 맛이나 봐. 네가 먹어 봤다는 밥이랑 얼마나 다른지 궁금하네.”
아실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마을을 가로질러서 숨겨진 계곡으로 돌아가는 포털이 있는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빵집 옆 길가에 골동품을 파는 포장마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골동품 살림살이며 장신구 등을 싣고 다니며 파는 카이엔 판 방물장수인가 보다. 봇짐이 아니고 마차인 거 보니 방물장수치고는 스케일이 큰데?
“이게 이래 봬도 동방에서 건너온 물건이라니까, 이 장식 좀 봐요. 얼마나 정교한지. 이거 지니고 있으면 병도 안 걸리고 남편이 한눈도 안 파는 축복을 받은 명품이라니까. 부인 아버님 대부터 골동품에 관심 많으셨던 거 알아서 내가 일부러 챙겨왔다고!”
나이가 지긋한 골동품 상인은 침을 튀기며 골동품 거울 자랑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왠지 거울을 자꾸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제이든도 슬그머니 가까이 갔다.
“나야 뭐 괜찮은데, 그렇게 좋은 물건이라면 우리 딸 시집보낼 때 혼수로 하나 넣을까…….”
빵집 여주인은 망설이면서 거울에 살짝 손을 대보았다.
“야아옹!”
-저거 사면 안 되는데.
아실리가 못마땅한 소리로 울었다.
“그러게”
제이든도 맞장구를 쳤다. 골동품이긴 한데 왠지 기분 나쁜 물건이었다. 탁한 빛깔의 연기가 거울에 감돌고 있었다.
그와 아실리가 걱정스럽게 보는 동안 빵집 여주인은 마음을 굳혔는지 골동품상과 가격 흥정을 시작했다.
“잠깐만요.”
제이든이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만 따로 뵐까요?”
“어머, 아까 고양이랑 같이 오셨던 분.”
“예. 맞아요. 잠시만 이쪽으로 오세요.”
제이든은 빵집 여주인을 저만치 떨어진 쪽으로 데리고 가서 속삭였다.
“저거 사시면 안 됩니다. 골동품이긴 한데 좋은 물건이 아니에요.”
“?”
“안 좋은 기운이 서려 있어요. 원래 주인도 몹시 고통스러운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해요.”
“누가요?”
“아실리가, 아니, 책에서, 네, 책이요. 고서에서 저 거울 사진, 아니, 그림이랑 사연을 봤어요.”
“총각 감정사예요?”
“아뇨 아직 감정사는 아닌데, 감정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제이든은 되는대로 대답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빵집 여주인은 더듬거리며 만류하는 제이든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아래쪽에서 제이든보다 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더니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야옹아, 너도 내가 저걸 안 샀으면 좋겠니?”
“미야옹!”
아실리는 그녀의 손에 머리를 콩 콩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녀는 일어서서 제이든에게 웃어 보였다.
“잘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말리시는 것 같으니 저건 안 사도록 하죠.”
제이든과 아실리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제이든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진짜 감정사가 되시면 꼭 한번 들러주세요.”
“……예.”
“고양이도 꼭 같이 오렴.”
“냥!”
* * *
“아휴. 진땀 흘렸네.”
제이든은 주방에 식료품을 내려놓으면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답만 알고 풀이를 모르면 오늘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 사면 안 되는 거 분명히 보이는데 설명을 할 수가 없잖아.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물건인데 설명도 못 하고 신고도 못 하고. 제이든이 감정사 자격증을 따면 저런 거 막을 수 있어.
“그래, 그래, 옷 산 건 이층 침실에 두면 돼?”
이층에는 간소한 침실이 있고 침실 맞은편 벽에도 문이 하나 있었다.
“저기가 서재야?”
-응.
“한번 봐도 돼?”
-안 돼. 세시온의 뒤를 잇기로 맹약하고 나면 볼 수 있는데 그전까지는 외부인이라서 볼 수 없어.
하긴 마법사의 서재를 함부로 공개할 순 없겠지.
서재의 문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파란 눈의 금발 머리 소년이 은회색 고양이를 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과 고양이의 분위기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저 그림…….”
-응, 세시온이랑 나야. 우리 어렸을 때.
제이든은 그림을 바라보는 아실리의 눈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저렇게 어릴 때부터 세시온이 백발이 될 때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니. 그가 떠난 후 수십 년간 아실리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제이든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너 내 고양이 할래?”
-?
“내가 이 세계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내 고양이 하자.”
아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넌 좋은 사람이지만, 난 세시온 다미에르의 고양이야.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다른 주인은 정하지 않을 거야.
제이든은 잠시 뻘쭘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주인 말고 집사 하지 뭐. 내 고향에선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하던데 내가 네 집사가 돼줄게.”
아실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마침내 눈을 반달처럼 접으면서 웃었다.
-네가 집사 노릇을 잘할 것 같진 않은데. 그냥 감정사를 하자. 내 감정사, 응?
감정사의 고양이는 이제 고양이의 감정사가 될 이계 청년에게 다가와 보송보송한 얼굴을 뺨에 비볐다.
-내가 잘 가르쳐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