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화
3. 파랑새
-그나저나 메이빌에서 도망 나오느라 힘들었당.
“그러니까!”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미누엘과 상인들의 작은 소란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데다 함께 입회했던 사람의 입이 가벼웠던지라 제이든이 2급 감정사라는 게 소문이 나버렸다.
원래 지금의 메이빌처럼 어중간한 경매꾼들이 잔뜩 포진한 작은 마을이 제일 무서운데.
“총각, 총각, 그렇게 유명한 감정사람서? 어디 가지 말고 요기 잠깐만 기다려. 우리 집 가보로 내려오는 항아리 좀 가져올 텐께, 잠깐만 봐줘.”
“감정사님, 너무 멋있어요. 사인 좀 부탁드려요.”
“얘는 감정사님 바쁘신데 사인은 무슨, 감정사님, 요거 한 번만 봐주세요. 얼마 전에 선물 받은 목걸이인데요, 사파이어가 맞나요?”
“애들은 비켜라. 이보게 감정사. 내가 이번에 소네트에 출품하려고 하는 물건인데 말이지. 미리 한번 감정을 받아볼 수 있겠나? 감정료는 섭섭지 않게 냄세!”
정해진 감정료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오만가지 물건을 다 들고나오는 마을 사람들부터 정말로 경매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감정을 부탁하는 물품들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관에서 도망쳐 나와서 델리움으로 떠나는 마을마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가 함께 타고 가겠다는 사람들 틈에서 또 도망쳐 나와야 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지?”
제이든과 아실리는 메이빌을 벗어나 델리움으로 가는 산길 모퉁이에 서 있었다. 메이빌 쪽을 향해 목을 빼던 제이든이 아실리에게 눈짓했다.
“저것 봐, 아실리, 새가 있어.”
-난 아까 봤어. 어미 새가 경계하고 있어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중이야.
숲 안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 나무 위에 새 둥지가 있고 귀엽게 생긴 아기 새 두 마리가 머리를 빼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서 어미 새가 제이슨과 아실리를 경계하며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날개로 아기 새들의 머리를 눌러 둥지 안으로 숨기고 있었지만 호기심 많은 아기 새들은 계속 어미의 날개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삐삐거리는 중이었다.
“어디나 엄마들이 고생이구나.”
말 안 듣는 아기 새들이 마치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들처럼 엄마의 날개 밖으로 계속 머리를 쏙쏙 내미는 게 귀엽고도 우스웠다.
“저렇게 경계할 거면 둥지를 좀 높은 데다 짓지, 너무 잘 보이잖아.”
웃고 있던 제이든이 갑자기 으아앗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엄마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며 둥지 가장자리로 몸을 뽑아 올린 아기 새 한 마리가 균형을 잃고 바깥으로 고꾸라지더니 장난감 헬리콥터처럼 파다닥거리며 떨어지는 중이었다.
앞뒤 돌보지 않고 몸을 던진 제이든은 나무 둥치에 쾅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들이받았지만 떨어지던 장난꾸러기 아기 새는 용케 그가 치켜올린 손에 걸렸다.
어미 새가 허둥지둥 맴돌며 아래로 내려왔고 놀란 아기 새는 울지도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부리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제이든, 괜찮아? 제이든!
아실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에 몽롱하게 맴돌면서 제이든의 눈에 어미 새의 눈동자가 스쳐 지나간 후 강렬한 기시감이 찾아왔다.
아니, 이건 기시감도 아니야. 분명히 겪었던 일이잖아.
* * *
5년 전, 제이든은 서울의 외곽 지역에 살고 있던 스물한 살의 권재인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터울이 큰 누이 밑에서 자랐지만 누이는 부모 못지않은 사랑으로 그를 키웠다.
재인은 밝고 성실하게 자랐고 어릴 때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주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주요 미술전에서 두 번이나 입상을 했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대에도 들어갔다.
이제 앞길이 탄탄하다고 믿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동안 고생 많았던 누나에게도 보답할 수 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 재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찾아왔다.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글자가 이중으로 보이고 사물의 선이 뿌옇게 겹쳐 보이기 시작하면서 난시가 심해진 줄 알았으나 점점 눈이 어두워지면서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고 딱히 치료법도 없었다. 과로 때문인 듯하니 휴식을 취하라는 권고를 받고 학교까지 휴학하면서 좋다는 약도 먹어보고 민간요법도 써봤지만 눈은 하루하루 더 어두워져 가기만 했다.
완전한 실명은 아니었지만 사물이 디테일을 잃고 하나하나 덩어리로 보이게 되더니 마침내 색상이 사라지면서 무채색의 세계가 재인을 둘러쌌다.
어릴 때부터 한눈 한번 안 팔고 그림에만 몰두해온 재인이었는데 그림을 그릴 수도 없게 되었다.
누나도, 매형도, 소꿉친구인 은진과 정훈도 재인에게 힘을 주려고 애썼지만, 재인의 마음은 점점 더 공허해졌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주저앉으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려 했지만 자꾸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인은 마음을 잡아보려고 좋아하던 박물관을 찾아갔다.
재인의 집에서 뒷산 쪽으로 이십 분 정도 걸어가면 산기슭에 아담한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1950년대에 세워진 사립 박물관인데, 서울 3대 사립 박물관(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섯 손가락을 꼽는다면 꼭 들어간다 할 정도로 알찬 곳이었다.
재인은 어릴 때부터 이 박물관을 좋아해서 여러 번 왔기에 문자 그대로 눈을 감고도 찾아올 수 있었다.
소장품도 하나하나 다 알고 있었으며 박물관의 옛 유물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듯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힘이 났었다.
아직은 혼자서 찾아올 수 있었지만, 하루하루 나빠지는 눈이 언제 완전히 안 보이게 될지 몰라서 조금이라도 눈이 보일 때 박물관 구석구석을 한 번 더 봐 두고 싶기도 했다.
이제 흑백의 형태로밖에 보이지 않는 유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관람한 재인은 박물관의 뒤뜰로 나왔다.
먹으로 그린 수묵화 같은 산이 눈앞에 보이고 그 위로 좀 더 짙은 먹물로 붓질한 듯한 하늘이 내려앉는 걸 보니 아마 노을이 지고 있는 듯했다.
재인은 흐린 눈으로 산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흑백의 세상이라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시 한번 붉은 석양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색 물감을 풀어서 마음껏 그림을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린애가 그린 그림처럼 형태만 보이는 누나의 얼굴, 그 다정한 이목구비를 다시 선명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재인의 상념을 깨뜨렸다. 뭔가 흰색과 검은색의 얼룩 같은 덩어리가 쏜살같이 퍼덕이며 재인의 눈앞을 가로질렀다.
“삐이익, 삐익, 삐이익!”
뭐야, 새잖아? 우리 파랑새인가?
박물관의 뒤뜰에는 수령이 오래된 고목이 두어 그루 있었다.
처음 박물관을 지을 때 나무를 베어야 한다고 했는데 초대 관장이었던 해송 선생은 옛 유물을 사랑하여 박물관을 짓는 사람이 옛 나무를 베어서 되겠느냐고 고목을 그냥 둔 채 박물관을 조금 비켜서 짓도록 했다.
그 고목 위에 언젠가부터 보기 드문 파랑새가 둥지를 틀었고 해마다 새끼를 낳고 길렀다.
복을 가져온다는 길조 파랑새. 박물관 사람들이나 단골 관람객들은 그 새를 ‘우리 파랑새’라고 부르며 박물관의 마스코트처럼 여겼다.
새는 절박하게 울면서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사람이었다.
“아 이놈의 새 새끼가!”
거친 남자의 음성이 울리고 새를 피하려는 듯 재인 쪽으로 달려온 사람이 재인의 어깨를 확 밀치면서 박물관 계단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 사람은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이봐요! 뭐 하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든 재인은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 사람의 손에 쥔 것이 삐이이 연약한 소리로 울었던 것이다.
“삐이익!”
재인이 그 남자를 잡아당길 때 어미 새가 화살처럼 내리꽂히며 날개로 그의 얼굴을 때렸다. 남자는 재인과 어미 새를 거칠게 뿌리치더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팔을 위로 올렸다.
“그래, 준다, 줘, 더러워서 준다고! 파랑새가 복이 있기는 뭔!”
사내는 야구 투수처럼 팔을 뒤로 잡아당겼다가 공중으로 힘껏 내질렀다. 자그마한 회색 덩어리가 돌멩이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봤다기보다는 느끼면서 재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받았다!”
머리가 계단 옆 기둥에 호되게 부딪쳤지만 재인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용케 아기 새를 받아내었다. 아기 새는 재인의 손바닥에 밤톨만 한 머리를 힘없이 떨군 채 조그만 가슴만 발랑거리고 있었다.
‘죽었나? 가슴이 움직이는 거 보면 죽은 건 아니겠지?’
깨질 듯한 머리를 한 손으로 싸쥐면서 아기 새를 들여다보는 재인의 눈앞을 파란 날개가 스쳐 지나갔다.
응? 재인은 놀라서 머리를 들었다. 파란 날개라고? 좀 전까지 내게는 흑백의 무채색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잔디밭에 내려앉은 어미 새가 수묵화로 그린 듯한 배경에서 홀로 선명하게 재인을 돌아보았다. 파란 날개 아래쪽의 흰 깃이 또렷하게 반짝였다.
수묵화 위에 붉은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산호처럼 붉은 부리가 선명해지고 새까만 눈동자가 재인과 마주쳤다.
이상하다? 바로 앞에 마주한 사람 얼굴에서도 이목구비를 분별하기 어렵게 된 지가 벌써 두어 달이 넘었는데, 동그랗게 뜬 어미 새의 검은 눈이나 섬세한 깃털이 또렷하게 보였다.
머리가 점점 더 아팠다. 재인은 한 손으로 머리를 싸쥔 채 아기 새를 든 손을 파랑새에게 내밀었다. 파랑새가 까치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어서 가까이 오더니 날개로 재인의 손과 아기 새를 함께 감쌌다.
재인의 눈앞에서 천천히 땅이 흔들렸다. 내 머리가 아파서 그런가? 지진이 난 것처럼 서서히 흔들리는 땅을 보며 재인이 머리를 들었다.
사내가 계단 위에 엎어져서 비명을 지르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싸는 걸 보니 정말 흔들리는 게 맞나 보다.
재인이 까무룩 정신을 잃기 전에 본 것은 마치 풍경에 녹아들 듯 사라지는 박물관과 손바닥 위의 아기 새와 어미 파랑새의 까만 눈동자였다.
* * *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 괜찮아? 정신 좀 차려 봐.
어딘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면서 손, 발, 팔다리의 느낌이 조금씩 살아났다. 이마에 누군가 찬 물수건을 올려준 것처럼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재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정신이 드니?
커다란 초록색 눈의 은회색 고양이가 앞에 앉아 있다가 축축한 앞발로 재인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