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화
2. 팔찌와 너울(3)
“뭡니까? 당신은 입회만 하면 되는데.”
대번에 앞에 앉았던 상인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제이든은 싱긋 웃었다.
“사실 저도 이쪽으로 관련이 좀 있는 사람이라서요. 감정도 잘하셨고 떳떳하신데 뭐 어떻습니까? 잠깐만 볼게요.”
계약서를 읽어 본 제이든이 말없이 마크 감정사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불쾌한 듯 턱을 쳐들었다.
“감정서도 보고 싶음 보쇼. 뭐 볼 줄이나 알까 모르겠지만. 잘못된 건 없을 거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예. 감정서엔 문제가 없겠죠. 그만하면 물건도 잘 보셨고.”
“뭐라고?”
제이든은 앞에서 뭐라 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미누엘을 향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상아 팔찌를 집어 미누엘이 처음 꺼냈던 바깥쪽 가죽 주머니에 넣고는 미누엘에게 돌려주었다.
“자, 팔찌를 파시는 거니까 이것만 저분들 드리면 됩니다. 2천 골드면 가격도 괜찮아요. 잘 받는 겁니다.”
“?”
미누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이든을 바라봤지만 앞에 앉았던 상인과 감정사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니, 그건 안 되지…….”
“왜요? 팔찌를 사시는 거잖습니까?”
제이든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샐쭉 웃었다. 아실리가 가끔 여우 같다고 하는 표정이다.
“원래 있던 대로 해서 줘야지 팔찌만 덜렁 주는 건 좀 그렇잖소. 계약서에도 팔찌와 그 부속물이라고 적어놨는데.”
상대가 낡은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자 미누엘이 화들짝 놀라며 주머니를 붙잡았다.
“혹시 이 주머니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거예요? 그런가요?”
미누엘은 낡은 가죽 주머니를 홀랑 뒤집어 보더니 앞뒤로 들여다보고는 탁자 위에 탈탈 털어보았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제이든은 팔찌를 쌌던 보자기를 집어 들면서 상인과 감정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고 한 거죠?”
“…….”
상인은 씩씩거리며 제이든을 노려보았고 감정사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제이든은 미누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팔찌는 저 사람이 감정한 대로예요. 진짜 보물은 이겁니다.”
미누엘은 제이든의 손을 보고 다시 얼굴을 보았다.
“보자기요?”
“예. 보자기요.”
제이든은 팔찌를 쌌던 반투명한 보자기를 펼쳐 보였다. 보자기치고는 얇은 데다 다소 낡아 보였지만 찢어지거나 해진 데는 없었고 정교한 문양의 자수가 놓여 있었으며 네 귀퉁이에는 기다란 술이 달려 있었다.
“이거야말로 로시난트 왕조의 마지막 공주 헤카디아의 유품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입니다. 공주가 혼례식 때 얼굴에 쓰려고 직접 수를 놓았던 너울이에요.”
* * *
로시난트 왕조의 마지막 공주 헤카디아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재녀였다. 그녀는 악기도 잘 다루었고 글씨도 뛰어났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재주는 자수였다.
그녀의 자수 솜씨는 당대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고 주변 나라들은 물론 먼 동방 제국에서도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그녀의 자수 작품을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로시난트는 공주의 자수 작품을 쉽게 밖으로 내돌리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나 한두 점씩 외국으로 선물할 뿐이었다.
이웃 왕국들에서 헤카디아에게 혼담이 여러 번 들어왔지만, 헤카디아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궁정에 드나들던 평민 화가였다.
그는 공주에게 걸맞은 신분은 없었지만 기품 있고 훌륭한 청년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혼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렸다. 헤카디아는 그의 그림을 사랑했고 그것을 그린 이도 사랑했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카디아는 온갖 어려움을 뚫고 부왕의 허락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사랑하는 이와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혼례식 때 입을 혼례복과 얼굴에 쓸 너울을 직접 만들었고 젊은 화가는 그녀와 함께할 혼례식장에 일생일대의 걸작이 될 만한 벽화를 그렸다.
혼례가 며칠 남지 않았을 때 그동안 호시탐탐 세력을 키워 오던 이웃의 다하르 왕국이 국경을 넘어 짓쳐들어왔다. 향후 이십오 년을 지속했던 대륙전쟁의 시작이었다.
카이엔 대륙의 일곱 왕국 중 가장 높은 예술성과 뛰어난 문화를 자랑했던 로시난트는 대륙전쟁 초기에 가장 먼저 무너진 왕국이었고 이후 잃어버린 황금왕국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때 헤카디아 공주와 화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이 과연 혼례를 치를 수는 있었는지, 왕궁이 피로 물들었을 때 공주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공주와 그 연인과 관련해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혼례식장으로 예정되었던 별궁의 벽에 화가가 신부를 위해 사랑을 담아 그렸던 벽화의 일부분뿐이다.
하지만 무너진 별궁의 벽은 그 벽화로 인해 옛 로시난트의 가장 귀한 유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 *
“벽화의 남은 부분에 혼례를 준비하는 신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그림이 작고 훼손된 부분도 있지만 신부가 눈 아래로 쓰고 있는 너울도 꼼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제이든은 보자기-너울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볼 줄 아는 사람이 본다면, 이 문양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지요.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화가와 공주가 상의해서 그때까지 없던 문양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궁의 마법사가 너울에 영원한 애정을 축복하는 마법을 걸었다지요.”
그는 미누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너울이 어쩌다 평범한 팔찌를 싸는 보자기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매에 내놓으시면 아마 시작가가 10만 골드 정도로 책정될 겁니다.”
“허! 말은 잘한다만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디서 고서 나부랭이나 좀 읽고 와서 나불거리기는…… 이 보자기가 헤카디아의 혼례 너울이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 애당초 마법 물품을 감정하려면 2급 감정사는 불러야…….”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제이든은 씩씩거리는 상인의 앞에 자격증을 꺼내 들었다.
“사실 저는 케이 스미스가 아니랍니다.”
“?”
“이런 사람입니다.”
샐쭉 웃는 그의 자격증을 들여다본 3급 감정사가 얼굴이 새파래져 중얼거렸다.
“제이든 로스…….”
* * *
“난 처음부터 그 상인들이 좀 의심스러웠어.”
제이든은 숲길 옆에 서서 아실리에게 말했다.
“아무리 루이네 집 음식이 맛있기로, 갈 길 바쁜 상인들이 사흘이나 일도 없이 메이빌처럼 작은 마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좀 수상하잖아. 일행 중 누가 아프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 너울을 가진 사람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아실리가 대답하면서 뒷발로 귀를 긁었다.
“그렇지. 애당초 미누엘이라는 그 청년이 사냥 갔다가 산에서 유물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제법 퍼졌거든. 물론 보자기에 신경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미누엘이 감정을 부탁했던 4급 감정사가 꽤 꼼꼼한 사람이었나 봐.”
-아항.
“그 사람이 감정한 물건들 중에선 그 팔찌가 가장 급이 높은 거라서 뿌듯하기도 했을 테고. 값비싼 기록용 영상구까지 구입해서 꼼꼼히 기록을 해놨었대. 그리고 감정사 모임에 나가서 자랑했는데 말이 퍼져서 그 상인들 귀에 들어간 거지.”
-으응.
“그 코엔 상단의 감정사도 상당한 사람이야. 헤카디아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너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코엔의 영주가 로시난트 왕조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전속 감정사가 로시난트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나 봐. 전에 벽화를 보러 다녀온 적도 있고 일부러 그 4급 감정사의 영상 기록을 확인하러 갔었다는 걸 보면 원래 헤카디아의 너울을 알고 있었던 거지.”
아실리는 앞발을 차례차례 핥은 후 꼬리를 잡아들고 꼬리 끝까지 깨끗이 핥았다.
-경매에 내놓게 되면 누군가 가치를 알아봐서 가격이 너무 비싸지거나 자기들이 낙찰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미리 가로채려고 한 거구낭?
“맞아, 여관에서 우연히 만난 척하려고 일찌감치 메이빌에 와서 기다린 거지. 어차피 이카루스에서 글로비스로 가려면 메이빌을 거쳐야 하니까.”
제이든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을 뒤집어 제 등을 핥는 아실리의 유연한 동작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실리, 그 감정사 신고해야 할까?”
고양이는 잠깐 생각하는 듯이 동그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원칙대로라면 신고하는 게 맞긴 한데, 신고해도 아마 증거 불충분으로 처리될걸? 실제로 사기가 이루어지기 전에 저지됐고 자기는 의뢰받은 팔찌를 제대로 감정했고 너울은 감정을 안 했을 뿐이라고 우기잖아.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심증만으로는 처벌을 못 하니까.
“팔찌 감정서는 제대로 작성되긴 했지. 하지만 의뢰인의 사주를 받고 미누엘을 속이려고 한 거잖아.”
-그치만 너울에 대해 알고 일부러 속이려고 했다는 증거가 없잖아, 심증이야 충분하지만 그것만으론 처벌이 안 될 거야.
“게다가 그 상인들이 미누엘의 팔찌를 샀고.”
코엔 상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누엘의 팔찌를 샀다. 물론 팔찌만.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내놓고 사기를 치려 했다는 걸 인정할 순 없었으므로 처음 말한 대로 팔찌만 거래하게 된 것이다.
-거래하고 나오는 얼굴을 내가 봤는데 삶은 가지처럼 우중충했어.
“가지한테 모욕적인 말 하지 마. 가지가 얼마나 좋은 채손데.”
청년과 고양이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2,500골드에 샀으니 속 좀 쓰릴 거야. 그거 원래 가격은 1,500에서 1,800 정도가 맞거든.”
상인들은 하려던 짓이 있어 미누엘이 앉은 자리에서 500골드를 올려 불렀는데도 군말 못 하고 구매를 수락했다.
-걔 아직 어린데 경우가 바르더라.
미누엘은 상인들과 헤어지자마자 제이든의 방을 찾아와서 250골드가 든 주머니를 건넸다.
“제가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요. 너울 감정료도 드려야겠지만 지금은 그만한 돈이 없어서.”
곱슬머리 청년은 부끄러운 듯 머리 색과 비슷한 주홍빛 얼굴이 되었다.
“이거 코엔 상인들에게 선금으로 받은 건데 우선 사례금으로 드릴게요. 나머지는 은행으로 송금받기로 해서 지금 당장은 이거뿐이라서요. 너울 감정료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글쎄요…….”
제이든은 멋쩍은 듯이 코끝을 긁었다.
“정식으로 의뢰받은 감정도 아니고 그냥 내가 끼어든 거라 감정료 받기가 뭣한데…….”
청년은 눈을 크게 뜨고 열성적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러시면 안 돼요. 제가 엄청 크게 손해 볼 뻔한 걸 막아주신 건데. 제가 잘 모르긴 해도 2급 감정사 감정료가 비싸다는 건 알아요. 그러심 그냥 팔찌 판 거 다 드릴게요!”
“아니, 아니에요.”
제이든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미누엘 씨 원래 감정받았던 산토스 씨란 분은 감정료 얼마 달라고 하던가요?”
“산토스 씨도 제 편의를 봐주셔서 나중에 받기로 하셨는데, 팔찌가 팔리면 판매가의 0.5%를 달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도 그렇게 하죠. 감정서를 써드릴 테니 너울이 소네트 경매에서 판매되면 그 판매가의 0.5%를 주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
미누엘이 꾸벅꾸벅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하고 나간 후 아실리가 제이든을 쳐다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맘에 들었나 봐. 꽤 싸게 책정했네.
“애가 귀엽잖아. 사실 내가 맘대로 끼어든 거라 감정료 제대로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러게, 쟤 보니 크게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