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화
2. 팔찌와 너울(2)
부드럽게 잘 익힌 마지막 생선 토막을 오물오물 씹어 넘긴 아실리는 만족스럽게 입 주변을 핥았다.
“야아옹!”
-우리 집 밥맛 어때?
나란히 밥을 먹던 루이가 궁금한 듯 아실리에게 야옹거리자 아실리는 입 주변을 깨끗이 닦은 후 기분 좋게 냐옹 울었다.
-닭가슴살도 부드럽고 생선도 신선했어. 사료도 잘 골랐고. 너 좋은 집에 사는구나.
-그렇지? 우리 엄마 아빠가 음식 진짜 잘해. 내 것도 맛있게 해주지만 사람들도 다 맛있어하더라.
자랑스럽게 코끝을 치켜올리던 루이는 다시 아실리에게 물었다.
-네 주인은 어때? 인상이 좋더라. 고양이랑 같이 여행하는 주인은 많지 않은데.
-제이든은 내 주인이 아니야.
아실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딱 잘라서 말했다.
-주인이 아니야?
-응, 내 주인은 단 한 사람뿐이야. 옛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사람.
-그럼 네 주인은 어디 가고 저 사람이랑 다니는데?
-내 주인은…….
아실리는 아련한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지개다리를 건넜어. 아주 아주 오래전에.
잠시 침묵하던 루이는 위로하듯 조심스럽게 아실리의 목덜미에 머리를 들이대고 비볐다.
-미안.
-아냐, 괜찮아. 오래전 일이고 제이든도 아주 좋은 사람인걸.
아실리는 루이에게 고마움의 부비부비를 돌려주며 고르릉거렸다.
-그럼 제이든이란 사람은 친구야?
-응, 주인은 아니고 동거하는 친구야. 아, 친구라기보다는…….
아실리는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며 초록색 눈을 장난스럽게 깜박였다.
-제자야.
* * *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제이든이 귀를 톡톡 두드리며 뒤뜰로 나가 아실리를 부르자 루이와 함께 놀고 있던 아실리가 뭔가 찔끔한 듯 깡충 뛰더니 총총총 달려와 제이든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많이 먹고 잘 놀았어? 이제 올라가서 자자.”
“미야옹!”
“근데 쟤는 왜 저렇게 날 쳐다보지?”
아실리를 따라 여관 안으로 들어오던 루이가 뭔가 묘한 눈으로 제이든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자, 빨리 올라가장.
아실리는 왠지 서두르면서 제이든의 다리를 머리로 콩콩 밀어 계단 쪽으로 향했다.
루이네 여관은 음식만 맛있는 게 아니라 방도 쾌적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공용 욕실에서 개운하게 씻고 오니 아실리도 열심히 몸단장 중이었다.
고양이는 워낙 깔끔한 동물이라 알아서 자기 몸을 깨끗이 관리하지만, 오늘은 축축한 풀밭에서 놀다 왔으니 따뜻한 물수건으로 아실리의 몸과 발을 잘 닦아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골골거리는 아실리를 보며 깨끗한 시트를 씌운 침대 위에 드러누우니 며칠간의 긴장과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서 금방 잠들 것 같았다.
-우리 내일은 어디로 가?
아실리가 도르르 굴러와서 제이든의 옆구리에 코를 박으며 물었다.
“우선 델리움 시에 가서 치안국 들르고 우편국 사서함 확인해야지.”
-치안국엔 그놈들 잡혔나 보러 가는 거지? 며칠 전 붉은 단검.
“맞아. 모르긴 몰라도 평범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아서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다음 의뢰 잡아놓은 건 없지?
“응. 사실 톰슨 골동품상 물건에 기대를 많이 해서 다른 의뢰는 다 미뤄놨었잖아. 내일 가서 사서함 좀 보고 뭘 할지 정하자.”
아실리는 하품을 하면서 제이든의 팔에 머리를 비볐다.
-오늘 수련은 안 해?
“아침에 했어. 너 잘 때. 나가서 체력 훈련도 하고 왔다고.”
-으응, 그럼 잘 때까지 책 좀 읽자. 음…… 제이든은 12세기 역사가 약하니까 ‘12세기 센과 시타의 석등 비교’ 어때?
“아우, 아실리이~”
제이든은 아실리의 뺨 옆쪽으로부터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면서 자장가를 부르듯 속삭였다.
“실리, 오늘은 날도 축축하고 몸도 찌뿌둥하니까 그냥 자자아. 응? 자장, 자장.”
고양이는 제이든의 손길을 즐기면서 골골 소리를 내며 점점 눈을 감았다.
몸이 나른하게 펼쳐지면서 토실토실한 분홍색 배가 드러나자 제이든은 이때다 싶어 말랑말랑한 배를 살살 쓸어주었다. 잔다. 잔다, 잔다아.
고로롱거리며 녹아내리던 아실리가 한순간 깜짝 놀라 감겼던 눈을 뜨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동료가 알고 사흘을 쉬면 고객이 안다고 했어. 공부해야지.”
에잇! 거의 다 됐었는데!
제이든은 아실리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북북 긁어주고는 배낭에서 책을 꺼냈다.
“냐앙!”
아실리는 불만스럽게 제이든을 흘겨보고는 발등에 침을 묻혀 정성스럽게 머리와 귀 쪽 털을 정리했다.
제이든이 베개를 등에 받친 채 책을 읽기 시작하자 아실리는 옆에 붙어 제이든의 배에 머리를 올리고는 조금 미안한 듯이 골골거렸다.
-제이든은 사물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지만 이론이 부족하잖아. 공부 열심히 해야 1급 감정사가 되지, 그래야 동방 대륙에서도 널 초빙해 갈 거 아니양.
아실리는 길게 하품을 하고는 앞발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모르는 거, 물어 봐앙…… 내일…….
“난 공부시켜 놓고 넌 왜 자?”
-난 고양이잖아…… 어쩔 수 없어. 많이 자야 된다옹…….
“말투 봐라, 이럴 때만 고양이라지.”
제이든은 투덜거리면서도 아실리가 편하게 눕도록 자세를 고치면서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루이네 집은 아침 식사 역시 훌륭했다. 아침 메뉴는 저녁에 비해 간단해서 두 가지뿐이었다. 팬케이크 정식과 오믈렛 정식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제이든은 오믈렛을 골랐다.
부드럽게 잘 익은 노란 오믈렛과 치즈, 곁들여진 양배추와 토마토도 신선했고 오렌지 주스도 새콤달콤한 것이 맛이 좋았다. 다음에 이 길을 또 지나게 된다면 꼭 들러서 다른 메뉴도 먹어 봐야지.
“식사 다 했으면 응접실 가서 물건 한번 보자고.”
“알았어요. 알았는데…….”
어제 저녁 보았던 곱슬머리 청년과 상인들이 함께 조반을 든 모양이었다. 일어서서 식당 안을 둘러보던 청년이 갑자기 제이든을 향해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카루스에서 온 미누엘 파노스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케이 스미스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제가 저쪽 상인분들과 물건을 하나 감정하려고 하는데, 입회 좀 부탁드리려고요.”
청년은 결국 상인들에게 물건을 보여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3급 감정사가 그냥 감정해 주겠다고 한 말에 끌렸겠지만 따로 입회인을 세울 생각을 한 걸 보니 기본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입회인으로 고른 것이 제이든이라니, 감이 좋은 친구였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양쪽 다 안면이 없는 사람을 고르기로 했는데, 스미스 씨가 인상도 좋고 이쪽 업계랑은 관계가 없는 분 같아서요. 정직하게 입회만 해주시면 되니까 부탁드려요.”
감이 좋다는 말은 취소다.
“응접실은 이쪽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종업원을 따라간 응접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주인장의 말대로 이 여관에서 상담이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 모양이었다.
“잘 봤습니다. 그럼 글로비스에서 뵙겠습니다.”
“예, 그때 또 말씀 나누지요.”
일이 다 끝났는지 응접실을 나선 사람들이 복도에 서 있던 제이든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일행 중 끼어 있던 여자 한 명이 제이든을 흘끗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미인이네.’
카이엔 대륙에선 보기 힘든 검정 단발머리여서 눈에 띄었다. 이쪽 사람들은 검은 머리도 흔하지 않지만 여자 용병이나 기사가 아닌 이상 나이가 열 예닐곱 살만 넘어도 단발머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방금 지나간 여자는 좋은 집 아가씨 같은 옷차림에 나이도 제이든 또래는 되어 보이는데 짧은 칼단발을 하고 있어서 이채로웠다.
“그럼 이쪽으로 앉아 보실까? 자네도 앉게.”
3급 감정사라는 자와 상인이 한쪽에 앉고 미누엘이 맞은편에 앉았다.
제이든은 약간 옆에 떨어져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제이든의 맞은편에는 상인들이 골라 온 입회인이 앉았다.
미누엘이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입구를 벌렸다.
안에서 나들나들하게 낡은 가죽 주머니를 하나 더 꺼내고 그 안에서 수놓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꺼냈다. 반투명한 보자기를 펼치고 나서야 화려한 장식의 상아 팔찌가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직업적 본성 때문에 제이든도 팔찌를 유심히 넘겨다보긴 했지만 상대가 감정을 크게 속이거나 하는 일만 없다면 참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름을 마크 클로이드라고 밝힌 3급 감정사는 장갑을 끼고 돋보기를 든 채 신중하게 팔찌를 살펴보았다. 제이든은 그가 감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하는 자세나 절차 모두 다 제대로 배운 티가 났다. 하긴 꽤 경험 많아 보이는 상인들이 전속으로 함께 다니는 감정사라면 실력의 고하는 있을 수 있어도 가짜는 아닐 것이었다.
한번 보기나 하겠다는 말과는 다르게 본격적으로 감정하는 모습을 보고 미누엘은 초조하게 침을 삼키면서 입술을 빨았다.
마침내 감정을 끝낸 마크 클로이드는 조금 딱하다는 얼굴을 하고 미누엘을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청년이 조급하게 묻자 감정사는 상인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참,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이 팔찌는 그다지 가치가 없습니다.”
“가품이란 말이에요?”
미누엘이 목소리를 높이자 마크 클로이드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가품은 아니에요. 로시난트 왕조의 물건이 맞습니다. 단지 팔찌 자체가 골동품으로서는 그다지 가치가 없어요. 화려해 보이지만 박혀 있는 준보석도 값진 게 없고 그냥 상아에 새긴 금장식 무게의 가치나 나갈까, 그 시절에 많이 제작된 물건이고 비슷한 장신구도 너무 많이 남아 있거든요. 희소가치가 없어요. 왕가의 팔찌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공이 예쁘긴 하지만 너무 흔한 물건이에요.”
“…….”
기대와 어긋난 결과를 들은 미누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인들도 기대했는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가격은 혹시 얼마 정도나 나갈까요?”
미누엘이 묻자 마크 클로이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로시난트 왕조의 물건이니까…… 아주 잘 받는다 치면 2천 골드 정도 되겠습니다. 혹시 눈먼 수집가가 잘 쳐준다면 그렇고요. 솔직한 예상가는 1천 5백에서 1천 8백 사이입니다.”
2천 골드가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미누엘이 기대했던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누엘은 실망한 듯 머리를 떨구었다.
“흠, 우리도 기대했던 물건이 아니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어떤가? 2천 골드 벌려고 굳이 글로비스까지 가느니 우리한테 그냥 팔고 가면?”
“?”
“우리 영주님 부인이 로시난트 왕조의 물건이라면 환장하시거든. 이번에 우리가 수도 가는 길이 바쁜데도 소네트 경매 들르는 것도 혹시 로시난트의 유물이 있으면 구해 오라고 닦달을 해서 가는 건데, 왕가의 팔찌는 아니어도 일단 그 시대 물건이긴 하니까 사다 드리면 좋아하실 듯해서 말야.”
상인은 인심을 쓴다는 표정이었다.
“어떤가? 우리한테 2천에 넘기면? 영주님이 수고비 좀 얹어주시면 좋고 아니어도 점수는 따겠지.”
청년은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앞에서 마크 클로이드가 감정서를 쓰고 서명한 뒤 인장을 찍었다. 감정사가 자신 있게 인장을 찍는 모습을 본 미누엘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원래는 소네트 경매에 부쳐보고 싶었지만…… 감정사님도 그렇게 말하시고 제 사정도 급하니까 그냥 2천 골드에 팔게요.”
“잘 생각했네, 빨리 돌아가서 형님도 돌봐주고 급하다는 사정도 해결해야지. 그럼 계약서를 쓸까?”
상인이 계약서를 꺼내 쓰더니 미누엘에게 내밀었다.
“자, 읽어 보고 걸리는 부분 있으면 말하게.”
미누엘이 계약서를 읽을 때 제이든은 슬그머니 그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잠시만 봐도 될까요?”
아 이놈의 오지랖, 이럴 거면 신분은 뭐 하러 숨긴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