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5화
2. 팔찌와 너울(1)
‘루이네 집’이라는 참 알기 쉬운 간판을 달고 있는 여관집 고양이 루이는 몸집이 큰 수컷으로 표범처럼 반점 무늬가 있는 짙은 밤색 고양이였다.
위압감이 있는 외모와는 달리 어수룩한 순둥이였는데, 아실리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처음 보자마자 아실리의 주변을 슬슬 맴돌았다.
“허허, 우리 루이가 댁네 야옹이한테 홀딱 반한 모양이네.”
사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루이처럼 짙은 밤색 머리칼에 건장한 체격의 주인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오래 함께한 반려동물과 주인은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루이와 주인장도 아주 그럴듯하게 닮았다.
“야옹이는 이쪽으로 오너라, 우리 루이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 손님은 여기 잠깐만 기다리시면 금방 식사를 준비해 드리지. 우리 마누라 솜씨가 꽤 괜찮다오.”
자랑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주인은 손님들로 가득한 1층 홀 쪽으로 턱짓을 했다.
“우리 집은 전문 식당이 아니고 여관이지만 음식 맛으로는 델리움 시내 식당들과 비겨도 꿀리지 않거든. 델리움에서 여기까지 밥만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니까.”
여관의 뒤뜰 쪽으로 난 테라스에 루이의 밥 자리와 놀이터가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뒤뜰 건너편으로는 아담한 마구간이 지어져 있고 여관에서 일하는 소년이 말먹이가 든 통을 들고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산간 지역의 자그마한 마을치고는 꽤나 규모 있는 여관이다.
“말이 있습니까?”
“우리 말은 한 마리뿐이고 나머지는 손님들 말, 숙박할 때 말을 맡기시는 손님들이 종종 계시니까.”
“그렇군요. 그럼 저는 아실리 사료 가지러 방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주인은 사람 좋게 손사래를 쳤다.
“야옹이가 사료를 가리나? 가리지 않으면 그냥 우리 루이 걸 같이 먹지? 루이야, 오늘은 친구가 왔으니 특식을 준비해 주마. 아, 주인님 건 우리 마누라가 잘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주인이 사료와 닭가슴살, 생선 토막 등을 고양이들에게 챙겨주고 있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큰 루이 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 갑니다!”
큰소리로 대답한 여관 주인은 제이든을 보며 씩 웃었다.
“내 이름도 루이라오. 사실은 루이스지만 동네 사람들이 재미로 나를 큰 루이, 고양이를 작은 루이라고 부르거든.”
아실리가 루이와 나란히 식사를 시작하는 걸 보고 제이든은 여관 1층의 식당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제법 많아 잠시 기다리니 주방에서 제이든의 음식을 내왔다.
향긋한 김이 오르는 버섯 수프부터 두어 숟가락 떠먹어 본 후 식사를 시작한 제이든은 포크에 파스타를 감아올리며 감탄했다. 과연 자랑할 만한 맛이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빵에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감칠맛 있는 파스타가 전체적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제이든은 음식 투정을 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비린 것만 아니면 가리는 음식도 없고 거친 음식도 군말 없이 잘 먹는다.
하지만 감정 공부를 시작한 후 원래도 예민한 편이었던 오감이 점점 더 발달함에 따라 후각, 미각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해졌기에 좋은 음식이나 좋은 향을 느끼는 감각도 남달랐다.
‘전체적으로 다 맛있지만 소스가 아주 일품이네, 이런 파스타 소스는 다른 데서 먹어본 적이 없는데, 뭘 넣은 거지? 뭔가 독특한 재료가 들어갔는데.’
식사를 마쳐갈 때쯤 여관 주인 루이스가 주방에서 커피 쟁반을 들고나와 제이든의 앞에 놓아주면서 물었다.
“식사는 어땠소? 맛있었나?”
“예, 정말 맛있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떠날 예정이었는데 음식 때문에 며칠 더 묵고 싶어질 정도의 맛이었어요.”
“크하하, 그렇지? 저기 저 손님들도 그런 말을 했다니까. 수도로 가는 상인들인데 하루만 쉬었다 간다는 게 밥맛 때문에 사흘이 됐다고 했어.”
주인은 두어 테이블 건너편에서 막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이라도 하려는지 종업원에게 와인을 주문하고 있는 서너 명의 남자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 근동 사람들이야 우리 집 음식 맛을 다 알지만, 저 손님들이나 댁처럼 멀리 외지에서 오신 분들까지 음식 맛을 인정해 줄 때 진짜 뿌듯하다니까. 젊은 손님은…… 아, 이름이 뭐라고 하셨더라? 케이?”
“케이 스미스입니다.”`
제이든은 숙박업소에 묵을 때 불필요한 관심을 모으기 싫어서 평범한 가명을 쓰곤 했다. 수도나 큰 도시에선 신분증을 제시해야 했지만 변두리 지역이나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는 가명으로도 숙박이 가능했다.
톰슨 골동품상에도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면 마을을 떠난 뒤에 해달라고 부탁해 놓은 터였다.
“그래, 케이 스미스 씨, 스미스 씨는 내일 어디로 가시나?”
“일단은 델리움 시에 들를 생각인데요.”
“말이나 마차 따로 몰고 오지 않으셨지? 내일 델리움에 가는 손님들이 많으니 마을마차가 꽤 붐비겠네.”
도시로 나가면 영업 마차도 많고 장거리를 운행하는 역마차도 있지만 메이빌에는 하루 한 번 델리움을 오가는 마을마차가 있을 뿐이었다.
“원래 이렇게 외지 손님이 많은가요?”
“아니지, 우리 마을이 델리움이나 글로비스 가다가 하룻밤 묵기 딱 좋은 위치에 있어서 평소에도 손님이 없진 않지만 이 정도로 북적이진 않아. 요 며칠은 소네트 경매 때문에 부쩍 손님이 많은 거라네.”
“아하, 소네트 경매가 이틀 뒤였군요.”
소네트 경매란 칠십 년쯤 전 델리움 시에 이웃한 글로비스 시의 유지였던 소네트 백작 부인이 시작한 예술품 경매인데 봄가을로 1년에 두 번 열리는 경매이다.
처음엔 지방 유지들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나 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서로 판매하는 정도의 소규모 경매였는데 차차 참여하는 사람도 물품도 다양해지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글로비스 시의 명물이 되었다.
원래는 델리움보다 훨씬 작은 도시였던 글로비스가 델리움과 어깨를 맞먹을 만큼 성장한 것도 소네트 경매의 역할이 크다고 한다.
수도 카이에른에서 열리는 카이에른 경매나 동부의 전통 있는 셀레스테 경매처럼 고급스럽지는 않고, 참여자의 신분 고하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소네트 경매를 장터라고 부르며 싸구려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물건도 제법 나오고 뜻밖에 명품을 저렴하게 구하는 경우도 있어서 인기가 많았다.
제이든도 평소라면 당연히 염두에 두고 들러볼 터였지만 톰슨 골동품상의 향로에 신경을 쓰느라 잊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경매 참여하거나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거든. 산 너머에서 오는 손님들이 우리 집에서 한숨 돌리고 가곤 하지. 진짜 값지고 귀한 물건 아니면 아예 우리 집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루이네 집에는 그런 중소 상인들의 거래 용도로 사용하는 응접실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메이빌이 작은 산간 마을인데도 톰슨 골동품상이나 루이네 집처럼 실속 있는 가게들이 있고 전반적으로 마을 살림살이가 윤택해 보이는 게 나름대로 교통의 요충지라 그런 모양이었다.
확실히 소네트 경매에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식당 내에서도 삼삼오오 모여서 경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제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여기서 2급 감정사의 신분을 들켰다가는 손님들 등쌀에 잠 한숨 못 자게 될지도 모른다. 조심해야지.
“아하 참! 진품이 맞다니까요!”
누군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제이든이 건너다보니 스무 살쯤이나 되었을까, 푸른 옷을 입고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청년이었다. 남부 출신인지 붉은 곱슬머리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인데도 흥분했는지 낯빛이 벌게진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로시난트 왕조 때 물건이라는 감정서도 받았단 말이에요.”
“누구한테?”
“옆 마을 산토스 씨. 올해 4급 감정사 시험 통과한 분이에요.”
“에이, 소네트 경매에 참가할 예정이라면 3급 감정서는 받아야지. 이제 막 4급 된 사람이 유물 본 걸 믿을 수가 있겠나.”
청년과 합석해 있는 사람들은 아까 루이스가 말해줬던 상인들이었다. 나이도 좀 있고 유들유들해 보이는 중년 상인들이 청년을 놀리자 푸른 옷의 청년은 걱정스러운 듯 가슴을 만졌다.
약간 불룩 튀어나와 보이는 게 뭔가를 품에 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글로비스까지 가서 망신당하지 말고 여기서 한번 보지? 그게 진짜 로시난트 공주의 팔찌라면 괜찮지만 가품이라면 왔다 갔다 경비 들고 고생만 하는 거잖아. 돈이 급한 모양인데 가격만 잘 맞으면 여기서 팔아도 괜찮지 않아?”
“글로비스에 요즘 사기꾼들이 한창 몰릴 때지. 자네처럼 경험도 없는 사람이 멋모르고 귀한 물건 들고 갔다가는 사기당하기 딱 좋다네. 게다가 동료도 없이 혼자 덜렁덜렁 간다니 내가 다 불안하네.”
“혼자 아니에요. 원래는 형님이랑 같이 가는 중이었는데 형님이 다리를 다쳐서 산 넘기 전 여관에 남겨놓고 왔다고요.”
혼자 남겨둔 형이 걱정되는지 청년의 얼굴이 흐려졌다.
“저런, 그럼 빨리 돌아가 봐야 되겠네.”
청년의 옆에 앉은 상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술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놓았다.
“에잇, 술 산 김에 내가 인심 한번 쓴다. 이봐, 마크, 이쪽으로 좀 와 보게.”
출입구 쪽에서 바람을 쏘이고 있던 중년 남자가 돌아보더니 가까이 왔다.
“이봐 젊은이, 마크는 우리 코엔 상단이랑 안면이 있는 3급 감정사라네, 이번에 델리움이랑 글로비스 거쳐서 수도까지 우리랑 동행하기로 했는데 물건 구매 시 감정도 부탁하기로 했거든. 자네 물건 좀 꺼내 보게. 마크한테 한번 봐 달라고 하지.”
“진짜 3급 감정사예요?”
“그렇다니까, 자격증도 있으니 보게.”
“그럼 이 층 방에 가서…….”
망설이는 듯하던 청년은 도리질을 쳤다.
“아니, 안 되겠어요.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허 참!”
코엔 상단의 상인이 두리번거리더니 음식을 나르고 있던 여관 주인을 향했다.
“주인장, 응접실 좀 빌립시다.”
그는 루이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청년에게 말했다.
“방에 들어가기 불안하면 응접실에서 한번 보지. 이 여관 응접실은 원래 그런 용도로 쓰거든. 여기서 거래도 많이 한다고. 그렇지 않소, 주인장?”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엉거주춤 일어서던 청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그런데 지금 말고 내일 아침에 봐요. 지금은 시간도 늦었고 날도 어두우니까 실수할 수 있잖아요. 내일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보여드리죠.”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제이든은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경험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런 것치곤 야무진 자세였다. 그래, 술 먹은 사람들하고 밤에 물건을 보는 건 당연히 피해야지.
곱슬머리 청년이 생각보다 침착한 것 같으니 나도 그만 올라가 자야겠다. 제이든은 아실리를 찾으러 뒤뜰로 나갔다.